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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고전 읽기]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생애와 사상

샤마임 2019.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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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고전 읽기]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생애와 사상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1. 들어가면서

 

얀 후스가 사형을 당한 1415년은 중세가 서서히 몰락해 가는 시기였습니다. 중세교회는 자신들이 가진 힘과 권력으로 개혁자들의 입을 막고, 목숨을 앗아갔지만 시대의 시침(時針)은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얀 후스가 화형을 당한 후 37년이 지난 1452년 9월 21일 이탈리아에서 한 명의 개혁자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입니다. 동일한 개신교 안에서도 평판이 엇갈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모호한 평판은 그가 가진 독특한 신앙관 때문이었습니다. 개혁자였으나 종교개혁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루터와 등을 돌렸던 재세례파의 성향을 적지 않게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종교개혁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어떤 부분에서도 더 개혁적이며 성경적인 면모를 가졌습니다. 현재 사보나롤라에 대한 유일한 책은 김남준 목사가 전기형식으로 기록한 <기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있습니다. 참고하여 읽으면 좋을 책입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좋은 점만 강조했기 때문에 약간의 비평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지롤라모 사모나롤라를 이해한다면 앞으로 전개될 종교개혁 시기의 재세례파와 루터와의 갈등을 이해할 수 있으며, 왜 개혁이 아닌 혁명을 주도해야만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는 개혁이전의 개혁가이기는 하지만 교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그다지 큰 영향력을 미친 인물은 아닙니다.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의 개혁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나 다른 면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황청이 자리한 이탈리아에서 혁명적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높이 사야 합니다. 간략하게 그의 생애를 살펴보고, 그의 사상과 영향력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2. 지롤라모 사보나놀라의 생애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년 9월 21일)는 북이탈리리아 페라라(Ferrara) 공국에서 태어납니다. 아버지는 니콜로 디 미켈레 달라 사보나롤라(Niccolò di Michele dalla Savonarola)이며, 모친은 엘레나 보나콜시(Elena Bonacolsi)입니다. 사보나롤라의 할아버지인 미켈레 사보나롤라는 당대에 유능한 의사이자 정치가였습니다. 의사직을 통해 많은 돈을 축적했으며, 정치력도 적지 않았습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는 일곱 명의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납니다.

 

어릴 적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몇 가지는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당대의 명문 가문에 속했고, 부유했던 사보나롤라는 당대 최고의 학교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가 바티스타 구아리노가 운영하는 공립학교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르레상스의 강력한 영향 하에 있었던 이탈리아는 인문주의적 학문을 가르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페라라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그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기 위해 의대에 들어갈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그는 의대 진학을 포기하고 맙니다. 아마도 이때가 사보나롤라가 영적인 체험을 한 시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꿈꾸고 계획했던 부유한 삶에서 돌이킵니다.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는 그가 썼던 시들이 지극히 종말론적이고, 묵시론적 사상을 그의 글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472년에 ‘세상의 파멸’, 1475년에는 ‘교회의 파멸’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구약의 선지서들을 즐겨 묵상했던 그는 타락한 교회와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는 1475년 4월 25일 도미니카 교단의 산마르코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그의 나이 23세였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는 철저한 금욕과 세상과의 단절을 꿈꾸며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간 그는 가난과 순결과 순종의 서약을 하게 되고, 1년이 지나 정직적인 수사의 길을 걷게 됩니다. 수도원에서 성경, 논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공부합니다. 동료수도사들과 논쟁을 즐겼으며, 더 높은 학위를 얻기 위해 교수의 자격을 취득하기 위한 준비를 마칩니다. 그러나 1478년 안젤리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그의 학업은 중단되었으며, 높은 수도사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수도원의 부패와 타락에 대해 지적하자 그들이 적개심을 보인 것이 분명합니다. 다행히 1482년 다시 학업을 재개했고, 피렌체의 산마르코 수도원에서 교사로 활동하기에 이릅니다. 지역 교회에서 설교를 함께 감당 했는데, 그는 지극히 종말론적이고, 감성을 자극하는 외침에 가까웠습니다. 인문주의적 영향을 받은 청중들은 그의 큰 소리와 직설적인 설교를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사보나롤라는 북이탈리아 지방에서 순회설교자로 살아갑니다. 그의 설교는 시간이 더해질수록 인기도 덩달아 높아졌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에 매료되었습니다. 피렌체의 로렌조는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듣고 그를 피렌체로 데려오게 됩니다.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입하자 이탈리아는 대혼란에 빠져들고 미디치가의 통치는 무너져 내립니다. 침입이 있기 전 사보나롤라는 샤를 8세의 침입을 예언했고, 이것이 실현되자 사보나롤라는 수많은 대중들의 인기를 얻게 됩니다. 권력의 공백이 생긴 피렌체에서 사보나롤라는 중간계급의 지도자가 되어 귀족정치를 배격하고 신정 민주적 정치를 도입하기에 이릅니다. 피렌체를 통치한 로렌조의 죽음은 사보나롤라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탈리아를 침입한 샤를 8세과 담판하여 스스로 물러가게 했습니다. 탁월한 설교자요 예언까지 적중한 마당에 어느 누구도 사보나롤라를 무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로렌조의 죽음이후 그의 아들이 마땅히 통치자가 되어야 했지만 피렌체의 시민은 만장일치로 사보나롤라를 피렌체의 통치자로 삼게 됩니다.

 

그는 피렌체 안에서 종교개혁을 단행하기 위해 법률을 제정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신정국가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 음란물을 태우는 허영의 화형식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황 알렉산더 6세와 대립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됩니다. 교황은 사보나롤라에게 예언의 능력을 보이라며 로마로 오라고 요청합니다. 사보나롤라는 교황의 간계를 알고 청을 거절하지만 교황은 사보나롤라에게 더 이상 설교하지 못하도록 명령합니다. 사보나롤라는 교황의 명령을 거절하고 1496년 다시 렌트에서 설교를 시작합니다. 교황은 명령불복종을 빌미로 그를 파문시켜 버립니다. 피사 전쟁의 실패, 메디치가의 모략, 교황의 집요한 압력으로 인해 사보나롤라는 피렌체시로부터 사형을 언도 받게 됩니다.

 

사보나롤라와 대립했던 교황 알렉산더 6세는 그 어떤 교황보다 음란하며 악한 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돈과 권력을 통해 사람들을 매수해 교황의 자리에 올랐고, 교황청에 창녀들을 들여 음란한 파티를 즐겼습니다. 그가 사보나롤라를 극도로 혐오했던 이유 중 하나는 샤를 8세가 침공할 당시 피린체가 협력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사보나롤라의 영향으로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보나롤라는 프랑스의 샤를 8세를 ‘하나님의 칼’로 칭하며 이탈리아의 부정부패를 정화해 줄 것이라 예언한 것입니다. 교황의 치밀하고 교활한 전술과 율법적으로 억압하는 것에 진절머리가 난 피렌체 시민들은 사보나롤라에게 등을 돌리고 맙니다. 교황은 몇 번에 걸쳐 사보나롤라가 자신을 비판하는 설교를 멈춘다면 추기경의 자리를 허락해 준다며 매수했지만 거절당합니다. 사보나롤라는 교황에게 이렇게 답신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추기경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성도들에게 허락하셨던 죽음, 곧 주님을 위하여 나의 몸을 온전히 태워 번제로 드리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추기경의 붉은 모자가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의 성자들에게 주시는 순교의 붉은 피로 물든 모자를 원한다”

 

결국 사보나롤라는 모두에게 버림받아 화형을 당함으로 그의 달려갈 길을 마치게 됩니다. 그 때가 1498년 5월 23일, 그의 나이 45세였습니다.

 

3. 평가와 영향력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활동했던 시대는 중세 중에서 가장 어둡고 탁한 시대였습니다. 사보나롤라는 종교개혁의 여명이 밝아오는 마지막 어둠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중세교회가 여명의 시간을 거꾸로 돌리려 하는 동안 그들이 막을 수 없는 한 인물은 이미 태어나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마르틴 루터였고, 사보나롤라가 꿈꾸었던 진정한 개혁을 이루어냈습니다. 루터는 사보나롤라를 ‘개혁의 선구자’(forerunner of the Reformation)라는 별명을 주었다고 한다. 비록 교리적으로는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앞으로 종교개혁가들이 이루고자했던 도시 상을 만들었습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신정정치는 구약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이러한 운동은 19세기가 넘도록 이어질 것입니다. 중세교회의 타락은 두 길을 요청합니다. 한 길은 중세교회를 개혁하여 보존하려는 길이며, 다른 한 길은 기존의 교회를 포기하고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만드는 길입니다. 중세교회를 보존하려는 길을 걷는 사람들은 가톨릭 자체 개혁 운동을 이끌게 됩니다. 트렌트 종교회의와 로욜라를 중심으로 한 반종교개혁(Contrareformatio) 운동이 바로 그 길입니다. 루터와 칼뱅을 중심으로 일어난 종교개혁은 중세교회의 개혁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게 됩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개혁 운동은 양 극단이 갖는 개혁 운동의 성향을 동시에 가지면서 중세교회가 자체적으로 개혁할 수 없다는 한계를 보여주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를 즐겨 읽고 설교했던 사보나롤라는 금욕과 순종을 철저하게 요구했습니다. 중세교회의 타락에 신물이 난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사보나롤라를 환영하지만, 방종의 타성에 젖어 결국 사보나롤라를 배신하게 됩니다. 결국 중세교회는 스스로 개혁할 의지를 포기하고, 자멸의 길을 걷게 됩니다.

 

사보나롤라가 시뇨리아 광장에서 처형된 384년 후인 1882년 피렌체시는 시 창설 5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동상을 세웁니다. 1901년 5월 22일, 피렌체시는 사보나롤라가 사형당한 자리에 청동기념 기념메달을 광장 바닥에 만들어 헌정합니다. 그곳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498년 5월23일, 이곳에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수도사가 도미니코 수도사 및 실베스트로 수도사와 함께, 부당한 판결로 교수형을 받은 뒤 화형에 처해졌다. 4세기 후 추모의 뜻을 담아 이 기념비를 세운다.”

 

시뇨리아 광장에 세워진 사보나롤라의 동상과 메달은 비록 사보나롤라가 죽었지만, 그의 정신은 죽지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중세교회의 세례요한으로 불렸던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는 마지막 중세교회의 개혁자로 일어났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과격한 성격과 엄격한 율법적 금욕주의는 그를 죽음으로 더욱 급히 미끄러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무엇보다 사랑했고, 온 나라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기를 원했던 그의 열정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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