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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과 기고글]/크리스찬북뉴스

용서 그 불편함에 관하여 / 방정열

by 하늘땅소망 2020. 2. 11.

용서 그 불편함에 관하여

방정열 세움북스

 

 

[갓피플몰] 용서, 그 불편함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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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라는 말처럼 쉬운 것도 없고, 어려운 것도 없다. 또한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가에 대해 오해되는 용어도 없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누구나 ‘용서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그 어떤 원수라도, 자신에게 해를 끼친 인간이라도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로인해 자신뿐 아니라 가족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병들게하고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한다. 그렇기에 용서는 너무나 쉽지만, 동시에 너무나 어려운 것이다. 아마도 이 책도 그러한 용서가 가진 이중적 측면이 가진 성향에 대해 해법을 찾고자 저술된 것이 아니겠는가. 부제인 ‘거짓 용서에서 벗어나 성경의 바른 용서 찾아가기’에서 읽혀지는 것처럼 진전한 용서는 성경적인 용서이며, 거짓 용서로 인해 진정한 용서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용서를 어떻게 풀어나갈까?

 

용서의 첫 단추는 ‘감정’이다. 용서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아니 누군가를 용서해야 한다는 부담감이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성적으로 반응하기보다 감정적으로 대응하게 된다.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라고 확정지을 수 없으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용서라는 주제를 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용서하지 못하고 자신을 미성숙하다거나 수준 낮은 사람으로 간주할까 봐 조심스러워하는 경계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16쪽)

 

그렇다! 용서하지 않으면 미성숙한 신앙으로 보이게 된다. 이러한 외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용서한 것처럼 행도하는 ‘거짓 용서’를 하게 된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직장 상사에게 성폭행을 당하고도 직장에서 나올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용서하지 않고 있는 자신을 그대로 둘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진 자매의 이야기는 용서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문제인지 잘 보여준다. 100명에 가까운 여성들을 살해한 게리 리지웨이(Gary Ridgway)를 용서한 피해자의 아버지 로버트 룰(Robert Rule)의 용서 이야기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해야할 용서의 모범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용서가 옳을 것일까? 전도연이 열연했던 영화 [밀양]은 어떤가? 피해자가 용서하기 전에 가해자가 주님의 용서를 받았다며 피해자에게 용서하지 않는 용서 말이다.

 

저자는 무조건적 용서가 진정한 용서는 아니라고 말한다. 무조건적 용서는 평화롭고 감동적일 것 같지만 ‘실제로 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거칠고 사나우며 혼란스러운 세상이 될 것’(47쪽)이다. 그렇다면 조건적 용서는 어떨까? 그런데 범죄의 현장으로 들어가보면 조건적 용사라는 것도 무의미하다. 대부분의 가해자들은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5쪽)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가해자에게 어떻게 진심어린 사과가 나올 것이며, 그러한 가해자를 어떻게 용서한단 말인가. 이처럼 진정한 용서는 어려운 것이다. 저자는 용서가 어려운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용서에 대한 모호한 정의 때문이다. 둘째, 용서의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셋째, 용서의 적용 범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결국 용서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음이 용서를 어렵게 하는 것이다. 사회 속에서 일어난 다양한 사건들은 피해자는 있으나 가해자는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들을 펼쳐 보이며 ‘용서의 대상’과 ‘이해의 대상’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모호한 용서를 어떻게 정의할까? 4장에서 저자는 용서의 바른 정의를 찾아 나선다. 다섯 가지 용서의 의미들을 정리한다. 유독 관심을 끌었던 부분은 다섯 번째 정의였다.

 

“용서의 정의에는 피해자의 자발성과 주도성이 내포되어야 한다.”(107쪽)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용서라면 진정한 용서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어떤 가해자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자발적이고 주도적으로 용서를 구한단 말인가. 많은 기독교인들은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분노가 시간을 두고 순화되기 전, 가해자가 사과 한 마디 하지 않는 상황, 피해자의 마음이 가해자한 대한 긍휼로 잠기기도 전에 용서할 것을 집요하게 강요하는 경우’(107쪽)가 적지 않다. 이러한 용서의 강요는 위허하고 잘못된 것이다. 일단 저자가 성경적인 의미를 파악해 정리한 용서에 대한 정의를 들어보자.

 

“가해자의 부당한 말과 행위로 피해자에게 심적, 정신적, 신체적 해가 발생했을 때, 가해자의 진심어린 사과(회개)를 전제로 피해 당사자의 자발적으로 가해자의 허물과 부당함을 덮어 주는 것이다.”(119쪽)

 

저자의 용서에 대한 정의는 조건적 정의에 가깝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성경적 정의다. 5장에서 이러한 정의를 보이는 성경의 용서의 예들을 소개한다. 요셉의 용서야말로 가장 위대한 용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드러난 용서의 형태는 조건적에 가깝다. 비록 요셉이 먼저 형들을 용서하기를 했지만 형들은 자신들의 죄를 깊이 뉘우쳤기 때문이다. 신약 속에서 소개되는 탕자의 비유나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 등은 기독교인들이 지녀야할 용서의 형태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용서는 여전히 어렵다. 그 어려움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위에서 가해자의 사과(회개)를 조건으로 피해자의 용서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원칙과 그것이 성경적이라는 주장을 일관되게 제시해 왔다. 하지만 그 원칙이 용서와 관련ㄷ하여 성경이 말하고자하는 핵심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원칙은 단지 핵심을 떠 받치는 모태에 불과하다. ... ‘가해자가 진심으로 사과(회개)할 때, 바로 그때 우리는 그를 기꺼이 용서해 주고 있는가?’라는 질문 말이다. 바로 그 지점이 불편하다.”(208쪽)

 

결국 용서란 가해자의 몫만은 아닌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서로 용서의 자리에서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책은 용서라는 난해하고 복잡한 문제를 성경을 통해 밝히 드러내려는 몸부림이 느껴진다. 용서는 이론도 아니다. 아무리 많은 용서에 관한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 한들 진작 자신에게 해를 끼친 이들을 용서하기를 결코 쉽지 않다. 특히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앗아간 경우라면 용서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용서는 한 편의 일방적인 선언이 아니다. 저자는 이러한 부분에 대해 성경 속에 드러난 용서의 의미를 잘 드러내 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사고 싶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야기하고 싶다. ‘용서’의 주된 목적, 의도는 ‘회복’이다. 가해자이든 피해자이든 회복되어야 한다. 특히 피해자가 회복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용서는 희생이 아니라 ‘회복’이다. 그렇다면 회복은 어떻게 가능할까? 저자가 앞서 줄곧 강요한 것처럼 가해자의 진심어린 사과 또는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가해자의 ‘진심어린 사과와 회개’는 ‘말’로 끝나서는 안 된다. 물질적, 정신적 보상이 뒤 따라야 한다.

 

수년 전, 필자가 ‘회복적 정의’라는 수업을 통해 깨달았던 것이 하나있다. 그것의 국가의 법은 죄인들의 범죄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그들을 어떻게 ‘형벌’한 것인가의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피해자는 안중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가해자 형벌 관점은 피해자의 또 다른 피해를 가중 시키고, 유발하게 한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가해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사과할 때 용서해 준다. 그러나 회복되지는 않는다. 캐나다 엘마이라 사건을 통해본 진정한 용서란 가해자과 피해자가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 연대함으로 보상이 이루어져야함을 보여준다. 이 책이 십자가의 사건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참여와 연대의 차원에서 바라보고,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한다면 한 차원 더 높은 용서를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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