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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Note/설 교

[장별설교] 에베소서6장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by 하늘땅소망 2020.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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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별설교] 에베소서6장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5장에서는 바울은 빛의 일과 어둠의 일을 구분했습니다. 빛의 일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어둠의 일은 육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하는 근거는 5:1-2에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드리셨다는 것입니다.(5:2) 6장은 이에 근거하여 6:1-9절까지 계속하여 삶의 문제를 다룹니다.

 

1-9절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

10-20절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21-24절 마지막 인사

 

1. 1-9절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

 

ㄱ. 자녀와 부모(1-4절)

 

1-4절까지는 자녀와 부모 사이를 다룹니다. 순서를 보겠습니다. 먼저 자녀들에게 말합니다. 자녀들이 가져야할 덕목(德目)은 ‘순종’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옳으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순종하다’로 번역한 ‘후파코우오(ὑπακούω)’라는 단어는 ‘순종하다’는 뜻도 있지만 ‘듣다’ ‘경청하다’의 뜻이기도 합니다. 이 단어는 주인이 하명을 하면 종은 주인의 이야기를 잘 듣고 그대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자녀는 해야 할 순종은 먼저 부모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잘 듣고 그 다음 그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게 ‘순종’의 참 의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가르칩니다. 사실 ‘주 안에서’라는 표현은 너무나 포괄적이고 광범위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무엇이다’라고 말하기는 애매합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 나타난 문장의 맥락 속에서 파악한다면 ‘주님께서 이루신 새 언약의 원리 안에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은 억지나 강요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한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늘 아버지께 완전히 순종하심을 통해 인류를 위한 구속을 이루신 것입니다.

 

바울은 부모를 향한 자녀의 자세가 순종으로 끝나지 않고 좀더 적극적인 공경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2절과 3절을 보십시오.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바울이 말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말하면서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한 것은 분명히 십계명에서 5번째 계명인 부모 공경에 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출]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그런데 이상합니다. 아무리 봐도 최소한 3번째 이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네 번째 계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첫 번째 계명이라고 말했을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 대개 1-4계명까지는 사람이 하나님께 지켜야할 수직적 계명이고, 5계명부터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할 첫 번째 계명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어니스트 베스트라는 학자는 ‘첫(πρώτη)’이라는 단어에 주목합니다. 그는 ‘첫’이라는 단어는 ‘중요함’을 말하며, 다른 계명보다 탁월한 계명이란 뜻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에 대해 대부분의 학자들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어떤 학자는 ‘약속이 있는’이란 표현에 주목합니다. 십계명에서 ‘약속이 있는 계명’은 오직 다섯 번째 계명뿐입니다. 다른 계명은 지킨다고 해서 상이나 복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다만 명령할 뿐입니다. 그런데 부모 공경의 계명은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한다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이 더 정확한 의도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레위기 19:3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하고,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레위기 19:3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이 본문은 사람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안식일을 지키는 것,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로 묶여 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종종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부모를 섬기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바로 ‘고르반’이란 단어 속에 담겨진 내용입니다.

 

[마가복음 7:11-13] 11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13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부모를 섬기는 것이 다르지 않았고, 하셨고 부모를 잘 섬긴다면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주변에서 이런 사람들을 봅니다. 종교적 열심에 사로잡혀 가정을 돌보지 않거나, 부모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의 모습도, 헌신도 아닙니다. 먼저 부모를 공경하고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잘 섬기는 이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4절의 말씀은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뜻은 비인격적으로 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녀들도 한 인격체이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이들입니다.

 

“하지만 이 본문은 아비들이 자녀를 대할 때, 특히 자녀를 훈계할 때 민감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반응하기 전에 자신의 말과 행동이 지닌 잠재적 영향력을 주의 깊게 비교하고 고찰해야 한다. 이 본문은 반사적으로 벌컥 화를 내는 것, 지나치게 심한 말이나 모욕, 비꼬는 말, 잔소리, 비하하는 말, 부적절한 괴롭힘, 불합리한 요구 등 화를 돋굴 만한 다른 모든 것을 사실상 배제 한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골 3:21)고 아비들에게 권면한다.”

 

ㄴ. 종과 주인(5-9)

 

우리는 본문을 읽을 때 바울이 노예제도를 찬성했으니 하지 않았느니의 관점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자신의 자리에서 해야할 일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노예들은 조선시대의 노비처럼 공부도 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인간들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 노예들은 전쟁의 포로나 적당한 기회에 학습의 기회를 얻기도 해서 주인보다 더 많은 학력을 소지하고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이들이 많았습니다. 노예들이 종종 자유롭게 되어 적지 않은 부와 권력을 획득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노예는 노예였고, 주인의 소유에 불과하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바울은 5절 종들에게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순종하듯 하라’고 조언합니다. 이 조언은 일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된 종들에게 주는 조언입니다. 반대로 해석한다면 종들은 주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성실하지 않았으며, 육체의 종들을 존중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이 부분에서 믿음의 도를 가진 종들이 세속 권력자들인 주인을 하찮케 여기고 가볍게 여기를 이들이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매우 부당한 것으로 영적인 것을 소유하고 경험했다하여 세속적인 사람이나 주인들에게 무례한 것은 옳지 않은 태도입니다. 그리스도를 존중하고 사랑하듯 세속 주인들에게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6절을 볼 때, 그들은 ‘눈가림’만하고 제대로 일하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주인이 보기에 그들은 바르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하면서 게으른 것은 부당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비(對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뜻을 행’하라고 말합니다. 종들이 주인에게 해야 하는 태도는 자녀가 부모에게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종들은 주인에게 진정한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하듯해야 합니다.(7절) 이것이 비인격적으로 대하는 주인들에 대한 바른 태도이며, 악을 선으로 갚는 그리스도인의 복수의 방법입니다.

 

오히려 종들은 그들의 상전들을 섬기면서 이를 그리스도를 섬기는 기회로 생각하고, 또한 그들의 하는 일을 마치 그들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기회로 생각하고, 또한 그들이 하는 일을 마치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하고 있는 것처럼 수행해야 한다.

 

바울은 8절에서 우리가 행한 것에 대해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확실히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함으로 얻는 ‘약속’처럼, 종 역시 그들에게 적합한 하나님의 보상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2. 10-20절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0-20절까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 이유와 전신갑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 이유는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6:11)입니다. 여기서 간계는 에베소서 4:14에서 사용된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이라고 말할 때 ‘간사한’이란 단어와 동일합니다. 마귀가 성도들을 거짓말로 속여 넘어뜨리는 것을 이기기 위해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간계라는 단어가 보여주듯 사단은 자신의 목적을 결정적인 순간까지 드러내지 않습니다. 고린도교회를 교회를 향한 바울의 권고를 들어봅시다.

 

고린도후서 11:14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사단의 목적은 속이고 빼앗고 죽이기 위함입니다. 사단의 목적을 안다면 아무도 그에게 접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속이는 것이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간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전십 갑주는 무엇입니까? 구약에서 하나님은 종종 강한 용사로 등장하십니다. 적들과 싸우기 위해 갑옷을 입으시고 전쟁에 임하십니다. 특히 이사야의 내용은 이것을 보여줍니다.(사 11:5, 52:7, 59:17) 이러한 구약의 배경들은 궁극적으로 선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헌신과 사랑, 또는 열정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14절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허리띠는 옷을 거추장스럽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전쟁에 합당한 옷차림을 말합니다.

 

사 11: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이사야의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는다는 표현은 명백한 옳음을 통해 누군가의 비방이나 조롱에 휘둘리지 않음을 이야기합니다. 흠 잡을 데 없는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진리의 허리띠를 띤다는 말은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로 강해지고 진리를 따라 살 것을 결심하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의 호심경(사 59:17)은 갑옷에서 가슴 부분을 막는 철판 또는 갑옷을 이야기 합니다. 적들의 화살이나 칼 등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신체는 상처가 나거나 잘려도 죽지 않습니다. 물론 목이 잘리면 죽겠지만, 그러나 가슴은 한 번 찔리면 살아남기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치명적 손상을 입습니다. 의,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십자가의 의를 말합니다. 즉 복음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클라인 스노드글래스는 의의 호심경을 입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행동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15절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이것은 복음이 가진 속성을 말합니다. 바울은 그냥 복음이라하지 않고 ‘평안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평안은 복음으로 인해 생긴 하나님과 화목을 통해 오는 진정한 샬롬, 즉 평안을 말합니다. 단순한 심리적 평안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으로 충만하다면 우리는 하늘의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는 앞으로 도래할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사 52: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그런데 이것이 ‘신’입니다. 신은 움직이기 위한 것입니다. 당시 신은 자유민만 신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만약 그것을 의도했다면 복음을 통해 오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얽매이지 않고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을 말합니다.

 

16절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방패는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믿음의 방패’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적의 공격을 처음부터 차단하는 막강한 힘을 가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사용한 방패(θυρεός)는 로마 보병들이 사용한 가슴까지 오는 큰 방패를 뜻합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모든 공로를 신자들의 것으로 만듭니다. 궁극적으로 믿음으로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숨게 됩니다. 믿음의 방패를 갖는다는 말은 결국 그리스도를 방패삼아 사단을 대적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불화살은 의심과 두려움이며, 신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의심하게하고, 아무도 자신을 위해 돕는 자가 없다고 믿게 하여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방패가 주는 교훈은 이 전쟁의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것이며, 주님을 위한 것임을 말합니다. 아래의 구절들은 믿음으로 살았던 이들의 고백이며 증언들입니다.

 

삼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대하 20:15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시편 24: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믿음의 방패라는 뜻은 결국 그리스도를 방패 삼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는 네 방패다’(창 15:1)라고 소개하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여 여호와가 너희의 방패라고 소개합니다.(신명기 33:29) 믿음의 사람 다윗은 하나님을 방패로 고백합니다.(시편 28:7) 구약의 선진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방패삼아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이처럼 새 언약의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방패삼아 어둠의 영들과 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17절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투구는 머리를 보호합니다. 그런데 왜 구원의 투구라고 했을까요? 구원은 종말에 일어날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과 직결됩니다. 구원의 투구는 구원에 대한 소망으로 바꾸어 부를 수 있습니다. 이사야 59:17을 보면...

 

사 59:17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이사야는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구원이 미래에 도래할 어떤 사건이 아니라 이미 승리하셨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은 종말론적인 동시에 현재적입니다. 이미 승리했고, 또한 마지막에 확실히 승리할 것입니다. 머리가 몸의 대표, 또는 명예를 상징하듯 머리에 쓰는 구원의 투구는 성도들이 그리스도로 인해 회복할 영광의 모습을 말합니다.

 

성경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는 영적인 전신갑주의 유일한 무기입니다. 이곳에서 사용된 검은 고대 세계에서 약 1m가 되는 장검을 이야기합니다. 말씀은 로고스가 아니라 ‘레마(ῥῆμα)’입니다. 클라인 스노드글래스는 ‘보통 가르침이나 예언적인 말씀, 또는 더 구체적으로는 복음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성령에 의해 주도되는 말씀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주관하여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합니다. 교묘한 술수와 궤계(詭計)를 성령께서 성도의 입술을 주관하심으로 승리하게 하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떠나면 성령이 오셔서 가르친 것들을 생각나게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히브리서 기자는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위로합니다.

 

[히브리서 4:12-13]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만물의 속성과 본성을 통찰하며, 은밀한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말씀 앞에 그 어떤 것도 감추어진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날은 밤이 아닌 낮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질 때 악한 사단의 궤계를 깨칠 수 있는 것입니다.

 

21-24절 마지막 인사

 

바울은 에베소서를 마치면서 두기고를 소개합니다. 두기고를 통해 자신의 소식을 전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진실한 일꾼이며(21절), 바울 일행의 사정을 교회에 알리는 메신저 역할을 합니다. 그로 인해 성도들을 위로하려는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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