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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과 기고글]/크리스찬북뉴스

지혜말씀으로 읽는 욥기 / 안근조 / 감은사

by 하늘땅소망 2020.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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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말씀으로 읽는 욥기

안근조 / 감은사

 

폭풍 속에서 들려오는 창조적 지혜

 

욥기는 낯설고 어렵다. 초반은 신화적 성향이 강하고 중반부는 밑도 끝도 없는 논쟁의 연속이다. 후반부는 어떤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나님의 질문과 아무런 결론도 없이 욥의 축복이 주어지고 마무리 된다. 23년이 넘도록 설교를 했지만 욥기 설교는 한 손으로 꼽을 만큼 적다.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단 한 번 밖에 하지 않았다. 욥기를 이해하기 위해 적지 않은 주석과 책들을 참고 했지만 단 한 번도 명료하게 정리된 적이 없었다. 욥기의 구조 단순하다. 1-2장은 천상의 회의를 통한 욥의 고난 이야기고, 3-37장까지는 친구들의 방문과 논쟁으로 점철된다. 마지막 부분인 38-42장은 하나님의 현현과 욥이 받은 축복이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은 사탄이 하나님과 대화한다는 내용을 차치하더라도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욥과 친구들의 논쟁은 도대체 뭘 의미하는지 당체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비슷한 내용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는 것일까? 그리고 엘리후는 왜 갑자기 등장하며, 하나님은 답을 주지 않고 질문만하고 사라지는 것일까? 몇 권의 주석들과 개요서들은 나름 의미 있게 해석했지만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았다. 필자가 알고 싶은 건 단지 욥기 흐름이나 신학적 주제가 아니었다.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욥과 친구들의 논쟁과 하나님의 질문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가였다.

 

구약 자체가 설교자들에게 인기가 없기도 하거니와 욥기의 경우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함 때문에 멀어졌다. 실제로 최근 10년 동안의 설교 통계를 개략적으로 살펴봐도 욥기를 본문으로 설교한 목사들은 많지 않다. 검색을 통해 노출된 설교를 찾아 읽어 봐도 대부분 획일적인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욥의 믿음과 인내이다. 이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필자는 이러한 주제를 용납하기 힘들다.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 욥은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는 아닌 듯 하다. 그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이 무너진 상황에서 믿음 없는 자처럼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고, 하나님을 원망했다. 욥기를 찬찬히 읽어보자. 욥기 고난 속에서도 감사했는가? 필자가 보기에 아니다. 그는 감사하지 않았고, 도리어 원망했다. 욥기 속에 있는 욥은 믿음의 사람도 아니고 인내의 사람도 아니다. 그는 단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인내로 대변될 수 있으며(5:11), 욥기는 지혜서이다. 그러니까 바로 이 평가들이 나는 용납할 수 없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마 욥기를 순수하게 읽은 독자들이라면 욥의 믿음이나 인내 보다는 처절한 울부짖음에 더 공감할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이제 이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이 책은 저자의 욥기 관련 논문들을 다듬어 가독성을 높여 출판한 책이다. 그러다보니 철저한 일관성이나 연관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 저자도 대략적인 순서를 말하면서도 꼭 순서대로 읽어나갈 필요는 없을 것’(13)이라고 조언한다. 그렇다 이 책은 반드시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순서대로 읽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며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욥기를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면 필히 정독하기를 추천한다. 어느 한 곳도 쉽게 넘어갈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먼저 욥은 의로운가?’라는 질문부터 해 보자. 일반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의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이다.(15:6)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욥의 의로움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1-2장에서 찾는다. 그것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욥의 마지막 부분이 아닌 초반부에서 의로움을 단정 짓는 것은 결코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욥은 분명 의롭다.(42:7) 그렇다면 욥의 의로움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필자의 독법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자는 욥기의 저자의 관점을 통해 드러낸다. 저자는 욥기의 저자를 포로후기 즉 주전 6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활동한 이스라엘의 지혜자로 조심스럽게 추정’(27)한다. 저자는 이 시기를 포로기 후기로 산정한다. 몇 가지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합리적 추론을 이어간다. 단어와 어근들에서 아람어화된 형태가 드러난 탓이고, 통치자들의 명칭이 포로 후기에 페르시아 시대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사탄이란 개념은 포로후기의 예언서인 스가랴(3:1-2) 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 근거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악인의 번영과 의인의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질문들은 포로후기의 정서와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악이 횡행하고, 모든 안식처와 보호막이 벗겨진 포로 후기의 관점에서 욥기를 읽어야 한다.

 

욥기의 저자는 포로후기 초기에 예루살렘의 회복을 꿈꾸며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한 경건한 유대인들 가운데 전통적인 야웨신앙의 한계를 초월하여 계시와 깨달음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한 지혜자의 기록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29)

 

필자는 저자의 주장에 완전히 동의할 수 없다. 연대적인 문제나 저작 시기에 대한 문제는 아직도 논쟁 중이고 확정하기 힘든 많은 난제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욥의 고난은 개인의 고난인 동시에 공동체의 고난으로 이해해야 마땅하다. 포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삶의 보호막이 무너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욥의 상황은 자신들의 처지와 다르지 않았다. 욥기는 답이 없다. 오히려 질문만 난무하다. 그럼에도 당당하게 지혜서로 불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곳에 역설이 담겨 있다. 저자는 개관에서 친구들과 욥을 비교하면 이렇게 설명한다.

 

본문에서 친구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눈앞에 펼쳐진 욥의 현실과 유리된 교조적 신앙의 반복에 있었다. 반면에, 욥은 철저히 실존적 현실의 문제를 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다. 삶의 현실과 동떨어진 관습화된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 되지 않는다. 삶의 한 가운데서 인생의 부정성(negativity)을 정직하게 떠안은 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부르짖음이 응답된다.”(35)

 

욥은 이해되지 않음을 삶과 유리된 교조적 고백으로 포장하지 않았다. 이해되지 않는 삶의 모호함을 부정하지도 않았고, 그것을 끌어안고 하나님께 항변했다. 저자는 2:4절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가죽 둘레에 가죽을 (둘러 주셨다)’로 해석한다. 그렇다며 이 표현은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삶의 근본이 들어있는 인생의 바운더리, 그 삶의 울타리들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49) 즉 욥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울타리들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욥은 하나님의 묵인하에 울타리안의 조화로부터 울타리 밖의 무질서’(51)로 내던져진 것이다. 이것은 정확하게 반()창조이다. 창조는 무에서 유로, 혼돈에서 질서로, 텅빔에서 충만으로 나아간다. 욥은 정확하게 거꾸로 되돌아간다. 욥은 이러한 자신의 상황을 부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 항변한다.

 

저자는 욥이 항변과 논쟁을 통해 점점 깨달음으로 나아고 있음을 통찰한다. 첫 단계는 단지 울부짖음에 불과하다. 두 번째 단계는 상황의 원인을 묻는 적극적인 항변의 모습’(345)으로 발전한다. 왜 악인 형통하며, 왜 악한 자들이 평안하며 번영하는가 묻는다. 이로서 욥은 기존에 가진 전통적인 하나님에 대한 앎을 너머 선다. 친구들은 끊임없이 욥에게 응과응보의 원리로 책망한다. 말이 통하지 않자 욥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무고함을 변호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상대로 법정소송을 제기’(346)한다. 탄식은 도전으로 발전하고, 도전은 다시 하나님은 소환하는 데까지 거침없이 나아간다.

 

욥기의 서론부터 시작되었던 욥을 둘러싼 울타리들이 이제 28장을 거쳐 31장에 이르러 완전히 붕괴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제 욥의 세계는 모든 경계가 무너져 내린 그 혼돈의 한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신비에 새롭게 열리게 된다.”(348)

 

고난, 즉 광야는 하나님의 학교이다. 모든 보호막이 무너지고, 경계가 사라진 곳에서 하나님은 욥을 만나신다. 친구들과의 논쟁은 지금까지 욥의 인식을 지배해온 정통적 신정론을 깨고 실존적 체험으로 이끈다. 울타리 밖에서 욥은 부르짖는다.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불안만이 있구나”(3:26)

 

욥은 처음에 자신의 의로움을 변호해줄 ‘변호자’(9:33)를 찾았고, 그 다음은 ‘보증자’(17:3)를, 그리고 마침내 ‘구속자’(19:25)를 고백한다. 친구들과 논쟁을 통해 욥은 점점 하나님께 나아간다. 결국 하나님은 폭풍 속에서 욥에게 말씀하신다. 폭풍 가운데서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은 지혜자의 음성이며 욥을 가르친다. 욥기 전체는 ‘종교적 완전으로부터 지혜자의 절정의 경지에 이르는 욥의 배움과 깨달음의 과정을 담고’(118쪽)있다. 이이것이 친구들과의 논쟁이 주는 의미이다. 울타리 밖에 있는 욥, 즉 고난 가운데 삶을 실존적으로 체득하는 욥과 아직도 정형화된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가진 친구들과의 논쟁인 것이다. 친구들은 끊임없이 욥에게 인과응보(因果應報)를 가르친다. 그러나 욥은 그것을 부정한다. 그렇다면 욥의 주장은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여호와는 폭풍 속에서 욥에게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은 폭풍 속에 계신다. 인간이 닿을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다. 폭풍 속에서 욥에게 하신 질문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통제 밖의 이야기들이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피조물들이다. 41:9에서 갑자기 1인칭으로 전화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독백인 동시에 천상의 존재들에게 욥에 대하여 소개하는 것이다. 특히 사탄에게. 욥이 누구인가? 그는 리워야단에 비결될 만한 존재이다. 


“그 사탄 역시 하나님을 중심으로 서 있는 천상회의 석상에서 지금 하나님께서 욥에게 대답하시고 그를 끝내는 의롭게 여기고 계심을 잠자코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욥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여 ‘욕하지’ 않았다.(참 1:11, 2:5) 오히려, 인간의 역사 가운데 나타나는 악의 문제에 대면하여 분연히 떨쳐 일어섰던 것이다.”(305쪽)


그제야 모든 것이 풀리는 것 같다. 친구들과의 논쟁은 천상에서 사탄과 천사 그리고 하님께서 바라보고 계신다. 시간이 지날수록 욥은 논쟁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정립하고 정교하게 다듬어 간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을 구속주로 고백한다. 하나님은 폭풍 속에서 말씀하심으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여 역사고 계시는 분임을 드러내신다. 욥은 그 안에서 ‘티끌과 재’와 같은 자신을 다시 인식하고 생각을 전환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리는 소극적인 인간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그 본연의 청지기적 모습으로 적극적으로 나아오기 원하’(315쪽)하시는 하나님의 사명자로 살아간다. 욥은 새로운 경계 안으로 들어간다. 이전의 경제와 가정, 신체적 울타리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 선산에서의 자기 발견’(322쪽)을 통해 자신을 인식한다. 


경이로운 책이다. 몇 곳에 투고한 논문을 모은 것이기에 일관성이 약하지만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귀한 논문들이다. 지금까지 읽은 욥기에 관련된 그 어떤 책보다 위대하고 탁월하다. 몇 번을 더 읽을 참이다. 서평을 위해 욥기를 두 번 넘게 읽으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욥기는 지혜서다. 욥기가 알려주는 지혜는 신정론이 아니라 실존적 신앙의 삶이다. 모든 것이 모호하고 뒤죽박죽이 된 역병이 창궐하는 시대에 욥기는 더 깊은 하나님의 신뢰로 나아가도록 독자들을 이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추천한다. 특히 고난 가운데서 살아가는 이들과 말씀을 가르치는 이들에게 더욱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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