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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Note/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3. 1:11-17 은혜로 부르시는 하나님

by 하늘땅소망 2019. 6. 26.

[갈라디아서]  3.  1:11-17 은혜로 부르시는 하나님

 

[본문읽기]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주해와 묵상]

 

이제 본론으로 들어왔습니다. 1:1-10까지는 갈라디아서 전체 서두에 해당됩니다. 다른 편지와 다르게 바울은 급하게 서두 안에서 자신이 감정을 드러내고 ‘다른 복음’에 대한 열변(熱辯)을 토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다른 복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바울은 ‘다른’ 복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이제 1:11-2:21까지는 복음이 무엇인가 증명해 나갈 것입니다. 이 부분은 갈라디아서 본론의 서론에 해당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1:11-17절까지는 바울이 복음을 변증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받은 복음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1:11-1:24까지 한 곳으로 묶어 묵상하면 좋겠지만 11-17절까지는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이 있어 둘로 나누어 1:18-24은 다음에 묵상합시다.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바울이 어떻게 해서 사도가 되었는가’입니다. 다른 서신서에서도 종종 강조되지만 갈라디아서는 더욱 무게를 두고 사도성을 변증해 나갑니다. 사도성은 곧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권위와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에 대한 반론의 근거로 사용됩니다. 1:11-17까지의 내용은 아래와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ㄱ. 11-12 바울 복음의 기원

ㄴ. 13-14 유대교에 있을 때의 바울

ㄷ. 15-17 예수를 믿고 난 후의 바울

 

1) 바울 복음의 기원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1-12절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할 구절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전한 복음’이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앞선 ‘다른 복음’과 대척점(對蹠點)에 있습니다. 다른 복음과 바울의 복음의 본질적 차이는 복음의 기원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합니다.

 

먼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다.

 

헬라어 순서에 의하면 ‘(분명히) 알아라(Γνωρίζω)’로 시작합니다. ‘알아라’의 헬라어 ‘그노리조(Γνωρίζω)’가 대문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문자는 대화의 시작이나 강조를 나타낼 때 사용합니다. 바울은 감정이 격앙된 것이 분명합니다. 너무나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그것은 사람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라(ὅτι οὐκ ἔστιν κατὰ ἄνθρωπον)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이 사람으로부터(κατὰ ἄνθρωπον) 온 것이 아니라고 명백히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사람으로 말미암지 않았다는 말을 부정적으로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복음의 기원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으로부터(κατὰ ἄνθρωπον)’라는 말은 거듭나지 않는 사람을 뜻하며,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사람을 곧 율법과 동일시합니다. 이 말은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16절)와 대등한 말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에게 받거나 배운 것이 아니다.

 

이 표현 역시 ‘사람에게’와 동일의 의미입니다. 다만 ‘받다’와 ‘배운다’는 좀 더 명확하고 확고한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처음은 약간 모호하게 강조하다가 점점 분명하게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점진 법을 통해 자신의 의지와 뜻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받다’의 헬라어인 ‘파라람바노(παραλαμβάνω)’는 종종 다른 사람이나 스승에게 전수 받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동일한 단어가 사용된 고린도전서 11:23에서 ‘주께 받은 것이니’이라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종종 전통을 부정적으로 표현하긴 하지만 전통 자체를 악하다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들은 구원을 줄 수 없는 무능하고 무가치한 것임을 강조할 때 사용합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다.

 

11절과 12절 상반절은 ‘아니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렇다면 무엇인가라고 뭇는 물음에 답을 하듯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다(ἀλλὰ δι’ ἀποκαλύψ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라고 소개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사람이 생각하거나 궁리하거나 추론한 것이 아닙니다. 계시라는 말은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그리고 섭리를 통해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오래된 사랑의 발현(發現)입니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계획하시고, 이루어 가시는 의지인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하지 않고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리고 직설적으로 표현합니다. 요한 역시 요한계시록을 시작하면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ἀποκαλύψ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라고 표현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이시며,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함께 세상을 구원하시며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2) 박해자 바울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3-17은 앞선 11-12절의 논리적 근거로 제시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람은 사람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유대교와 그와 관련된 율법 등을 포괄적으로 ‘사람(ἄνθρωπος)’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제 자신이 사람으로 있을 때, 즉 유대교에 있을 때 어떤 상태였는지를 소개합니다. 그는 한 마디로 교회를 박해하는 자였습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에서 바울이 ‘지금은’ 유대교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울이 ‘육신적 유대인이 아니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유대교 전통에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후에 강조될 ‘율법의 행위’는 ‘유대교에 있을 때 행한 일’과 동의어입니다. 더글라스 무는 이 구절을 “바울이 자신의 헌신과 열정을 뛰어나게 했던 전반적인 유대교 신앙을 아우르는 말로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대교라는 단어를 “유대 신념과 관례가 모세 율법과 토라에서 발전된 전통에서 성문화된 대로 그것들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왜 문제일까요? 바울이 유대교에 있을 때, 즉 율법의 행위를 통해 의에 이르고자할 때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육신에 속한 자가 성령을 따르는 자를 박해하고, 육신의 자녀가 영적인 자녀를 박해한 것처럼 말입니다.(갈 4:21-31) 바울과 전통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것은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율법에 속한 자들의 필연적 행동입니다. 바울은 14절에서 “유대교”와 “내 조상의 전통”을 동등어로 사용합니다. 유대교에 대한 열심히 곧 전통에 대한 열심입니다. 결국 이러한 열심의 근원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육신에 속한 ‘율법의 행위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은 단순히 유대교와 전통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회가 유대교와 조상(유대인)의 전통을 따르려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예수를 통한 ‘의’를 핍박(대적)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자신이 교회에 대하여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딤전 1:13)로 고백합니다. 13-14절에서 나타난 바울의 열심은 후에 소개될 거짓 교사들의 열심(4:17)과 동일합니다. 결국 그러한 열심은 갈라디아 교회를 복음에서 떠나게 하여 자신들에게 열심을 내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했듯 거짓된 열심은 결국 육식의 욕망을 따라 행하게 합니다. 그러한 욕망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는 거짓되고 왜곡된 열심을 유발시키며 교회를 핍박하게 할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들을 본성적으로, 필연적으로 교만합니다. 바울은 왜곡된 열심에 오도(誤導)되어 교회를 박해했던 것입니다.

 

3) 거듭난 바울

 

바울의 변화는 갑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향하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눈이 멀었고,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고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행 9:20)이라고 전합니다. 종종 어떤 목사님들은 17절에 나타난 아라비아가 침묵하고 기도하며 사역을 준비하려 갔다고 말하지만 전혀 아닙니다. 바울은 눈을 뜬 즉시 회당으로 갔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메섹에서의 체험은 하나의 경험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게 했고, 새피조물이 되게 했습니다.

 

바울의 거듭남의 특징들

바울의 거듭남의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봅시다. 세 가지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ㄱ. 어머니의 태에서 택정하심(15 상)

ㄴ. 은혜로 부르심(15 하)

ㄷ. 사명을 위해 부르심(16 상)

 

이 앞선 두 가지는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함’이라는 16절 상반절을 향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태에서 택정함은 곧 은혜로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태에서부터 불렀다”는 표현들은 사명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태에서부터 택정함을 입었습니다. 바울이 자원하거나 곰곰이 생각해보고 결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권적인 부르심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택정과 부르심이 ‘선지자직’과 깊게 연관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바울의 이러한 표현은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고 강조하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와 예레미야 선지지가 모태에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을 때처럼 사도바울 역시 모태로부터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소명에 대해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것을 확증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아라비아로 다시 전도하러 갔던 것입니다.

 

3. 나가면서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가르치고 있는 다른 복음의 실체를 폭로하려고 합니다. 먼저 자신이 누군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의 사도직이 왜 중요하고, 그 사도직이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인지 강조합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은 인간의 지혜나 경험, 또는 전통에서 생겨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왜 그것이 중요할까요? 거짓 교사들이 말하는 헛된 가르침에 속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거짓교사들이 가르치고 있는 유대교, 전통은 육체적 욕망에 사로잡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회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은혜에 한두 가지 덧붙여지고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것이며, 오히려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 스스로 유대교에 있을 때 왜 교회를 핍박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소개합니다. 헛된 가르침과 어리석음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자신의 지혜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반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부르시듯 자신을 어머님의 태에서 택정하셨고, 은혜로 부르셨음을 강조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싶어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9:16) 바울이 복음 전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자신의 사도직이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로 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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