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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성전 시기(신구약 중간사) 역사 개요

샤마임 2019.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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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성전 시기(신구약 중간사) 역사 개요

 

기원전 1050년 사울이 이 왕이 된다. 40년 동안 통치한다. 그 뒤 유다 지파 출신인 다윗이 제2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역시 40년 동안 통치한다. 다윗과 우리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여 낳은 아들은 죽고 두 번째 아들인 솔로몬이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아 40년 동안 통치한다. 기원전 931년 솔로몬이 죽고 아들 르보호암이 이스라엘의 왕위를 물려받지만 강압적인 통치로 인해 북쪽의 열 지파가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고 분리된다. 결국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분단된 형태로 마지막까지 가게 된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남유다는 586년 앗수르를 멸망시킨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다. 70년의 유배 생활을 끝내고 기원전 516년 솔로몬 성전에 이어 두 번째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이 세워진다.

 

1. 헬라시대(The Greek Era)

 

B.C. 331-B.C. 143년까지의 약 190년의 시기

 

1) 알렉산더 시대 (B.C. 336-323)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와 두 번째 성전을 지었을 때 세계 역사는 요동치고 있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페르시아는 곧 마케도니아 필립의 아들인 알렉산더가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멸망당하게 된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가 만들었던 거대한 제국의 중심을 근동에서 지중해로 옮겼다. 팔레스타인을 지나 이집트를 멸망시켰고, 페르시아와 인도 경계까지 정복해 나갔다. 그러나 그는 젊은 나이인 BC 323년, 33세에 요절했고, 결국 그의 제국은 세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시리아를 중심으로 셀레우쿠스 왕조가 형성되었고,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프톨레마이 왕조, 원래 본거지였던 마케도니아 지역은 리시마코스와 카산드로스가 나누어 통치하게 된다.

 

2) 톨레미(프톨레미) 왕조 시대(B.C. 301-200)

 

팔레스타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왕조는 톨레미 왕조와 셀류쿠스 왕조이다.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위로를 셀류쿠스 왕조가 통치했고, 아래로 이집트 지역은 톨레미 왕조가 통치했다. 두 왕조는 지역적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었고, 두 왕조의 야망에 의해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다. 이러한 두 왕조 사이에 자리한 팔레스타인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고, 나라 전체가 전쟁터로 변하기 일쑤였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약 100년 동안 톨레미 왕조가 안정적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아마 이 시가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안정적이고 행복한 시기였을 것이다.

 

BC 312년 톨레미는 많은 유대인들을 이집트에 새로 건설된 알렉산드리아로 이주시킨다. 유대인 회당이 만들어지고 심지어 유대인 밖에 성전이 지어진다. 후에 이 성전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에 의해 파괴당한다. 이때 히브리어로된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 인경(LXX)이 만들어진다. 70인의 학자에 의해 번역되었다 하여 70인 역, 또는 70 인경으로 불린다. 70 인경 번역 이야기가 담겨있는 곳은 가톨릭 성경 구약 외경인 ‘아리스테아스 편지’에 있다. 식민 시민으로서 조공을 바쳤으나 제사장에 의해 유대인 고유의 통치권이 상당히 부여되었으며, 중대한 사건이 아닌 이상 유대인 자치법에 의해 결정되었다.

 

3) 셀류쿠스 왕조 시대(B.C. 198-167)

 

이러한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두 왕조를 서로의 땅을 넓히기 위해 자주 충돌했다. 5번 정도의 큰 전쟁이 있었고, 결국 기원전 198년 팔레스타인 지역을 설류쿠스 왕조에 편입시킨다. 이것으로 팔레스타인은 새 주인을 모시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전쟁 초기는 톨레미 왕조에 우호적 있지만 말기에는 셀류쿠스 왕조를 돕게 된다. 그 덕분인지 셀류쿠스 초기에는 우호적으로 유대인을 대했고, 적지 않은 자유도 보장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기원전 190년 안티오쿠스 3세는 로마와 벌린 서머나(Smyrna) 전투에서 크게 패하게 된다. 서머나 전쟁은 로마와 한니발 장군과의 전쟁이었다. 한니발이 패함으로 안티오쿠스는 큰 부담을 안게 된다. 그 여파로 타우러스 산맥(the Taurus Mountains) 서쪽에 위치한 소아시아 지역을 로마에게 빼앗긴다. 금 5,000달러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여 재정상으로도 큰 타격을 받는다. 안티오쿠스는 열악한 재정을 만회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힘에 부치는 세금을 부과한다. 이때 예루살렘 성전에 보관하던 많은 보물들까지 탈취한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견딜 만 했다. 정말 심각한 상황은 다음 통치자에게 일어난다.

 

안티오쿠스 3세가 살해당하고 그의 장남이었던 안티오쿠스 4세가 왕으로 등극한다. 그는 유대를 헬라화 시키기 위해 강압적으로 유대인들을 대하기 시작한다. 그는 가장 먼저 사독 가문의 제사장이었던 오니아스 3세(OniasⅢ)를 파문시킨다. 오니아스 3세의 파문 뒤에는 시리아파(셀류커스왕조)와 이집트파(톨리미 왕조)의 정치적 이견으로 인한 갈등이 존재한다. 왕조가 바뀌면서 시리아파는 득세하게 되고 이집트 파는 위축되었다. 시리아파는 이집트파였던 오니아스 3세를 처리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시리아파는 안티오쿠스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아니아스 3세를 처리해 달라고 청을 한다. 문제는 오니아스 3세는 사독 계열의 합법적인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안티오쿠스 3세는 비교적 온화한 정책을 폈기 때문에 오니아스를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아들인 안티오쿠스 4세는 달랐다. 기회를 엿보던 시리아파는 안티오쿠스 3세가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아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충동질해 오니아스 3세를 대제사장직에서 파면시킨 것이다.

 

시리아파 지도자였던 시몬은 자신의 동생인 야손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한다. 야손은 안티오쿠스 3세와 결탁하여 예루살렘을 헬라적으로 재정비한다. 안티오쿠스 4세의 지원을 등에 업고 야손은 시몬은 예루살렘에 경기장을 세우고, 유대인들에게 헬라풍의 옷을 입게 한다. 이러한 변화를 지켜보던 정통 유대인들과 하시딤과 경건한 유대인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아론이 자손, 특히 사독의 제사장들만이 대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사고 체계를 전복시킨 그들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비록 헬라인에 의해 대제사장이 되기는 했지만 야손은 정통파였기에 불만은 있었지만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메넬라우스라는 유대인이 토비야 가문보다 더 많은 뇌물을 바치고 대제사장이 된 것이다. 메넬라우스와 그를 따르던 자들은 안티오쿠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더욱 헬라의 문화를 정착시키려 했고, 정통파를 핍박하기 시작한다.

 

야손파와 메델라우스파의 그리고 정통 유대인파들간의 긴장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안티오쿠스가 이집트 원정에서 전사하게 된다. 소문을 전해 들은 야손과 추종들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와 메넬라우스를 몰아내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안티오쿠스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집트를 거의 정복할 뻔했지만 로마가 이집트를 돕는 바람에 실패하고 다시 돌아간다. 이집트 원정의 실패와 로마의 패창을 지켜보던 안티오쿠스 4세는 제국을 정신적으로 통일해야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다. 자신이 세운 메넬라우스를 몰아내려 했던 유대인들을 반란세력으로 보고 그들에게 철저히 복수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다. 먼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야손을 추방하고 다시 메넬라우스를 대제사장직에 복귀시킨다. 자신의 군대를 풀어 닥치는 대로 유대인들을 학살한다. 성전의 기구들을 끌어내 가져가 버린다. 반항하는 유대인들을 잔혹하게 죽이고, 유대교 전통을 뿌리째 뽑으려고 한다.

 

먼저 희생 제사를 중단시킨다. 또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게 막는다. 심지어 토라를 찢어 불사른다. 유대인들에게 돼지고기를 억지로 먹이게 하며, 곳곳에 우상을 세워 제사를 드리게 한다. 그의 파괴적 행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유대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성전 뜰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경배하게 한다. 심지어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 놓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반항했고, 반항한 자들은 지체 없이 죽였다. 에피파네스 4세는 유대교 자체를 말살시키려 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외경인 마키 1서와 2서에서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2. 저항과 독립(B.C 162-64)

 

*마카비(Maccabee) 혁명은 셀류쿠스 왕조 시대 안에 있지만 독립했던 하스몬 왕조와 함께 묶는 것이 선명해 보인다.

 

1) 마카비(Maccabee) 혁명

 

순교를 당하거나 예루살렘을 떠나는 등의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던 유대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그 유명한 마카비 혁명이 시작된 것은 예루살렘이 북서쪽에 자리한 모데인이란 마을이었다. 시리아의 한 관리가 이곳에 찾아와 이교 제사를 강요했다. 이 대 다섯 아들을 둔 마타티아스(Mattathias, 한글성경은 ‘맛다디아’로 번역, 이곳에서 마카비라는 이름이 생긴다)라는 제사장이 명령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헬라 관리와 배교자들을 죽여버린다. 그리고 산으로 도망친다. 산으로 도망친 그들은 정통을 지키려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마카비 혁명

 

저항운동은 마타티아스(Mattathias)의 세 아들인 마카비(대장쟁이)라는 별명을 가진 유다와 요나단, 그리고 시몬에 의해 계속하여 이어간다. 기원전 165년 12월 25일 그들은 성전을 회복하고 예배를 다시 드리게 된다. 정확히 성전이 더럽혀진 3년 후이다. 이때를 기념하여 하누카, 또는 빛의 절기로 알려진 수전절이 생겨난다.(요 10:22) 도중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사망하고 안티오쿠스 5세가 등극한다. 나이가 어렸던 탓에 리시아스가 섭정하면서 기원전 162년 유대인들에게 절기를 자유롭게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한다. 리시아스는 그것뿐 아니라 유대인의 호감을 사기 위해 메넬라우스를 죽인다. 핫시딤은 정치적이 목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다는 정치적 독립을 위해 전쟁을 시도하지만 참패하고 자신도 죽임을 당한다. 다메트리우스 1세가 지배하면서 아론 계열의 알키무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그도 얼마 가지 않아 죽게 된다. 그 후 예루살렘은 무려 7년 동안 대제사장이 없는 공백 상태가 된다.

 

유다가 죽자 형제인 요나단이 뒤를 이었다. 셀류쿠스 제국은 이때 한참 세력다툼 중이었다. 더메트리우스 1세와 알렉산더 발라스가 충돌한 상태였다. 요나단은 알렉산더 발라스를 지지했다. 결국 승리는 알렉산더 발라스에게 돌아갔고, 덕분에 요나단은 발라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알렉산더 발라스는 기원전 152년 요나단을 유대의 지도자 대제사장으로 임명하고 만다. 정통 유대교를 신봉했던 하시딤과 경건한 유대인들을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전쟁으로 인해 손에 피를 묻힌 그가 대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다. 이것을 참다못한 수많은 유대인들이 마키비 가문에 분노를 갖게 되었고, 예루살렘을 등지게 된다. 이때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막이나 시골에 내려가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간다. 학자들은 쿰란 공동체가 이때 만들어지지 않았는가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이때 안티오쿠스 4세의 아들을 자칭하던 자기 일어나 알렉산더 발라스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다. 자신을 더메트리우스 2세로 명명한다. 그는 다시 안티오쿠스 6세와 세력다툼을 하게 된다. 안티오쿠스 6세를 지지하던 트리포는 시시각각 세력을 확장하며 데메트리우스 2세를 지지하던 요나단을 죽여 버린다.(기원전 143년) 요나단의 뒤를 이어 시몬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더메트리우스 2세에게 세금 면제와 유대인들의 독립을 요구한다. 오니아스 3세 이후 유대는 정통적인 제사장이 아닌 사람들이 대제사장이 되었고, 지도자와 대제사장을 겸직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시몬은 주전 134년 자신의 사위였던 프톨레미에게 살해당한다. 시몬을 대신해 그의 아들 힐카누스가 대제사장이 된다.

 

2) 하스몬 왕조(B.C134-63)

 

‘하스몬’이란 용어는 하스몬(Hasmon)가에 속했던 마타디아스와 그의 아들들의 가족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마카비는 마타디아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말한다. 하스몬 왕조로 불린 이유는 70여 년 동안 정치적인 독립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요한 힐카누스Ⅰ세(Hyrcanus Ⅰ, B.C. 134-104)

아리스토불루스 Ⅰ세(Aristobulus Ⅰ, B.C. 104-103)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B.C. 103-76)

살로메 알렉산드라(Aalome Alexandra, B.C. 76-67)

요한 힐카누스 Ⅱ세(Hyrcanus Ⅱ, B.C. 67-66)

아리스토불루스 Ⅱ세(Aristobulus Ⅱ, B.C. 66-63)

요한 힐카누스Ⅰ세(Hyrcanus Ⅰ, B.C. 134-104)

 

요한 힐카누스 1세 시절 잠시 속국이 되었지만 주전 129년 로마 원로원의 인준을 받아 독립국이 된다. 힐카누스 1세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곧바로 영토 확장에 나선다. 팔레스타인 남부에 자리한 이두메 지역을 점령하고 그들에게 강제로 할례를 시킨다. 이 사건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거나 율법을 지키지 않거나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개처럼 취급했다. 그런 그들을 개종시키려 했다는 것은 굉장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힐카누스의 이러한 행동은 후에 이두메 출신의 헤롯 안티파터가 큰 저항 없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게 된다. 힐카누스는 다시 북쪽으로 진군하여 사마리아를 점령한다. 그곳에 있던 그리심 성전을 파괴해 버린다. 그러나 그는 정통파 유대인들에게 결코 환영받지 못했다. 사독 가문이 아니었기 때문 정통적 의미에서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친권력자들은 사두개파가 되고 율법을 경건하게 추구했던 이들은 바리새파가 되어 완전히 구분된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그룹과 지도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바리새파는 경건한 핫시딤들이었으며 전통적인 신앙관과 율법을 지키려는 열정을 가진 자들이었다.

 

아리스토불루스 Ⅰ세(Aristobulus Ⅰ, B.C. 104-103)

 

경건한 평민이 다수를 차지했고, 일부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참여한 바리새파는 두 가지에 반대했다. 하나는 힐카누스가 대제사장 자격이 없다는 것과 다윗이 후손이 아님에도 왕이 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리스토불루스 1세(B.C. 103)가 돼서야 왕의 칭호를 사용한다. 아리스토불루스 1세는 유대인이었지만 헬라 문화를 사랑했고, 친헬라적(나중에는 로마적)이었던 사두개인들을 지원했다. 더욱 큰 문제는 그가 어머니와 동생 안티고누스를 살해하는 일에 관여한 것이다. 이러한 성향과 사건들은 경건한 정통파 유대인들에게 혐오와 적대감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B.C. 103-76)

 

그가 죽고 그의 아들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왕과 대제사장의 자리를 물려받는다. 그런데 그는 즉위하면서 자신의 동생 아리스토불루스의 미망인과 결혼한다. 그로 인해 바리새인들은 격한 분노에 휩싸였고, 잠잠해서는 안된다는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그는 비정통적이지만 분명히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제사장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는 거리끼지 않고 ‘왕’의 칭호를 사용했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모든 주화에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자신이 왕임을 새겨 놓았다. 그는 전혀 종교적이지도 않았고, 대제사장직을 혐오하는 것 같은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장막절에 제단에 부어야 할 전제를 땅에 의도적으로 쏟아 버린다. 그 모습을 바라본 백성들은 제사에 사용하기 위해 가져왔던 시트론이란 나무를 그에게 던지며 분노했다. 화가 난 그는 군대들에게 명령하여 많은 유대인들을 성전 뜰에서 살해한다. 결국 내전이 발발하게 되고 6년이나 지속된다. 그는 자신에게 반항하는 800명 정도의 유대인들을 십자가형에 처하는 악랄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죽으면서 아내에게 바리새파와 화해하고 친하게 지내도록 충고한다. 당시 바리새파는 특정한 집단을 이룬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 공유된 교리적 관점과 경건 습관으로 인해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고, 여론을 형성하기까지 했다.

 

살로메 알렉산드라(Aalome Alexandra, B.C. 76-67)

 

Salome Alexandra

요한 힐카누스 Ⅱ세(Hyrcanus Ⅱ, B.C. 67-66)

 

아리스토불루스 Ⅱ세(Aristobulus Ⅱ, B.C. 66-63)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죽자 그의 첫째 아들인 요한 힐카누스 2세가 이어받는다. 그러나 그의 동생 아리스토불루스는 사두개파의 지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정치적 야망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죽자는 그는 즉시 행동을 개시한다. 자신을 따르는 군대를 동원하여 그의 형인 힐카누스 2세를 여리고 근처에서 격퇴시킨다. 아리스토불루스는 기원전 66부터 63년 동안 왕과 대제사장이 된다. 하스몬 왕조는 갑자기 몰락한다. 동생에게 쫓겨난 힐카누스는 이두메의 총독으로 있던 헤롯 안티파터(Antipater, 헤롯 대왕의 아버지)의 충동질로 전쟁을 일으킨다. 힐카누스는 아라비아 통치자인 아레타스 3세의 도움을 받아 아리스토불루스는 공격한다. 팔레스타인 상황을 지켜보던 로마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폼페이는 스카우루스(Scaurus) 장군을 보내 처리하도록 한다. 그러나 뒤로는 아리스토불루스의 뇌물을 받고 그를 후원하고 있었다. 잘못하면 오히려 아리스토불루스의 음모에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폼페이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점령해 버린다.

 

로마 황제 가시사의 지지와 권위를 받던 폼페이우스(Pompeius) 장군은 미드리다테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기원전 63년 미드리다테스를 다시 반격을 시도하지만 결국 패하고 자결함으로 본도(Pontus) 지방은 폼페이우스 장군의 영향 아래 떨어진다. 폼페이우스 장군은 십 대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전쟁에 참여했으며 공격적이고 잔인한 장군이었다. 기원전 77년 전직 집정관이었던 레피두스가 일으킨 반락을 진압하는 것을 비롯해 마리우스파의 잔당 세르토리우스를 진압하기를 자청하기까지 한다. 그때 나이 겨우 29살이었다. 기원전 72년 집정관이 되었다. 집정관에서 물러난 기원전 67년 로마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해적 토벌대 사령관에 취임한다. 보수적인 원로원 의원들은 쉽게 허락하지 않았지만 결국 승낙을 얻게 된다.

 

폼페이우스(Pompeius)

 

그는 뛰어난 전술과 지휘로 3개월 만에 로마 근처의 대부분의 해적들을 소탕해 버린다. 이러한 인기와 신임을 통해 폼페이우스는 최고의 절대 사령관이 되고 연장되는 해운까지 얻는다. 결국 소아시아를 지배하던 미트라다테스와 전쟁을 했던 것이다. 시리아를 거쳐 곧바로 유다로 들어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결국 유다는 시리아 소속의 로마 속국이 된 것이다. 후에 폼페이우스는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쳐들어오는 카이사르와 전쟁에서 패하여 이집트로 도주한다. 그러나 기원전 48년 9월 29일 자신의 58번째 생일날 자신의 군사들에게 배반당해 죽고 시체가 바다에 던져진다. 제2성전기 문헌인 <솔로몬의 시편>에서 폼페이우스를 암시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하여 힐카누스는 다시 대제사장으로 임명되고 유대 분봉왕이 된다. 이렇게 하여 하스몬 왕조는 막을 내리고, ‘왕’도 사라지게 되고 로마의 속국이 된다. 이제 로마의 치하에서 헤롯의 가문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3. 로마 시대(BC 63-AD135)와 헤롯 왕조

 

이두매인(Idumea)

 

헤롯가문은 아이러니하게 유대인들이 아닌 이두매인들이다. 이두메인들은 야곱의 형이었던 에서의 후예인 에돔족속을 말한다. 이두매는 ‘에돔 사람의 땅’이란 뜻이다. 사해 남쪽과 동쪽에 걸쳐있다. 이곳을 페트라지역이라 부른다. 에돔은 붉다는 뜻이다. 유다지파 남쪽에 위치한 시므온 지파와 지척이며 대부분 유대인들과 원수지간이었다. 그들은 바벨론 침공 때 함께 멸망당했지만 잔존 세력들이 남아 계속하여 에돔 사람들로 역사에 남았다. 마카비 시대에 이두메인들은 마카오에게 참패를 당한다. 요세푸스는 후에 요한 하르카누스 1세가 모든 이두메 사람들을 정복한 후 할례를 받는 조건으로 남아 있게 했다. 유대인 여인들과 섞이면서 반은 에돔 족속이고 반은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이두매인들이었다.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고, 때로는 복수심을 품기도 했다. 겉으로는 유대인의 범주 안에 들었지만 유대인들은 이두매인들을 열등한 민족으로 하대했다.

 

헤롯 안티파터 1세(Antipater, B.C. -45)

헤롯 안티파스 2세(Antipas)

헤롯 대제(Herod the Great, B.C. 73- B.C. 4)

헤롯 아켈라오(B.C. 23 - A.D. 18)

본디오 빌라도(A.D. 26-36)

헤롯 안티파스(B.C. 3 - A.D. 39)

헤롯 빌립1세( -34)

헤롯 아그립바1세(A.D.37 – 44)

 

1) 헤롯 안티파터(Antipater)

 

특이하게도 하스몬 왕조의 역사에 말기에 갑자기 이두메 사람인 헤롯 안티파터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힐카누스 1세에 의해 이두메 사람들이 할례를 받았다는 이야기 외에 등장하지 않다 갑자기 등장하여 하스몬 왕조의 몰락에 일조한다. 아마도 헤롯 안티파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두메 지역은 거의 소외되거나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변방으로 머물러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헤롯 안티파터는 동생 아리스토불루스 Ⅱ세 때문에 피난중이었던 힐카누스 2세를 충동질한다. 무능하고 유약했던 헬라누스는 안티파터에게 속아 자신의 동생을 로마의 힘을 빌어 몰아낸다. 그러나 결국 자신도 아무런 이득도 취하지 못하고 하스몬 왕조는 몰락하고 대신 헤롯 안티파터가 대시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만다. 안티파터는 교활하고 잔인했다. 안티파터는 초기에 폼페이우스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기원전 48년 폼페이우스가 몰락하자 즉각 카이사르(Caesar)에 충성을 바친다. 지극히 정치적이고 교활했던 그는 카이사르에게 가서 자신의 왕관을 바치고 죽여 달라고 한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다시 그의 왕관을 머리에 씌우고 일으켜 준다.

 

안티파터로 인해 카이사르는 팔레스타인 지역뿐 아니라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도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입지에 서게 된다. 카이사르는 안티파터를 활용하기로 하고, 즉각 그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결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이두메인이라는 점이 가장 컸고 또한 과도하게 로마를 등에 업고 활개 쳤기 때문이다. 기원전 47년 그는 유대의 지방행정관으로 임명되었고, 25살이던 자신의 아들 헤롯을 갈릴리 총독로 임명한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죽자 카이우스(Cassius)가 시리아 총독이 되어 유대에 과도한 세금을 거두어 들인다. 결국 안티파터는 43년 독살되고 만다.

 

헤롯 안티파스 2세(Antipas)

 

2) 헤롯대제(Herod the Great, B.C. 73/43- B.C. 4)

 

헤롯 대왕의 이야기는 아버지를 암살한 자들을 처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후 하스몬 왕가의 공주였던 미리암과 결혼한다. 미리암이 청혼한 것으로 나오지만 헤롯이 강제로 청혼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당시 헤롯은 도리스라는 부인과 3살 된 아들 안티파스(자신의 아버지와 동명)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버리고 마리암과 결혼하여 유대인들의 호의를 사려했다. 기원전 42년 드디어 로마의 정치 내전이 막을 내린다. 권력을 잡은 안토니(Antony)는 안티파터의 두 아들 파사엘(Phasael)을 유대의 통치자로 헤롯을 갈릴리의 통치자(분봉왕, tetrachs)로 임명한다. 이들의 중요한 임무는 로마가 파르티아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실패해 손해를 본 것에 대한 자금 조달이었다. 갈릴리에서 폭동이 일어난 것을 이러한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침략한다.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아들 안티고누스도 자신의 왕좌를 다시 찬탈하기 위해 이들과 함께 한다. 이들은 예루살렘 포위하였고, 붙잡혔지만 곧 자살한다. 그러나 헤롯은 가족들을 마사다 요새에 숨기고 로마로 피신한다. 로마에 달려간 헤롯은 곧바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를 접견한다. 그들은 헤롯을 원로원에 소개했고, 원로원은 헤롯에게 유대의 왕으로 임명된다.(B.C 40) 헤롯은 안토니가 지원한 로마의 군대를 이끌고 37년에서 3년 동안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결국 안티고누스를 죽인다. 드디어 그 유명한 헤롯 대왕의 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헤롯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로마의 옥타비아누스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가 손을 잡고 자신을 적지 않게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헤롯의 클레오파트라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잘못하면 자신이 겨우 붙잡은 권력도 모두 놓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원전 31년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와의 악티움 전쟁에서 패함으로 해결되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있는 이집트로 피신하고 만 것이다.

헤롯은 두 고래 싸움에 새우처럼 위기에 모면했지만 나바테아와의 전쟁을 핑계로 전쟁에 안토니우스를 돕지 않았다. 전쟁이 끝났을 때 헤롯은 다시 옥타비아누스가 있던 도로스 섬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이곳에서 헤롯 안티파터가 카이사르에게 왕관을 내려놓은 것과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안티파터가 아니라 헤롯 대제가 원형인 듯하다.] 그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자신의 왕관을 내려놓고 안토니우스를 도운 것을 사죄하고 같이 동맹하고 싶다고 제안한다. 옥타비아누스 입장에서 헤롯은 교활했지만 많이 유용한 존재였다. 겉으로는 기꺼이 받아 들였고 헤롯의 충성도 진심인 것처럼 인정했다.

 

헤롯의 통치는 이전의 헬라시대와 하스몬 왕조 시대와는 상당히 달랐다. 일단 헤롯은 유대인은 아니지만 유대적이었다. 그러나 우월한 입지를 가지지 못한 열등한 민족이었다. 완전한 헬라나 로마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유대인도 아니었다. 이러한 애매한 헤롯 가문은 유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노력을 하는 동시에 혐오했다. 헤롯 가문이 양가적 성향은 헤롯 안티파스 2세에서 극에 이른다. 그는 이전세대보다 더 심한 헬라화 정책을 편다. 그는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행동했다. 그는 자신의 입지를 위해 힐카누스의 손녀 마리암네(Mariamne)와 결혼함으로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려했다. 또한 기원전 20년 스룹바벨 성전은 보수하고 증축하여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화려하고 거대한 성전을 만든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헤롯 성전’으로 불렀다. 제자들 예수님께 성전을 가리키며 자랑스러워할 만큼 유대인들에게 자부심을 주었다.

 

이두메인이었기 때문에 왕은 될 수 있었으나 대제사장은 겸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대제사장의 위상을 낮추기 위해 몇 가지를 고안해 낸다. 먼저 대제사장직의 세습을 철폐하고 자신이 임명한 사람만이 대제사장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평생직이 아니라 일정한 기간만을 할 수 있도록 기한제로 바꾸었다. 이로인해 자신에게 이로운 사람이나 뇌물을 주는 세속적인 대제사장이 선출되게 된다. 헤롯 대제는 유난힌 건축사업에 몰두했다. 예루살렘 성전을 비롯해 갈릴리 해변을 정비하고 카이사랴라 명명한다. 사막의 요새인 마사다를 재정비하고, 사바스테에 있는 고대 사마리아 도시들을 등을 건축한다.

 

정치적으로도 유대인들의 권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산헤드린 공의회를 축소시키고 헬라주의자들을 중심한 왕실 고문단을 세운다. 또한 세습된 귀족신분까지 공을 세운 사람들로 대체한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만들어 모든 행정과 권력을 자신의 손을 거치도록 만들었다. 예루살렘에 거대한 극장을 세우고, 들에는 원형극장을 건설했는데, 이것은 로마 황제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요세푸스는 헤롯이 5년을 주기로 행사를 치르게 함으로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이 주인은 로마 황제임을 각인시키려고 했다. 그렇게 해야만 로마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자신의 자리가 정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롯은 유대인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는 로마적이면서 동시에 유대적이고 싶었다. 이러한 딜레마는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는 이들을 지원함으로 경건한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헤롯의 말년은 치욕의 시간이었다. 첫 번째 아내인 미리암을 기원전 30년 경에 간통죄를 뒤집어 씌워 처형하고 그의 장모까지 죽인다. 그의 숙부였던 요셉도 함께 처형한다. 사실이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그의 아들들이 자신을 독살하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하여 몇 명의 아들을 처형한다. 이러한 상황들은 헤롯이 얼마나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고전 분투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정통 유대인이 아니었으며, 로마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했고, 수많은 정적들을 대적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아내와 주변의 사람들, 심지어 아들들까지 죽여야만 했던 것이다. 기원전 4년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는다. 그는 자신의 유언을 통해 자신의 영토를 세 명의 아들에게 주었다. 아켈라오는 자신이 통치하던 전 영토를,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리와 뵈레아를, 빌립1세에게는 갈릴리 북쪽과 동쪽인 골란과 베타니아, 트라크노파스를 주었다. 그러나 그의 유언은 단지 유언일 뿐이었다.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누스를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세 아들 누구도 아버지가 받았단 '왕'의 칭호를 받지 못했다.

 

우리는 종종 헤롯 대왕이 예수님의 탄생과 맞물려 일어나 유아학살 사건의 장본인 것처럼 말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또한 시기적으로도 맞지 않다. 예수님은 B.C. 4년에 태어난 것이라면 헤롯 대제는 유아학살의 장본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해가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곧바로 학살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적어도 2년 정도가 흘렀음을 암시한다. 즉 그의 죽은 사후에 학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또 하나의 난제는 당대의 어느 기록물에도 유아학살사건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헤롯 대제를 원수처럼 여기는 요세푸스까지도 기록하지 않았다. 아마도 유아학살사건은 후대에 사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제 팔레스타인 통치는 헤롯의 아들 헤롯 아켈라오에게 넘어간다.

 

3) 헤롯 아켈라오(B.C.23/4 - A.D. 18/6)

 

헤롯 대왕이 죽자 헤롯의 여러 아들들은 마음이 급해졌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로마의 연줄을 찾고 대려고 했다.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헤롯의 통치를 반대했던 유대인의 대표단들도 로마로 향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명 이두매인이 아닌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왕이 되기를 갈망했을 것이다. 유대인 대표단은 그렇게 되지 못할 경우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바랬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아켈라오가 유대 땅의 통치자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아켈라오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자신을 반대했던 자들을 잔인하게 보복한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비유 속에 종종 등장한다.(눅 19장)

 

아켈라오는 신약 성경의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요셉이 이집트에서 돌아올 때 아켈라오가 왕이 된 것을 알고 갈릴리로 간다. 요셉은 아켈라오가 아버지였던 헤롯 대왕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교활하고 잔인한 것을 소문을 통해 이미 접한 것으로 보인다. 아켈라오가 분봉왕으로 있을 때 갈릴리에서 폭동이 일어난다. 그는 무자비하게 3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학살한다. 그로 인해 사마리아를 비롯한 통치지역 전반에서 그에 대한 거센 항의가 일어나고 로마에 항의서를 보낸다. 결국 아켈라오는 기원후 6년 로마는 그를 직위를 박탈당한다. 이렇게 하여 헤롯의 가문은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팔레스타인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헤롯 아그립바가 유대의 왕으로 3년(기원후 41-44) 정도 통치한 것을 제외하고는 로마의 속국으로 남게 된다. 아켈라오는 폐위되어 갈릴리오 유폐되어 18년 죽임을 당한다. 그 후, 신약 성경에 등장한 그 유명한 빌라도(A.D. 26-36)가 유다의 총독으로 오게 된다.

 

4) 헤롯 안티파스(B.C. 4 - A.D. 39)

 

헤롯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리와 요단동편 계곡이 주어진다. 요단강 서남부지역은 로마 직할이 되어 로마에서 파송된 총독들이 통치한다. 예수님이 심문을 받을 때 빌라도가 헤롯에게 보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예수님은 갈릴리 출신이었고, 사건은 빌라도 관할인 예루살렘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예수의 심문을 피하고 싶었지만 간교한 헤롯 역시 예수를 사건이 일어난 예루살렘, 즉 빌라도에게 다시 보내 버린다. 로마의 총독이 유대를 다스리면서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로마 군인들은 성전에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고, 특히 군기를 가지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들어가려면 반드시 군기를 내려놓고 가야했다. 산헤드린 공의회도 사법권이 주어지지 않아 형집행은 로마 총독에게 위임해야 했다. 예수님이 산헤드린의 가결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당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데려가 사형을 언도해 달라고 부르짖은 것이다. 빌라도는 잔인하고 간교했다. 그는 유대인들의 항거를 폭력으로 억압하려 했으며, 그들의 종교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한 번은 갈릴리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의를 드릴 때 혁명자들로 의심하고 그들은 잔인하게 학살한다.(막 15:7, 27)

 

안티파스는 무려 43년을 갈릴리를 통치한다. 그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도시를 건설하여 티베리아(Tiberiras, 성경은 디베랴)로 부른다. 이곳은 원래 공동묘지였으나 안티파스는 무척 마음에 들어 무덤을 모두 제거하고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부정하게 여겨 싫어했다. 경건한 유대인들을 이곳에 거주하기를 싫어했고, 가까이 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안티파스는 이복동생인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삼았다. 성경은 헤로디아가 그의 친동생인 빌립으로 소개한다. 이 부분은 비평적으로 다루어져야할 부분이다. 다른 동생 헤로데가 있었는지, 아니면 빌립의 어린 시절 이름이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아마 정치적인 목적으로 그랬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냐하면 헤로디아는 헤롯 대왕과 마리암의 손녀이기 때문이며, 헤롯에게 처형당한 아리스토불루스의 딸이었다. 안티파스의 아내는 친정인 다마스쿠스 왕국으로 추방된다. 분노한 다마스쿠스 왕은 과거의 사위였던 안티파스를 공격하여 그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준다. 안티파스와 헤로디아 사이에 딸 살로메가 태어난다. 헤롯 안티파스의 생일 살로메가 춤을 춘 대가로 세례요한의 목을 요구하게 된다. 헤로디아는 간교하면서도 권력욕으로 가득했다. 그는 세례요한 비판을 넘기지 못하고 적당한 기회를 포착하고 죽인 것입니다.

 

안티파스는 세례요한으로 인해 폭동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경계했다. 비록 헤로디아의 간청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론 이번 기회에 세례요한을 죽일 수 있는 기회로 본 것이 틀림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따랐고,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강력한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세족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예수님의 활동이 알려지자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막 6:14-16) 그는 예수님의 기적을 듣고 보고 싶어 했고, 결국 마지막 심문을 받을 때도 기적을 일으켜보라고 종요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헤롯 앞에서 아무 말도, 아무 행위도 하지 않으신다. 결국 심심해진 헤롯은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낸다. 예수님은 헤롯 안티파스를 ‘여우’(눅 13:32)라 불렀다.

 

안티파스의 추락은 참으로 어이없는 것이었다. 헤로디아는 남편에게 소영주로 있지 말고 진정한 ‘왕’의 칭호를 받으라고 한다. 아마도 한 두 번 간청한 것은 아닌 듯하다. 결국 안티파스는 당시 황제였던 칼리쿨라에게 ‘왕’의 칭호를 달라고 부탁하지만 오히려 칼리쿨라의 의심을 받아 갈리아로 추방 당하고 만다.(39년)

 

5) 헤롯 빌립2세(Herod Phillip)

 

헤롯의 아들인 빌립 1세는 분봉왕이 아니다. 성경은 그가 헤로디아의 첫 남편이었고, 안티파스의 이복 동생으로 나온다. 그가 헤롯 안티파스의 이복 동생인 것을 감안할 때 아마도 그의 다른 이름은 헤로데였고, 헬로디아가 그의 아내였을 것이다. 살로메 역시 헤롯 안티파스의 딸이기보다 빌립의 딸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왜 헤롯 안티파스가 빌립의 아내를 취했으며, 빌립은 별다른 저항도 없이 자신의 아내를 형에게 주었을까? 단지 추즉에 불과하지만 안티파스와 빌립 사이에 모종의 밀의(密議)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빌립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빌립2세 역시 그다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골란 지역과 베다니 지역의 분봉왕이 된다. 그는 로마 황제의 초상을 화폐에 새긴 첫 번째 유대인 군주였다. 갈릴리 북쪽은 유대인들이 드물어 영향력이 많지 않았다. 별다른 사건 없이 그는 34년에 후손도 없이 세상을 뜬다.

 

6) 헤롯 아그립바1세(A.D.37 - 44)

 

헤롯 대왕의 손자다.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감옥에 가둔 헤롯이다.(행 12장) 예수님의 생애는 어릴 시절 헤롯 대왕, 어린 시절은 헤롯 아켈라오, 공생애 기간은 헤롯 안티파스가 있었다. 사도행전이 시작되면 아그립바 1세와 아그립바 2세가 등장한다. 누가는 그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아 충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아그립바는 로마에 머물며 칼리쿨리의 호의를 얻는데 성공한다. 칼리쿨라는 37년 그에게 필립이 다스렸던 갈릴리 북동쪽을 선물한다. 그리하여 그 지역은 다시 헤롯 가문의 수중에 들어온다. 2년 후인 39년에는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갈릴리 근방까지 아그립바에게 주어진다. 41년에는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메 지역까지 주어짐으로 다시 할아버지인 헤롯 대왕의 때의 모든 영토를 아그립바가 관활하게 된다.

 

그런데 칼리쿨라는 아그립바에게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라고 명령한다. 만약 그렇게 될 경우 죽음까지 불사한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상황까지 갈 수 있었다. 그러나 41년 칼리쿨라가 암살되고 클라우디우스가 황제로 등극한다. 다행히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동상을 세우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아그립다는 유대인들에게 적지 않은 칭송을 받았는데, 그가 경건한 유대인처럼 대부분의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가들은 그가 유대인들 앞에서만 그렇게 했을뿐 헬라인들에게는 헬라인처럼 행동했다고 서술한다. 누가는 그가 연설을 하면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아 충(蟲)으로 인해 죽었다고 말한다.(행 12장)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아그립바 2세에게 통치권이 넘어가지 못하고 시리아 식민지로 떨어진다.

 

7) 헤롯 아그립바2세(A.D.27 - 100)

 

바울을 심문한 헤롯이다. 성경은 헤롯이라 하지 않고 바로 아그립바로 부른다.(행25-26장)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며, 헤롯 대왕의 증손자이다. 정식 이름은 아르쿠스 율리우스 아그립바2세(Marcus Julius Agrippa II, A.D. 27-100)이다. 일반적으로 헤롯 아그립바 2세(Herod Agrippa II)로 부른다. 아버지 아그립바 1세가 죽었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17세였다. 로마가 그에게 아버지의 뒤를 잇지 못하게 막은 이유는 어린 나이 때문일 수도 있다.

 

50년 칼키스(Chalcis)지역의 왕이었지만 후에 갈릴리 지방의 분봉왕이 된다. 누이였던 베니게와 근친상간을 범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바울이 가이샤랴에 구금되어 있을 때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서 바울을 대면한다. 바울의 변명을 듣고 아무 죄가 없다고 선언했지만 가이사에게 호소하여 로마로 보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헤롯 가문의 마지막 왕이었다. 후에 팔레스타인을 통치하지는 못했지만 예루살렘의 성전에 관한 문제는 자신이 관할했다. 심지어 자신이 대제사장이 되어 유대인들의 미움거리가 되었다. 예루살렘 멸망후 로마에 돌아가 행정관으로 살다 100년 경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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