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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강해] 6. 우리의 죄를 사하소서

샤마임 2019.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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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강해] 6. 우리의 죄를 사하소서

마태복음 6:9-12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는 동시에 산상수훈이 갖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항상 주기도문을 암송할 때, 하나님의 나라 즉 교회론의 관점에서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주기도문 중에서 가장 까다롭고 난해지만 실제적인 부분인 죄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 읽기를 시도할 것입니다.

 

주님은 네 번째 간구의 제목으로 죄 용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주의하여 보면 약간 의합니다.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저는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12절은 마치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었으니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라는 협박성 간구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실제로 그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죄에 빠진 인류

 

이 본문의 전제는 모든 인류가 죄에 빠진 존재, 즉 죄인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용서 받아야할 존재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3:23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것이 우리 인류의 특징입니다. 죄가 무엇이고, 어떠한 특징이 있는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죄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 안에 거짓이 있고, 탐욕이 있고, 분노와 시기와 음란이 상존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저주 가운데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창세기로 돌아가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아담은 이렇게 말합니다.

 

2: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곳에서 나타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표현은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히브리어로 최상급 표현으로 당신은 나에게 최고의 존재입니다라는 뜻과 언약적 의미에서 내가 당신을 나의 목숨을 다해 사랑하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모든 율법을 요약한 하나는 우리의 목숨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마태복음 22:37-40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여기서 주의하여 볼 것은 바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진정한 이웃 사랑은 자기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헛되게 사용하고, 자신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사용하고, 자신의 몸을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사람은 절대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럼 자기 사랑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목적대로 자신을 사용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기사랑입니다. 타인을 대할 때 무례하고, 비하하는 사람들은 그 자신의 내면이 공허하고, 자신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진정한 사랑으로 가득 차있는 사람들은 그 사랑으로 타인을 대하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볼 때 객관적으로 사실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있는 그것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누군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화제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자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 그들의 대화가 어떻게 변했습니까?

 

창세기 3: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던 하와에게 이제는 자신을 타락하게 한 주범이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비겁하고 교활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말은 타인에 대한 평가나 비평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말을 할 때 누군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타락했고,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떠나있습니다. 죄에 대한 더 많은 증거를 찾으려면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하지 못할 것입니다.

 

2. 용서의 조건

 

이제 두 번째 이야기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모든 인류가 죄인이며, 죄를 용서 받아야할 대상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나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혹시 번역이 잘못되었는가 싶어 헬라어 원문을 찾아 봤습니다.

NA28 Ma 6:12

καὶ ἄφες μν τὰ ὀφειλματα μν,

ς καὶ ἡμες φκαμεν τος φειλταις μν·

 

역시나 가 아닌 복수형인 우리였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처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나오는 우리를 어떤 의도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저는 우리는 로 구체화 시켜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해석상 를 전제하고 해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라는 표현은 공식적인 호칭이며,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민족성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죄 지은 자는 이방인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로마인들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로마인들은 이스라엘을 착취하고, 탈취하고, 폭정을 휘두릅니다.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안겨주는 대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를 이스라엘의 독립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용서의 대상이 로마이든 한 개인이든 상관없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자들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제 이 부분은 조금만 더 확장해 해석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용서가 무엇인지 마태복음 안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먼저 5:20로 가보겠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너의 의서기관과 바리새인과 비교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이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웃을 오직 유대인으로 한정하고 있으며, 미천한 어느 정도 신분이 있는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이웃은 모든 유대인을 포함하여, 모든 족속과 민족을 통틀어 이야기합니다. 5:21-32까지의 내용도 이웃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져야할 것인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이웃을 욕하거나 비방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음란한 마음도 죄가 됩니다. 5:38-48까지의 내용을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그곳에서도 역시 다른 사람, 즉 이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5:43-48을 유의해 봅시다.

 

마태복음 5:43-48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에 나타난 용서의 개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사회적 개념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그 모든 사람을 용서할 때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절의 사하여 준 것 같이는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을 시제에 맞게 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이미 용서해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가 됩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죄 지은 자들이 로마라는 것을 압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원수들을 말합니다. 이방인들을 개 취급하고 인간으로 보지 않았던 유대인들에게 로마인들과 원수들까지 모두 용서했다는 말은 유대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기도문 속에 나타난 이웃의 개념이 기존의 유대인들이 갖는 이웃의 개념을 훨씬 뛰어 넘었으며, 모든 인류로 확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무엇 때문에 유대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용서를 하라고 사시는 걸까요? 이곳에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12절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상상해 봅시다. 왕좌에 하나님이 앉아 계십니다. 그런데 죄인이 그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원하는 대는 나는 모든 사람을 용서했습니다. 이제 당신이 저의 죄를 용서해줄 차례입니다. 당신의 약속을 지키십시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 18:21-35에 나타난 요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로 알려진 이 비유는 형제 용서에 대한 것입니다. 이 비유의 내용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왕이 용서해 달라고 해서 용서해 주었는데, 용서 받은 종이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빌려간 동료를 용서하지 않고 다 갚을 때까지 옥에 넣는 이야기입니다. 왕은 다시 그 종을 불러 내가 너를 용서해 주었는데 너는 왜 네 동요를 용서해 주지 않으냐며 그를 감옥에 넣어 버립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18:33입니다.

 

마태복음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마태는 주기도문 속의 를 일반적인 하마르티아라는 단어가 아니라 이라는 단어인 오페이레마(ὀφείλημα’)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18장의 비유와 내용을 병치(竝置)시키고 있습니다. 그 비유를 마무리 하면서 18:35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을 주기도문 후반부에 나오는 6:14-15말씀과 비교해 봅시다. 내용이 정확하게 동일합니다.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태복음 6:14-15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는 긍휼에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 속에 나타난 용서의 의미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타인에 대해 긍휼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긍휼은 어떻게 올까요? 그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라는 사실에서 옵니다. 그 사실을 망각하면 우리는 어느 누구도 긍휼히 여기지 못합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를 지었고,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받았는지 알 때 다른 사람을 긍휼해 여기는 마음이 생깁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살인죄를 지어 사형을 당해야 하는데 극적으로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런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서 100만원을 빼앗아 갔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를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생명과 100만원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하나님에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의미보다 더 넓고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버지의 긍휼히 여김을 알고,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이 안에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넓이와 깊이를 알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결단이 담겨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일곱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그곳에서 5-6번째 비유는 밭에 감추인 보화와 진주 장사의 비유입니다. 두 비유는 동일한 내용으로 모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사고, 진주를 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44-46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그러므로 주기도문 속에 나오는 용서에 대한 기도는 엄밀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들이 얼마나 사랑하고,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 묻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모욕과 비판을 감수하고,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너희는 갈망하느냐? 주님께서 묻고 계십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세상의 모든 이익을 포기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돌보시고 채워주실 것을 믿느냐? 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3. 용서의 모범

 

우리는 이 용서의 모범이 예수님이신 것을 잘압니다. 하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천하디 천한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하나님이시면서 가난한 여인의 아들로 태어나셨고, 친히 자신의 생명을 연약한 한 남자의 손에 맡겼습니다. 윫법 아래 태어나셨고, 부모에게 순종했으며, 친히 멸시와 천대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들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세상의 고통을 끌어안고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마태복음 8:16-17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그러나 비바람과 폭풍이 몰아칠 때, 지진으로 건물이 무너져 내릴 때 자신이 몸이 부서지기까지 아이를 가슴에 품은 엄마의 마음처럼, 주님께서는 자신의 분노로 연약한 영혼들에게 평안을 주시고 자신은 십자가 앞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기다리는 그곳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셨다. 연약한 영혼을 지켜주시고, 그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셨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그 진노의 처소로 담대히 나아가셨다. [긍휼, 예수님의 심장] (하재성)

 

마태는 이 구절 뒤에 곧바로 우리에게 제자를 향하여 나를 따르라고 선언하십니다. 교회는 어떤 곳입니다. 누군가를 정죄하고 비판하고 상처 입히는 곳이 아닙니다. 사랑하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서로의 짐을 떠 안아 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용서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 긍휼히 여기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사람보다 내가 하나님 앞에 너무나 큰 죄인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히브리서 12:1-2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곳에서 예수를 본다는 말은 예수를 따른다를 말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심장을 가지고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행하신 삶을 나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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