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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과 기고글]/국민일보

[기독교 고전 읽기] 에라스무스의 생애와 사상

by 하늘땅소망 2019.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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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고전 읽기] 에라스무스의 생애와 사상

1. 종교개혁 이전의 시대적 상황

중세에 속한 마지막 개혁주의자인 얀 후스는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하여 붙들려 화형을 당하고 맙니다. 그 후, 세계는 가을폭풍처럼 주기적인 폭동과 혁명의 조짐들이 일어납니다.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다양한 사건과 인물들이 15세기와 16세기 사이에 살았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몇 사람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동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11세가 (1409-1453, 재위 1448-1453) 1453년 숨을 거둡니다. 오스만 제국은 1453년 5월 29일 두 달간의 공성전을 통해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킵니다. 동로마 제국의 멸망은 동방의 학자들이 서로마로 망명해 가면서 수많은 성경 사본을 가져가 성경 비평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헬라어 성경도 동로마 제국의 사본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 전쟁 과정에서 프랑스의 영웅 잔다르크가 1431년 19세의 나이로 화형을 당합니다. 피렌체의 참주였던 로렌조 데 메디치가 1492년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사보나롤라역시 1498년 화염 속에서 달려갈 길을 마칩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하여 대항해시대의 정점을 찍게 됩니다. 아직 이론에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천문학에서도 혁명적 발상이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제기 됩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을 부정하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입니다. 주류를 이루었던 라틴어도 점점 학문적 용도로 한정되고 서서히 발흥하고 있던 인문주의 영향으로 고대 언어인 헬라어와 지역 언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십자군 운동과 대항해시대, 이슬람 제국의 흥황은 드넓은 세계로 눈을 돌리게 했고, 새로운 문물이 서방 세계 안으로 밀려 들어왔습니다. 전통적 봉건주의 몰락과 더불어 상업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사람들이 권력과 부를 축적해 나갔습니다. 고대 세계에 대한 갈망은 헬라어에 눈을 돌리게 했고, 지역 언어의 활성화는 성경이 모든 언어로 번역되는데 힘을 실어 주게 됩니다. 헬라어는 성경 원어에 대한 비평을, 지역 언어는 성경이 학자들이 아닌 일반 사람들이 직접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과학의 발달, 세계관의 변화, 인문주의 발흥은 중세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들입니다. 유스토 곤잘레스 교수는 종교개혁사를 서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중세가 거의 끝나갈 때쯤 수많은 개혁 주창자들은 교회의 가장 큰 오류가 다름 아닌 무지와 무식에 있다고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중세를 가리켜 ‘암흑시대’라 이름 했다. 인쇄술의 발달, 비잔틴 출신 학자들의 유입, 그리고 고전 예술과 학문 유산의 재발견을 통해 이들은 학문과 교육을 발전시켜 스스로 필요한 교회의 개혁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요한 하위징아 역시 <중세의 가을>을 마무리하며 ‘지배적인 삶의 가락이 바뀔 때, 혹은 치명적인 현세 부정의 썰물이 새로운 밀물에 길을 내주면서 상쾌한 산들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비로소 르네상스가 찾아온다’라고 말합니다. 이제 더 이상 중세는 스스로 버틸 힘을 상실했고, 서서히 일기 시작한 혁명의 바람은 온 유럽을 데우기 시작합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킬 루터와 동시대 인물이지만 종교개혁의 불이 크게 일어나도록 땔감을 준비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사제와 의사의 딸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입니다.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부르는 ‘에라스무스’로 호칭하겠습니다.

 

2. 에라스무스의 생애

1466년 또는 1469년 10월 27일 화란 로테르담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헤리트 헤리촌(Gerrit Gerritszoon)이었습니다. 1498년 5월 23일, 45세의 나이로 자신의 소명을 마친 이탈리아 개혁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죽기 32년 전에 태어납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와 동시대 인물이지만 에라스무스는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와는 확연히 다른 사람입니다. 그는 사제인 동시에 인문주의자였으며, 루터가 일어설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줍니다. 어린 시절의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에라스무스라는 이름은 가톨릭 성인으로 추앙받는 4세기의 안디옥 출신의 포르미아 주교인 에라스무스(Erasmus, ?~303)를 세례명으로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전해지는 속설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로헤 헤라트였고, 그의 어머니는 마하레트라고 합니다. 사생아로 알려져 있지만 부모가 결혼하기 전에 태어나 정식 아들로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1483년 흑사병으로 부모들은 일찍 생을 마감합니다.

어린 시절 에라스무스는 더벤터에 있는 성 레뷘 학교에서 교육을 받습니다. 공동생활형제단(the Brethren of the Common Life)의 영향을 받아 설립된 이 학교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저술한 토마스 아 켐피스처럼 그리스도를 ‘닮음’을 통해 거룩한 삶을 유지하려는 이들이었습니다. 후에 그는 당시를 기억하면 ‘야만적’이라고 표현했지만 그의 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중세에 유행했던 스콜라적 지식습득보다는 공동체 정신을 통해 관계 맺고 의지적 노력을 통해 경건을 쌓으려했던 단체였습니다. 세상과 수도원의 중간 어딘가에 속하는 반(半)세속적이며, 반(半)은둔적인 공동체였습니다.

1492년, 그는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가고 25세에 사제로 서품을 받습니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한 것이었고 결코 수도원이나 사제로서의 삶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점 교회를 비판했고, 수도원의 타락과 부정축재를 비판했습니다. 사제서품을 받고 얼마지나지 않아 캉브레 지역의 조교 비서직을 제의받고 수도원을 나갑니다. 탁월한 문학적 소양과 라틴어 실력은 주교의 비서로 일하기에 적합했고, 그 일은 앞으로 그의 삶의 향방을 결정하는 중요한 사건이 됩니다. 비서로 활동하면서 그는 마음껏 세속의 즐거움을 즐겼고, 인문학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1495년 주교의 허락 하에 파리대학의 몬테귀 콜레주에 유학을 떠납니다. 그곳은 인문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곳이었으며, 프랑스 교회개혁 운동의 중심지였습니다.

1498년에는 영국으로 건너가 앞으로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토마스 모어를 사귀게 됩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헬라어를 가르치며 시간을 보냅니다. 특별히 존 콜렛(John Colet)의 성경 연구를 접하고 적지 않는 충격을 받습니다. 존 콜렛은 옥스퍼드 마들렌 대학을 졸업했으며, 기독교 인문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이전의 전통적인 성경해석을 버리고 교부들이 행한 성경관을 점차 자신이 성경 해석방법으로 차용합니다. 세인트 폴 대학에서 성경을 가르치며 자신만의 새로운 성경해석방법을 통해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여러 곳에서 초청받아 설교한 것을 볼 때, 그는 탁월한 설교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프랑스와의 전쟁을 비난하고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키케로를 비롯하여, 어거스틴, 제롬, 크리소스톰, 이그나티우스, 락탄티우스 등 교부 문헌에 능통한 학자였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존 콜렛의 영향으로 헬라어 실력을 키우기 위해 3년 동안 영국에 머물게 됩니다. 영국에서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당시 에라스무스는 상당히 물질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고, 친구들에게 얼마라도 도움이 되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후 다시 이탈리아로 넘어가 1506년 토리노 대학을 졸업하고 베네치아의 어느 출판사에서 잠깐 동안 일을 합니다. 그는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토마스 무어의 집에 머물며 세기에 남을 한 권의 책을 출간합니다. 그의 책의 이름은 <우신예찬 (Moriae Encomium)>이며, 풍자를 통해 권위주위에 빠진 중세 기독교를 비판합니다.

1516년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을 위한 또 하나의 역작을 남깁니다. 그것은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공부했던 헬라어를 통해 헬라어 신약성경을 출간합니다. 헬라어와 라틴어를 함께 실어 기존의 라틴어 독자들도 고려했습니다. 10여 개 번역본을 참고했으며, 천 쪽이 넘을 만큼 방대합니다. 라틴어 뿐 아니라 주석까지 달아 모든 사람들이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존 콜렛의 지지와 도움이 아니었다면 완성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제들만이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다는 그릇된 성경의 독점을 타파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중세교회가 유지해온 알레고리적 성경해석 방법을 버리고, 초대교회 안디옥 학파가 지향했던 역사적-문법적 성경해석을 주된 해석방법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다시 루터와 칼뱅과 같은 종교개혁가들의 성경해석방법으로 자리 잡습니다.

에라스무스의 생애는 자신이 언급한 바, 자신이 낳은 알(종교개혁)을 루터가 부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루터가 1517년 10월 30일 95개조를 공개한 이전부터 종교개혁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의 임계점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종교로의 개혁의지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초기에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저작들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에라스무스 역시 루터의 주장들에 동조하고 동의합니다. 그러나 ‘자유의지 논쟁’이 일어나면서 둘은 갈라서고, 각자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화란출신이며 신중한 인문주의자였던 에라스무스는 광적으로 자신을 종교개혁에 불사른 루터에 대해 약간의 혐오감을 가졌습니다. 중세교회를 비판하고 조롱했지만 종교개혁으로까지 나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루터의 언행이나 행동은 거칠고 거만해 보였습니다. 에라스무스는 타락한 중세교회나 과격해 보이는 루터와도 관계를 맺지 않음으로 스스로 고립되었습니다.

결국 에라스무스는 옛 동료였던 교황 아드리아누스 6세와 헨리 8세 등의 끈질긴 권유로 루터를 반박하는 글을 쓰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믿음의 종교재판>이란 글을 출판합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사도들의 신조를 넘는 것은 잘못이며,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교리는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신학적으로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가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어떤 의도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자유의지에서만은 어거스틴과 루터를 반대했고, 세세한 도덕적 행위들에 대해서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중용과 관용을 견지했던 에라스무스는 루터로 인해 일어난 종교개혁의 물결 앞에서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릅니다. 결국 그는 개혁의 거친 물결을 피해 중세교회에 안주하지도 종교개혁에도 동참하지 못합니다. 교회사가인 곤잘레스는 에라스무스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에라스무스가 추구했던 것은 전통과 관습의 개혁이었다. 이와 아울러 온건하고 절제할 줄 아는 생활과 학문과 명상을 통해 형성된 내면적 경건, 그리고 이러한 사항들을 고무하는 교회였다.”

에라스무스는 자신이 ‘야만적’이라고 불렀던 공동생활공동체에 깊이 물들어 있었고,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순간에도 여전히 그 영향 아래 남아 있었습니다. 중세교회도 종교개혁가들도 선택하지 못한 그는 결국 양쪽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됩니다. 말년에 스위스 바젤로 돌아가 1536년에 생을 마감합니다. 그 해는 종교개혁의 거목 장 칼뱅이 프랑스에서 도피해 제네바에 머물던 시기였습니다.

 

3. 나가면서 : 업적과 영향력

루터가 종교개혁에 불을 지핀 사람이라면, 에라스무스는 불을 지피기 위한 마지막 준비를 마친 사람입니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지 못함으로 애매한 자리에 머물고 말았지만, 그는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루터의 종교개혁에 동참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기까지 합니다. 에라스무스가 남긴 업적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종교개혁이 가야할 큰 방향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사제이면서도 인문주의자였던 에라스무스는 성경을 사제들에게 빼앗아 일반 신자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가 남긴 헬라어 신약성경은 그 어떤 업적보다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성경을 해석할 때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을 기본 텍스트로 삼았습니다. 루터뿐 아니라 칼뱅과 초기 종교개혁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중세교회가 하늘처럼 떠받들던 <불가타역>의 오류를 지적하여 종교개혁가들의 개혁운동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두 번째는 역사적-문법적 성경해석법을 확장시켰습니다. 알레고리 해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과도한 상상과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는 불필요한 갈망은 그릇된 성경해석으로 이끌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존 콜렛의 영향을 받아 앞으로 종교개혁자들이 사용한 성경해석법을 만들어냅니다. 루터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에라스무스의 성경해석법의 도움을 받습니다.

세 번째는 평신들로 하여금 성경 읽기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에라스무스의 초창기 저작 중의 하나인 <그리스도인 병사의 가이드(Enchiridium militis Christiani, 1503년)>에서 스콜라철학의 무용성을 경고하고 성경 읽기에 매진하라고 충고합니다. 앞으로 전개될 종교개혁의 핵심에는 성경 연구가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의식과 신비주의에 몰입되어 지성을 도외시했던 중세와 다르게 인문주의자였던 에라스무스는 성경을 지적으로 접근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불구가 된 교인들의 무릎을 세워 스스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도록 터를 마련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관용에 대한 정신을 배울 수 있습니다. 루터의 입장에서 볼 때 에라스무스는 비겁한 존재였습니다. 나서야할 때 책상에 머무르며 숨었습니다. 만약 에라스무스가 30년 후에만 태어났어도 관용의 인물로 비추어졌을 것입니다. 분열이 아니라 화합을, 혁명보다는 개혁을 추구했던 그는 시대적 한계로 인해 비겁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 인물이기보다 중세교회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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