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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 심령이 가난한 자 (마태복음 5:3)

샤마임 2019. 7. 8.

[팔복] 심령이 가난한 자 (마태복음 5:3)

[개역개정]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표준새번역]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공동번역]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NA28] Μακάριοι οἱ πτωχοὶ τῷ πνεύματι, ὅτι αὐτῶν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


복이 있도다(Μακάριοι)

마태가 제시하는 복은 기존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선언문과 같다. 마태복음 13장에서 마태는 세상의 가치관과 천국의 가치관이 어떻게 다른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앞으로 전개될 복은 철저히 영적이며, 기독론적이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복은 『팔복 서론』을 참고 바람]

마음(τῷ πνεύματι)

심령 또는 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τῷ πνεύματι,'인데 대부분 성령, 영으로 번역된 단어이다. 왜 마음으로 번역했는지 의아한 단어이다. 차라리 '영혼'으로 번역되면 더 좋을 단어이다. 그런면에서 마음이 아닌 '심령'으로 번역한 한글성경이 원어에 가깝다 하겠다. 그러나 영혼이란 단어는 우리나라 정서상 상당히 모호한 단어이다. 아마도 이러한 모호함을 제거하기 위해 의역하여 '마음'으로 번역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안타깝게도 바클레이는 '마음(πνεῦμα)'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곧장 '가난함'에 집중한다. 도날드 헤그너는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주해한다. 

첫번째 '복'의 주어인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문구는 문자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마태(또는 그 이전의 전승)는 '심령이'라는 문구를 첨가함으로써 누가복음(또는 원래의) 약식을 정신적인 의미로 전환시킨 것이 결코 아니다. 그 역시 문자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말하고 있지만, 단지 그들의 심리적인 상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마음조차도 가난하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으로도 가난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이스라엘-트히 포로기 이후의-에서는 가난과 경건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이 의지할 데라고는 하나님께 대한 자신들의 믿음밖에 없었다."[도날드 헤그나 <WBC 마태복음 213>]


헤그너는 마음의 상태라는 의미에 초점을 두었다. 이 역시 '심령'이란 단어에 그다지 많은 관심은 없어 보인다. 사실 프뉴마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383번이 사용된 광범위한 단어인 것은 분명하다. 대체로 성령을 뜻하지만 바람, 사람의 양심, 마음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포괄적 단어이다. 중요한 것은 육신은 아니다. 육신을 통제하거나 주도하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마음의 작용에 가깝다. 여기서는 타락한 욕망을 따라 움직이는 세속적 마음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고 육신을 주도하는 통제력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넘어가자.

 
가난한(οἱ πτωχοὶ)

πτωχός는 형용사이다. 명사로 사용될 경우 거지를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의미나 해석상의 모호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지의 상태, 적빈과 빈곤을 뜻한다. 이 단어는 종종 배가 고파 거지가 몸을 구부리는 모습을 표현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비유적으로 '구부러진'의 뜻이며, 실재론적으로 '심하게 궁핍하고 자원(먹을 것)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철저히 무능하고, 무력하고, 축소된 상태이다. 명사로 사용될 경우 농민보다 더욱 빈곤한 사람이며, 부자와 정반대의 사람, 즉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 가난한 자를 뜻한다. 영어 성경은 대부분 가난한 상태(poor), 가난한 사람(poor man), 쓸모없는 존재(worthless)로 번역했다.

이러한 문자적 맥락에서 '가난한'을 이해한다면 오늘 하루도 겨우 먹고 살기 힘든 가난함을 뜻한다. 당시 1세기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 일하고 하루 먹고 살아가는 존재들었다. 그들은 죽도록 일을 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극빈자들이었다. 마태는 이 단언을 사용함으로 주님 앞에 살아가는 제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한다. 하루하루 주님께서 은혜로 채워주지 않으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 제자들이다. 제자는 철저히 하나님 의존적 신앙을 가져야하며, 자신의 힘과 지혜가 아닌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연명하는 자들이다. 바클레이는 '가난하다'의 의미를 역사적으로 풀어내는 통찰력을 발휘한다. 

"처음 이 낱말은 단순히 가난하다는 의미였고, 그 다음은 가난하기 때문에 영향력이나 권력이나 도움이나 특권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람을 말했다."[바클레이 <바클레이 마태복음> 117]

왜냐하면(ὅτι)

선언에 대한 추가 설명이다. 팔복 전체에서 반복된다. 이 구절은 '왜냐하면'의 의미로 받을 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로 해석 가능하다. 즉 '심령이 가는한 자는 복이 있는데, 그 이유를 그 가난함 때문에 천국이 너희의 것이 되었다'로 해석할 수 있다.

천국이 저희 것입니다.(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

문법적으로 '천국이 이미 너희의 소유다'는 뜻이다. 현재형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ἐστιν(동사, 현재, 직설법, 능동태, 3인칭, 단수)

ἐστιν은 현재 그들 안에 천국이 '있다'의 뜻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이미 그들 안에 천국이 있다. 천국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들어가거나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소망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화된 미래이다. 베드로는 이것을 '산 소망' 이라고 표현한다. 그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천국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다.

천국(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은 '하늘의 나라'인데, 왕이 다스리는 왕국(Kingdom)이다. 마태복음 안에서 천국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며, 복이 임하는 곳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제자들 안에 있기 때문에 심령히 '가난'하다 할지라도 그들은 부유한 자들이다. 산상수훈은 역설로 시작하여 역설로 마무리 된다. 기존의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가치관으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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