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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독서편지

[독서편지] 16. 데칼로그

by 하늘땅소망 2019.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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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내에게 쓰는 독서 편지

16. 데칼로그

김용규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기다리던 봄이 왔습니다. 삭막한 거리는 화사한 미소로 가득하고, 갈색의 산은 연초록 옷으로 산들거립니다. 계절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정하신 법칙이며, 해년마다 거르지 않고 주시는 선물입니다. 추위를 유난히 싫어하는 저는 봄은 여름 가을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겨울을 주심으로 봄의 환희를 허락하십니다. 봄이 아름다운 건 당신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은 존재론적 판단에서 오는 것이기에, 봄이 아닌 내 안에 내재된 가치 기준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며칠 전 당신은 제게 하나님은 누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하나님을 향한 질문이기보다는 우리가 살아내는 삶에 대한 질문이라 생각합니다. 삶이 투명하지 않고, 명확하지 않을 때 우린 고민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언제나 고통 안에서 존재를 인식하고, 아픔과 함께 삶의 의미를 묻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존재케 하고, 삶을 부여한 하나님께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이런 삶을 허락하시는지, 왜 불평등한 관계를 살아가게 하시는지 묻게 됩니다.

 

오늘 당신이 추천해준 김용규 교수의 <데칼로그>를 읽으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십계명은 지금까지 제가 읽었던 교리적인 십계명 해석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곳에서는 이성적 수긍은 가능했지만 감성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김용규 교수의 통찰은 지금까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인간의 본성에 대해 고민하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결국 사랑이라는 저자의 결론은 계명의 핵심은 잘 짚어 주었습니다. 주님도 그렇게 결론 내렸으니까요. 하지만, 마직 결론에 다다르기까지 저자와 함께 걸었던 여정은 창조에서 종말까지 이어지는 성경의 역사를 아우르고 있었습니다. 분명 열 가지 계명이었지만, 마지막 장에 이르렀을 때에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아마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가 있다면 존재일 것입니다. 덧붙여 십계명을 해석함에 있어 존재론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존재론적 사유로 응답해야겠죠. 철학과 신학을 함께 전공한 탓인지 저자의 단어는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이지만 그 의미들을 명확하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어려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쉽게 풀어내는 저자의 화법에 놀랐습니다. 당신의 말대로 곁에서 속삭이듯 들려주지만, 듣는 저는 그것을 담아내기에 너무 좁은 인지의 그릇을 가진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마지막까지 읽었을 때, 다행스럽게도 앞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 같은 환희를 맛보았습니다. 통합, 맞습니다. 통합니다. 통합을 이룬 뒤 통섭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기에 턱없이 빈약한 지적 능력이 아쉽기만 합니다.

 

저자는 서두에서 십계명을 허락한 신을 존재’(45)로 해석합니다. 출애굽기 3:14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에흐에 아세르 에흐예로 소개합니다. 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헬라어의 에고 에이미와 같은 의미를 지닌 나는 있다’, 또는 나는 존재한다로 번역합니다. 이 단어에서 야훼가 나왔고, ‘여호와라는 말도 나오게 됩니다. 나아가 저자는 십계명의 본질을 하나님께서 허존재의 자유로 선포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십계명은 필연적으로 존재론적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존재론적 해석은 존재론적 사유를 요구하고, 존재론적 사유는 존재론적 이해를 전제합니다. 하나님은 존재그 자체이니까요.

 

존재, 참으로 쉽고도 어려운 단어입니다. 존재와 존재하는 것의 차이를 하나님과 피조물로 구분하지만, 아직 저로서는 그러한 구분이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존재는 곧 존재하는 것이라는 저의 생각은 저자의 담론을 따라잡기는 역부족인 듯합니다. 일단 저자의 전제는 따라 계속 나아가 보겠습니다.

 

철학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 얻어진 것이고 기독교는 계시로써 주어진 선물’(63)입니다. 철학이 이성을 통한 논리적 사유의 결과물이라면, 기독교는 절대 타자이신 존재이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철학함은 이성을 필요로 하지만, 계시는 믿음과 순종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테르툴리아누스의 선언은 불가해한 신에 대한 인간의 불가피한 답변이었는지 모릅니다. 마치 욥이 하나님의 질문에 아무 답도 하지 못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답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모든 것을 인간의 인지의 한계로만 핑계한다면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할 필요도 없으며, 문자 너머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뜻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러한 불가해하고 모순적인 계시를 이해하기 위해 교부들이 철학의 손을 빌어 이해하려고 몸부림쳤다고 말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현대 학자들이 이중적 논법또는 양립주의라고 부르는 방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극단의 반대를 일치시킴으로 더 탁월한 의미’(65)를 얻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적 사유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왜냐하면 하나님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존재물인 인간이 어찌 존재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철학이 아무리 무한자, 일자, 완전자를 설파 한다한들 그것이 하나님을 완벽하게 이해하도록 이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면서 계명이 아닌 자신을 먼저 소개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20:1-2)

 

저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해방하여 자유를 부여하는 해방자’(139)로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해방자입니다. 애굽의 억압으로부터, 우상들로부터 해방시켜 자유를 선물로 주신 분입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주님께서 선포하셨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와 같은 맥락입니다. 저는 이 자유라는 단어에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외쳤던 바울의 외침이 들립니다.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래서 말인데. 저는 십계명을 시작하면서 하나님 자신을 선언한 부분에서 해방보다는 너의라는 관계론적 의미에 마음이 갑니다. 자유를 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것이죠. 저자는 십계명을 존재론적으로 풀어가지만, 제가 십계명을 쓴다면 관계론적으로 풀어가고 싶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 두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 간의 관계로 말입니다. 이러한 접근법은 주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말씀과 잘 들어맞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에 저자도 십계명의 결론을 내리지 않던가요.

 

그렇습니다! 본문에서 수차 확인했듯이, 사랑은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는 인도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종교적 삶을 이끌고, 이웃 사랑이 도덕적 삶을 이끌어 구원에 이르게 하지요. 그러나 본문을 통해 이미 살펴본 바에 의하면 예수 이웃 사랑이라고 요약한 계명들은 인간의 탐욕의 노예가 된 상태에서 벗어난 때에만 비로소 지킬 수 있는 것들입니다.”(578)

 

이 글을 읽으니 문득, 처음 당신이 했던 질문이 생각나네요. ‘하나님은 누구실까?’라는 물음이요. 가슴으로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일단 성경적으로 답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자유를 주시는 분이다라고 답해도 될 것 같습니다. 너무 급하게 답을 내렸나요? 일단 우리는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우상은 뭘까요?

 

우상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삶을 살펴보고 싶네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은 현재 우리의 삶이 우리의 상식과 이성으로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대하고, 상상하는 세계는 악인의 패망과 의인의 성공입니다.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난은 받지 말아야 한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 아프게도 저 사람은 잘될 수 없는데 너무 잘 되고, 또 다른 사람은 형통해야 하는데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혼돈스럽고, 어지럽습니다. 이러한 현실의 모순과 아이러니는 모든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십계명은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자유의 아들 삼으신 양자 삼음이자, 처녀 이스라엘을 아내 삼으신 결혼식입니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우상은 무엇일까요? 아버지 되시고, 남편 되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무엇을 찾는 것이 아닐까요?

 

저자는 신이 아닌 것을 마치 신처럼 믿고 의지하면 그것이 곧 우상’(168)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저는 좀 더 다르게 접근하고 싶습니다. 저자는 7계명을 다루며 쿠피디타스를 언급합니다. 쿠피디타스는 스스로조차 결핍된 존재로부터 자신의 결핍을 보충하는 욕망’(379)입니다. 결핍,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은 철저히 종교적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은 관계적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과, 삶으로는 이웃과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다르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함께 사랑합니다. 요한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과 이웃,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우상이 무엇일까요? 저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이용하는 것을 우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에리히 프롬의 <존재나 소유냐>는 소유보다 존재가 앞선다고 말합니다. 타자를 존재론적으로 대하지 않고 소유의 대상, 즉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대할 때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저자는 분명 여섯 번째 계명인 살인하지 말라존재론적 살인을 금지하는 계명’(333)이라고 말했습니다. 살인은 존재론적 소외에서 일어난 불안과 타자에 대한 부정에서 일어납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근원적이고 원시적 불안이 타자에 대한 적의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불안은 카뮈의 <이방인>에서 보여준 이유 없는 살인에서 잘 그려져 있습니다. 삶에 대한 권태, 무기력함, 알 수 없는 삶의 무의미의 근저에는 소외가 자리합니다.

 

우리는 압니다. 이 소외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아담이 후손들에게 물려준 저주라는 것을. 그래서 살인이란 존재론적으로 보면 소외에 불과하’(317)다고 주장하는 저자의 말에 충분히 공감합니다. 우상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관계를 대체하려는 욕망입니다. 그 욕망은 역동적 살인충동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허무로 인한 자살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모든 관계를 수단화시키는 이기주의적 탐욕도 살인의 한 모습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2계명인 우상숭배에 대한 금지는 나머지 모든 계명의 핵심이자 전제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안식일도 탐욕에 대한 절제이며, 부모 공경과 살인, 간음, 거짓 증거, 이웃의 것을 탐하는 계명 역시 우상숭배의 다른 양상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린 다시 첫 계명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 그렇습니다. 그 계명에서 모든 계명이 시작되었고, 그 계명을 전제로 모든 계명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저의 이러한 추측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저자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계명은 결국 궁극적인 단 하나의 계명 곧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로 요약됩니다. 이때 다른 신이란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각종 우상에 불과하고, 나머지 아홉 계명은 단지 제1계명에 대한 순차적이고 구체적인 부연 설명에 불과하지요.”(578)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벌써 자정이 가까워 옵니다. 하루 종일 책을 읽고, 독서 편지를 쓰고 나니 시간이 이렇게 흘러 가버렸습니다. 거리는 봄날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싶은 벚꽃의 화려한 추락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제 곧 여름이 시작되겠죠. 그러면 또 한 계절이 가고, 또 한 계절이 올 겁니다. 태어난 처음 맞이하는 대구에서의 봄, 대구에서의 여름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모순과 아이러니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러나 지구는 성실하게 자전과 공전을 합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십계명을 깊이 고민하며 읽었습니다. 언젠가는 한 번 읽어야지 했던 것이 당신으로 인해 읽게 되어 기쁩니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변화되는 것을 생각해 보니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저희에게 언제나 성실한 사랑으로 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난제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도 없고, 인정하기도 싫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은 왜 보고만 계십니까? 왜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대답도 하지 않으시고, 철을 바꾸시고, 계절을 이어갑니다.

 

십계명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 안에 있는 수많은 부모 거역과 살인과 간음, 거짓 증언과 탐식으로 인한 악들이 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계명을 주실 리가 없겠죠.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라고 말이죠. 너를 고통스러운 애굽에서 불렀고, 아들 삼았고, 아내 삼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내가 너를 책임지겠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후우카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모르실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린 여전히 내일을 알 수 없는 하루를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부디 우리 안에 평안한 마음을 허락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틀 전부터 자꾸 어지럼증을 호소하는데 마음이 무겁습니다.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부족한 저를 만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디 은혜 주시기만을 기도할 뿐입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사랑하겠습니다.

 

 

   
저자 : 김용규  | 출판사 : 포이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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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은 궁극적 자유, 곧 존재의 자유를 부여하는 선언이다!★★★성염(전 주駐교황청 대사), 김기석(청파교회), 이현우(러시아문학 연구자) 추천!두 돌판에 새겨진 3,300년 전의 계명이 현대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서양철학의 존재론 전통 위에서, 십계명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담은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 〈데칼로그〉를 매개 삼아 십계명을 새롭게 해석해낸 역작. 2002년 출간되어 국내 지성계의 감탄과 환호를 불러온 《데칼로그》의 전면 개정판! “십계명은 인간이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지요. 그것은 애굽에서 종으로 살던 자신의 백성들을 해방시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자유롭게 살게 한 신이 이번에…[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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