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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1. 1:1-10 인사와 감사

샤마임 2019. 6. 30.

데살로니가전서 1. 1:1-10 인사와 감사

ΠΡΟΣ ΘΕΣΣΑΛΟΝΙΚΕΙΣ Αʹ

 


[본문]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묵상]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세 사람이 함께 인사합니다. 이들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설립되기 위해 헌신의 힘을 쏟았던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는 스데반의 죽음에 가표를 던지고, 죽음을 마땅히 여긴 살인자와 같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옥에 가두며 잡아 들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변화되었습니다. 죽이는 자에서 살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복음의 힘입니다.

 

실라(또는 실바누스)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칭송받는 지도자였습니다.(15:32) 그는 선지자로 불릴만큼 뜨겁게 주의 말씀을 전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기꺼이 자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바울과 함께 머나먼 이국의 땅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바울과 함께 빌립보 감옥에 들어갔고 죽음의 순간들도 넘겼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에 가서 교회를 세웠습니다.(17:1-9)

 

디모데는 엄마는 유대이었지만 아버지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는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들었고, 개종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사역자로 헌신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친 자식처럼 디모데를 아꼈습니다. 얼마나 사랑했던지 디모데에게 두 편의 편지를 목회의 방법을 사적으로 전하는 편지도 보냈습니다. 전해진 바로는 디모데는 심성이 유약하고 건강도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바울과 동행했고, 복음을 위해 고난을 감수했습니다.

 

세 사람,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들이며, 귀한 동역자들입니다. 이들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복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에 이들처럼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복음을 위해 기꺼아 헌신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고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이들이 함께 데살로니가 교회에 문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

 

어떤 교회가 가장 아름다울까요? 화려한 건물, 많은 성도, 높은 지위와 부를 소유한 성도가 있는 교회일까요? 아닙니다. 진정한 교회는 진리 안에 있는 교회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 아버지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한 관사 (ἐν)’에 묶여 있습니다.

(ἐν ΘεΠατρκαΚυρίῳ ἸησοΧριστῷ)

 

바울의 선언 속에는 상상치 못한 기쁨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폭동으로 인해 데살로니가를 급히 빠져 나와야 했고, 뵈레아에서도 유대인들이 난봉꾼들을 끌고 와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다시 아덴으로, 다시 고린도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 급하게 일어난 일이나 교회를 안정시키지도 못했고, 제대로 된 교육도 없었습니다. 바울은 내내 데살로니가 교회를 걱정했습니다. 유대인들의 핍박과 더불어, 신앙 훈련도 없이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할지 장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디모데를 통해 확인된 바로는 그들은 그 어떤 교회보다 가장 아름답고 헌신적인 모습으로 타의 모범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강림(파루시아)을 고대하며 종말론적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은 기꺼이 그들이 성부와 성자 안에있다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안에 있는 증거들이 있나요? 상황의 한계를 뛰어넘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모습은 평안한 가운데 안일한 삶을 살아가는 저희들을 부끄럽게 합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χάρις μν καερήνη)

 

은혜(χάρις)선물이란 뜻이니다. 종종 은사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의역을 하자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좋은 것들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많은 인사에서 은혜평강을 묶어 사용합니다. ‘평강(ερήνη)’은 구약의 샬롬을 번역한 것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진정한 평화를 의미합니다. 은혜와 평강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구절을 통해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과 평강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축복 속에는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긍휼히 여겨달라는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믿음이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 소망의 인내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잊지 않았습니다. 기억하고 기도했습니다. 목회자들은 반드시 고통당하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목회자의 존재 이유는 성도를 위해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사명입니다. 그 양들은 (베드로)의 양이 아니라 (예수) 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바울의 감사의 기도 속에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세 가지 특별함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의 역사이고, 두 번째는 사랑의 수고이며,, 세 번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입니다. 앞으로 더 자세히 설명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소망의 인내는 강림할 예수님에 대한 소망적 삶을 말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강조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세 가지는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믿음의 역사(ργου τς πίστεως)는 믿음으로 통해 드러난 삶의 행위들을 말합니다. 역사(ἔργον)라는 헬라어 단어는 일하다’ ‘사업하다등의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지만, 뭔가를 행동으로 드러난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믿음이 지성에만 머물지 않고 삶으로 드러난 것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사랑의 수고(κόπου τς γάπης)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수고(헌신)을 통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사랑을 종종 감정이나 현학적 문학적 서술로만 이해한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거칠고, 투박하고, 힘들고, 고통을 수반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일해야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더러운 것도 만져야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죄인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보십시오. 저기 저 십자가를 보십시오. 아프고, 외롭고, 고통스럽습니다. 사랑은 향기롭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악취를 껴안고 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τς πομονς τς λπίδος τοΚυρίου μν ησοΧριστο)도 동일한 의미입니다. 소망(엘피스, λπίς)은 신뢰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간절함이며, 마음의 기반과 같습니다. 주 예수만이 유일한 소망의 대상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인내(ὑπομονή)’가 있다고 말합니다. 인내로 번역된 휘포모네아래라는 뜻의 휘포(πο)’참다’ ‘기다리다의 뜻인와 메노(μένω)’라는 두 단어가 합성된 것입니다. 대체로 이 단어는 바울 서신 안에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누가는 씨앗이 싹을 내기 위한 인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8:15) 누가가 인용한 주님의 인내로 결실하다는 뜻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인내하며 거룩한 삶을 통해 영생의 싹을 틔우는 것으로 은유 되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이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가진 믿음에 대해 설명해 줍니다.

 

결국, ‘역사’ ‘수고’ ‘인내는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서 적극적으로 삶으로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해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이 칭찬하셨던 에베소 교회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2:2) 안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삶의 열매를 통해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 받은 영적 이스라엘임을 선언합니다.(5) 바울은 아브라함이 갖는 상징성을 매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도, 로마서에서도 아브라함을 통해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변증합니다.

 

-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

(λόγος - ἐν δυνάμει καὶ ἐν Πνεύματι γίκαπληροφορίᾳ)

 

우리는 여기서 말로만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었다는 말에 주목해 봅시다. (로고스,λόγος)능력(뒤나미스, δύναμις)과 성령(프뉴마, πνεμα)과 큰 확신(플레로포리아, πληροφορία)’과 반대되는 입장입니다. 바울은 복음(εαγγέλιον)’이 단순한 지성적 작용이 아니라 반드시 몸과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복음을 믿는다하면서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복음, 가짜 복음인 것입니다. 복음이 정확하게 어디서 왔는지 밝히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칠십인역(LXX)에 의하면 이사야 40:9, 52:77 등에서 동족 동사인 유앙겔레제스다이(εαγγελσασθαι)’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회복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적 의미와 곁들여 해석한다면 복음은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오듯 죄인들이 죄에서 해방 받고, 구원 받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실제적 회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서류상의 사면이 아니라 감옥에서 걸어 나와 자유인으로서 활동하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말한 의도는 바로 이런한 의도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 증거로 바울 일행이 보였던 삶,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환난 가운데의 기쁨과 주를 본받는 삶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5절에서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바울 일행이 복음적 삶을 살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6절에서 다시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라는 표현은 이것을 확인시켜 줍니다. 즉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삶을 통해 분명히 자신들이 그리스도인 것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우리와 주를 본받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본받다라는 말을 그대로 따라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특징은 바로 모방에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모방은 무의미한 모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사과 씨가 발화하여 다시 사과나무가 되고 사과를 맺듯,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그리스도의 삶을 몸으로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본받자 주변의 교회들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닮아가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있던 마케도냐 지방뿐아니라 아가야 지방까지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문이 번져갔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데살로니가 성도들처럼 주님을 닮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들이 각처흘려보낸 소문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9절 상)

.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9절 하)

.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10)

 

여기서 모호한 부분은 .입니다. F.F Bruce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바울의 일행을 환영하고 메시지를 환영한 것으로 이야기 합니다. 과연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 일행을 뜨겁게 환영했고, 그들이 복음을 마음과 삶으로 받아 살아내고 있습니다. 복음을 받고도 뜨겁지도 차가집도 않았던 라오디게아 교회 같은 성도와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는 힘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을 생각해 봅시다. 데살로니가는 아덴과 고린도가 지척이며, 수많은 신화가 살아 숨쉬고 우상이 신전들이 즐비한 곳입니다. 서론에서 언급한 델피(델포이, Δελφοί)에는 신탁으로 유명한 아폴로 신전(The temple of Apollo)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께 돌아섰습니다. 모든 것이 변한 것입니다.

 

.마지막 그들이 행한 위대한 선택은 그의 아들이었습니다. 바울이 걱정했던 부분이기도 했던 바른 신앙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희미했지만 참된 진리를 붙잡았습니다. 바울은 짧은 시간 동안 성경을 풀어줄 시간이 없는 상태에서 데살로니가에서 피해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과연 바른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 걱정했습니다.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참 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적 눈을 가진 자들은 거짓된 것들에 속지 않았습니다. 우상의 화려함 속에서 죽음을 보았고, 초라한 복음 속에서 생명의 향기를 맡았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나가면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는 보석과 같은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핍박과 희미한 성경의 가르침 속에서도 굳게 주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듣고 망설이지 않고 주님께 돌아갔습니다. 과감한 돌이킴은 모든 이들의 본이 되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열망을 일깨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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