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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칼럼 모음

샤마임 2019. 4. 18.

고난 주간도 벌써 중반을 넘어섰습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성만찬을 하는 시간입니다. 성경상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붙들려 대제사장에게 심문받습니다. 금요일 오전은 빌라도에게 넘겨지고, 결국 십자가 형에 처해집니다. 오후가 되면 주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압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은 부활은 새로운 시대를 가져올 것이고, 새로운 삶을 선물로 줄 것입니다. 그동안 써온 부활절 칼럼을 한 곳에 모았습니다.

 

-부활절 침공


안식 후 첫날,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장사되신 무덤을 찾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무덤에 계시지 않았다. 왜일까?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천사들이 여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질문한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에 천사들의 믿기지 않는 의아함이 담겨있다. ‘어찌하여’는 도무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다. 여인들이 예수님을 찾아 무덤이 온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여인들은 왜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것일까? 천사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들이 과연 예수님의 말씀을 잊은 것일까? 아니다. 그녀들은 알고 있었고 잊지 않았다. 그러나 믿지 못한 것이다. 내일 비가 온다고 일기예보를 했다고 치자. 누가 우산을 들고나가겠는가? 일기예보를 신뢰하는 사람만이 들고나갈 것이다.

부활절은 단순한 하나의 기적이 아니다. 부활절은 거대한 전쟁이요, 반전이다.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사망과 어둠의 세력을 뒤집어 업고, 사단의 문을 깨부수는 부활절 침공인 것이다. 부활절은 지금까지 죄와 사망에 매여 종노릇 하는 인류의 역사를 생명과 능력과 치유와 회복의 역사로 회복시키는 기적인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더 이상 무덤-죽음의 영역에 계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활절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신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요. 아무도 상상하지도 못한 놀라운 반전인 것이다. 인류 역사 중에서 가장 위대한 반전이 바로 부활절인 것이다. 오늘 그 부활절을 체험하라


-헛수고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수근 거렸다.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갈 것이라는 유언비어(流言蜚語) 때문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모의(謀議)로 예수를 죽였기에 더욱 긴장했다. 그가 다시 살아난다는 생전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무리를 지어 빌라도에게 가서 초병을 보강해달라고 청원했다. 빌라도는 너희에게 있는 군사로 지키라고 했다. 군병들은 아무도 시체를 훔쳐가지 못하도록 철통 경비를 섰다.



안식일이 지나고 여명(黎明)의 빛이 은밀하게 무덤을 비추기 시작하자 땅이 흔들리며 천사가 내려와 무덤을 덮었던 돌을 밀어내 버렸다. 초병들은 그 광경을 보고 숨도 쉬지 못하고 경직되고 말았다. 무덤에서 시체가 사라진 것이다. 후에 달려온 유대 지도자들은 초병들에게 돈을 주어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거짓말을 퍼뜨렸다.


헛수고! 그것은 헛수고다. 몇 몇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부활하신 주님은 친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아담 이래로 죄와 사망이 지배하던 역사를 전복시켰다. 의(義)와 생명의 역사가 지배하는 역사로 바뀌었다. 헛수고하지 말아야 한다. 결국 예수는 부활하셨다. 거짓과 술수로 진실을 막으려 하는 헛수고는 말아야 한다.


사단의 머리는 산산이 부서졌다. 죄와 사망의 권세는 힘을 잃었다. 영원한 생명과 영광이 지배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 것이다. 부활절 아침에 소망의 노래를 부르자.

 

-보라 새것이 되었다


인류의 역사는 필연의 역사다. 필연은 반드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운명은 바꿀 수 없다. 운명을 거스르면 반드시 죽음이 뒤따라온다. 불행하게 인류의 운명은 ‘죽음’이다. 세월 앞에 장사 없듯, 죽음 앞에 빈부귀천이 없다. 어느 누구든 죽어야 하고, 죽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 죽음은 인간의 운명을 지배했고, 죽음으로 인해 역사는 깊고 어두운 밤이 되었다.


부활절은 지금까지 죽음으로 운명 지워진 역사의 필연에 전쟁을 선포한다. 생명이란 새로운 필연의 역사를 만드는 전쟁이다. 2차 세계대전 때에 나치의 승승장구에 쐐기를 박은 노르망디 상륙잔적처럼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낸 침공이다. 부활절은 죽음의 역사를 생명의 역사로 전복시키는 날이다. 사망과 죽음이 지배하는 역사에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생명의 역사로 창조하는 날이다.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산다고 선언한다. 그렇다. 십자가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며, 인류의 죽음을 상징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 사흘 후 주일 새벽 주님의 부활은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사망의 위협에 겁먹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오늘 다시 살아났다.


부활절은 사탄에게 치명적 패배를 안겨준 전쟁선포이자, 승리의 시작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계속 이기고 또 이길 것이다. 죽음은 성도들에게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우리의 일상은 죽음의 역사가 아니라 생명의 역사이며, 새로운 창조의 시간들이다. 아무리 동장군(冬將軍)이 강하다 해도 봄처녀를 이길 수 없듯, 죽음이 아무리 강해도 생명을 이길 수는 없다. 오늘은 부활절이다. 우리 안에 머물고 계시는 생명의 능력을 맛보고 능력의 삶을 살아가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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