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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역사와 만나다 / 야로슬라프 펠리칸 / 민경찬․손승우 옮김 / 비아

샤마임 2020. 1. 27.

예수, 역사와 만나다

야로슬라프 펠리칸 / 민경찬․손승우 옮김 / 비아

(Jaroslav Jan Pelikan, 1923년 12월 17일 - 2006년 5월 13일)

 

“경이롭다!” 만약 이 책을 직접 읽었다면 필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것이다. 적극적으로동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충분히 공감할 수도 있다고 확신한다. 특히 교부 문헌에 조금이라도 발을 디뎌본 이들이라면 말이다. 이 책은 역사 속에서 교회가 어떻게 예수를 보고, 해석했는가를 조명하는 책이다. 초대교회에서 시작된 그의 탐색은 중세 초기와 중세의 중심, 인문주의자들의 관점과 종교개혁가들의 견해를 딛고 계몽주의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두루 이어진다. 한 부분도 놓치고 싶지 않지만 초대교회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전화시기의 관점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읽어 내려갔다. 역사의 전화기에 예수는 새롭게 해석되었고, 새롭게 해석된 예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다시 정립되기를 반복된다. 특히 루터에 의해 촉발된 예수 다시 읽기는 중세교회가 오독한 교회를 바로 잡으려는 시도였다. 결국 교회의 역사는 ‘예수 다시 읽기’이다. 초대교회와 중세교회가 그린 예수상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초대교회가 그린 예수

 

인류는 예수를 어떻게 바라보았던가. 아마도 그 시작은 당연히 갈릴리와 팔레스타인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저자는 먼저 네 복음서 속에 그려진 예수상을 찾아 나선다. 개신교인들은 종종 예수가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아람어를 상요했으며, 히브리어는 예배때와 학문적 연구를 위해서만 사용했다. 예수는 랍비로 불렸으며, 당대 랍비로 불렸던 이들과 상당 부분은 사상과 삶을 공유하는 동시에 독특한 면도 존재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를 랍비이면서 예언자로 규정한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를 예언자로 규정함으로써 그가 이스라엘 예언자들과 이어져 있으면서도 동시에 저 예언자들이 오리라고 예견했던 예언자, 그들이 굴복하기를 기다리던 권위 있는 이로서 그들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이야기했다.”(53쪽)

 

랍비와 예언자로 만족할 수 없다. 복음서 기자들을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라는 범주로 대체’(55쪽)해 간다. 호칭의 변화는 언어의 변화이며, 인식의 변화이다. 당연히 그레고리 딕스가 말한 ‘그리스도교의 탈유대교화’(56쪽)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저자는 사도행전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로마’(행 28:14)로 옮겨가고 있음에 주목한다. 랍비에서 ‘그리스도’로 옮겨가듯 말이다. 샤갈이 그렀듯 예수는 ‘이스라엘에 속한 인물이다. 동시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 속해 있기에, 그리고 온 세계에 속한 인물’(63쪽)로 그려진다. 예수는 역사의 ‘경첩’(74쪽)으로서 새로운 변혁적 관점을 제공한다. 구약의 하나님은 예수로 대체되었고, ‘하나님께서 가라사대’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고 대체된다. 후기에 기록된 문헌인 복음서들과 묵시록은 명백하게 예수의 하나님되심을 설명하지 않고 선포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3세기와 4세기로 넘어가면서 교회는 이방 문학 속에서 메시아의 흔적을 찾아냈고, 그것을 예수에게 적용했다는 점이다. 예를들어 그리스-로마 시대의 여성 예언자인 쿠마에의 시빌레의 신탁을 예수에게 적용한 것들이다. 저자는 기독교인들이 시벨레의 신탁을 인용한 것을 두고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이해서’(99쪽)라고 강조한다. 결국 보편화된 기독교는 이방세계 속에서 접촉점을 찾아 예수가 유대인이 아닌 모든 인류의 주이심을 선포한다. 클레멘스 등의 교부들은 철학과 이교 사상의 융합을 통해 예수는 만물의 창조자요 ‘태초의 혼돈에서 질서와 이치를 만들어’(111쪽) 낸 로고스이며 데미우르고스이다. 이제 다음 이야기는 ‘예수는 만왕의 왕’(125쪽)으로 그려진다. 그렇다면 크리스텐덤의 시대가 도래하기는 시간 문제다.

 

 

중세교회가 그린 예수

 

교회사는 교리사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4세기에 기독교 교리는 대부분 완성된다. 현대 대부분의 교회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과 다르지 않다. 4세기 이후 기독교 국가가 된 후 교리를 급속도록 화석화되고 형이상학적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예수를 새롭게 해설할 필요를 느낀다. 저자는 중세의 승리의 신학을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에서 찾는다. 속죄와 부활을 통해 중세는 ‘승리자 그리스도’(250쪽)로 그린다. ‘십자가는 인간의 계획이 어떻게 훼방하든 하나님의 뜻과 길이 승리를 거둠으로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257쪽)로 채택되었고, 지혜로서의 십자가는 악의 세력을 이긴다는 희망을 들려주었다.

 

안셀무스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주장한 대속이론은 하나님의 딜레마를 해소하는 ‘십자가의 지혜’(262쪽)를 전면에 내세운다. 문제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경이 아닌 이성을 사용했다는 것이며, 그로 인해 앞으로 전개될 이성 우위의 신학의 포문을 활짝 열게 된다. 물론 안셀무스 전부터 수도사와 수도원은 존재했다. 그러나 안셀무스 이후 중세는 세상 권력 위에 교회를 두었고, 세상을 거부하는 동시에 정복하려는 수도사라는 두 극단이 씨실과 날실이 되어 엮어진다. 저자는 ‘세상을 다스리는 수도사’에서 이렇게 역설한다.

 

“네 편의 복음서가 그린 예수의 모습은 수도 생활의 근본적인 원리에 부합했다. 그는 세상을 거부함으로 영원한 나라를 세웠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 또한 세상을 거부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름으로써 자신의 나라를 나누어 가지라고 요청했다.”(268쪽)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결국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을 다시 정복하는 수단’(284쪽)으로 전락하고 만다. 세상을 버림을 다시 세상을 정복한다. 하지만 그들의 정복은 철저히 세속적인 정복이었다. 개인은 가난하나 수도원은 지극히 부유하고 탐욕스러웠다. 결국 이러한 수도원의 이중성은 프란체스코 같은 수도사들로 하여금 가난과 결혼하여 삶으로 가난한 그리스도를 그려내려 했던 이들을 만들어 낸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에의해 이론과 교리에 파묻혀 삶을 내팽개친 중세 교회에 ‘역사적 예수의 권위로 돌아갈 것을 호소’(375쪽)하기에 이른다.

 

나가면서

 

새로운 포도주는 새부대가 필요하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예수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시간의 흐름 속에 예수에 대한 이해는 퇴색되고 변질된다. 새해석은 엄밀하게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예수가 보인 원의를 되찾는 것이다. 혁명은 전통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무엇을 창출하는 작업이 아니다. 상실한 원래의 의도를 되찾는 것이다. 역사의 시대마다 교회는 예수를 새롭게 해석해 왔다. 예수에 대한 다른 이해는 그 시대의 얼굴과 같다. 조밀하고 대담한 저자의 필체는 초대교회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예수의 상을 한 눈에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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