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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고전읽기] 하나님께 이르는 영혼의 순례기, 보나벤투라

샤마임 2019. 4. 2.

[기독교 고전읽기] 하나님께 이르는 영혼의 순례기

보나벤투라

 

 

들어가면서

 

올 초에 시작된 중세 고전이 벌써 16번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수도원과 수도 규칙, 토마스 아퀴나스와 안셀무스, 둔스 스코투스와 베르나르를 다루었습니다. 지난번에 이어 오늘도 중세에서 빠질 수 없는 신비주의자인 보나벤투라를 다룹니다. 다음 편에서는 요셉 퀸트가 편역한 에크하르트의 <신적 위로의 책>과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마지막으로 중세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아직 다루어야 할 인물이 적지 않지만 개신교인들은 지금까지 다룬 중세 인물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종교개혁자들의 세계로 들어갈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보나벤투라와 에크하르트는 중세 신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앞으로 일어날 종교개혁의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들의 영향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중세의 신비주의는 종교개혁자들에게 새로운 ‘신비’의 의미를 묻게 할 것이고, 그로 인해 중세의 신학은 서서히 몰락의 길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보나벤투라의 <하나님께 이르는 영혼의 순례기>는 삼위일체적인 영적 상승론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문법적 역사적 성경을 따르는 안디옥 학파와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자들에게는 중세의 신비주의는 알레고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수용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 중세가 지극히 타락했으며, 영적 난맥상 시대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며, 보나벤투라의 신비주의 사상은 현실도피적인 정서가 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에 깊이 관여한 그의 사상 자체를 신비주의로만 한정 지을 수 없습니다. 그는 알레고리적 해석을 통해 당시의 성경 해석의 흐름을 주도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제 그가 주장하는 하나님께 이르는 영혼의 여정을 살펴봅시다. 누멘출판사의 <하나님께 이르는 영혼의 순례기>를 참고했으며, 용어는 개신교적으로 수정하여 요약합니다. 요약은 저의 개인적인 사견을 따라 자의적으로 했습니다.

 

서론

 

이 책은 보나벤투라를 세라핌(Seraphim) 박사로 불리도록 한 책입니다. 영혼의 순례기는 성막의 성전을 테마로 하여 지성소에 이르는 여섯 단계를 설명합니다. 두 날개를 가진 케루빔(지품천사)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합니다. 세라핌은 여섯 날개를 가지고 하나님을 보좌합니다. 한글 성경은 그들을 ‘스랍’이라고 부릅니다.(사 6:2) 이사야는 스랍들은 하나님을 모시고 있으며, 여섯 날개를 가졌다고 보고합니다. 후에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여섯 날개를 가진 천사가 등장합니다.(계 4:8) 이들 역시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프란체스코와 보나벤투라는 세라핌(스랍)에 의해 상흔을 갖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보나벤투라는 성막을 기준으로 앞의 두 단계는 앞뜰에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그다음은 성소로 셋째와 넷째 단계입니다. 마지막 지성소는 다섯째와 여섯째 단계를 말합니다. 마지막 단계인 지성소에 두 케루빔(그룹)이 있고, 법궤와 법궤 안에 십계명을 기록한 돌판이 존재합니다. 보나벤투라가 말하는 하나님께 이르는 영혼의 여섯 단계는 성막의 이동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요약]

 

하나님께 이르는 영혼의 순례기에 부치는 머리말

 

모든 빛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나는 제일원리인 하나님께 간구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낳으신 동정녀 마리아와 우리의 사부이신 복된 프란체스코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밝은 눈을 주시기를 간청한다. 세라핌의 여섯 날개를 조명의 6등급 또는 6단계 또는 6가지 길로 이해하는 것은 옳다. 이 책을 통해 문체보다는 말의 의미를, 우아함보다 진리를, 박식한 지성보다 연마된 정감에 주의하길 부탁한다.

 

1. 하나님께 이르는 단계와 우주 속에 나타난 그분의 흔적을 통하여 그분을 관상함에 대하여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우리는 아무 거도 이룰 수 없다. 눈물의 골짜기를 통해 간구할 때 하나님은 응답하신다. 그러므로 기도는 위를 향한 모든 활동의 원천이시며 근원이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이르는 단계를 알 수 있도록 조명 받는다. 광야의 사흘 길은 창조의 사흘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삼중적 실체, 즉 신체적 실체와 영적 실체, 그리고 신적 실체와 대응한다. 이것은 세 단계이다. 그러나 세 단계를 다시 여섯 단계로 늘여야 한다. 하나님은 육 일 동안 창조하고 쉬셨기 때문이다. 여섯 단계는 감각, 상상력, 이성, 지성, 예지, 영혼의 절정이며, 마지막 양심의 불꽃의 단계이다. 이러한 단계를 통해 최하위에서 최상으로 단계로 올라간다.

 

2. 이 감각 세계 속에 나타난 그분의 흔적들 사이에서 하나님을 관상함에 대하여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드러낸다. 모든 피조물은 육체적 감각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으로 들어온다. 천사는 천상의 영적 실체로 비 신체적 실체들이다. 그들은 구원받을 이들에게 봉사한다.(히 1:14) 피조물은 흔적이요, 조상(彫像)이요, 우리에게 관람하도록 제시된 상연 작품이고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표적이다. 그러므로 감각적 세계의 피조물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상징한다.

 

 

3. 자연적 증력에 각인된 그분의 형상을 통하여 하나님을 관상함에 대하여

 

지금까지 언급한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 안에 자신을 비추신 흔적을 통해 하나님을 본다. 이제 세 번째 단계로 들어서야 한다. 바깥뜰을 지나 성소에 드러나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영혼은 자체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을 기억을 통해 안다. 영혼은 기억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고, 하나님께 참여한다.

 

지성은 비추는 빛을 인식한다. 그 빛은 ‘참빛’이며,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던 빛’(요 1:1,9)이다. 지성은 추론을 통해 참으로 파악한다. 올바른 이성으로 사유하는 자들의 불빛은 진리를 향해 나아가고자 애쓴다. 갈망은 최대의 매력을 가진 것을 향한다.

 

4.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은총의 선물을 받고서 그분의 형상 안에서 하나님을 관상함에 대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통해서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제일원리를 관상한다. 네 번째 단계인 이것은 극소수의 사람만이 자신 안에서 제일원인을 본다. 환영에 사로잡히고, 육욕에 현혹된 영혼은 잘못된 방향을 잡는다.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 가는 사닥다리가 부러졌다. 주님은 그것을 회복시키신다. 우리가 그분을 믿고 사랑할 때 그 문에 갈 수 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낙원에 들어간다.

 

첫 번째 세 단계는 인간 정신 안에 있는 본성에 관계되고, 다음 셋은 개인적인 노력에, 마지막 셋은 은총에 관계된다. 영혼은 관상 가운데 천상의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 성경은 우리가 정화되고 가르치도록 지도한다. 비유적 의미는 성실한 삶을 위하여 정화해주고, 우의적 의미는 분명한 이해를 밝혀주며, 상징적 의미는 정신적 황홀경과 지혜의 즐거움을 통하여 완성하다.

 

5. 그분의 일차적인 이름인 존재를 통하여 한 분이신 하나님을 관상함에 대하여

 

우리는 우리의 안팎에서만 아니라 우리 위에서도 하나님을 관상할 수 있다. 우리 밖에서는 흔적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는 형상을 통하여, 우리 위에서는 우리 정신의 위를 비추는 빛을 통하여 인식한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의 빛이다. 첫째 방식에서 연마한 사람들은 이미 성막 뜰에까지 들어간 사람들이다. 그러나 둘째 방식으로 노력한 사람들은 이미 성소에 이른 사람들이다. 마지막 셋째 방식으로 들어간 사람은 대제사장과 함께 지성소 안으로 들어선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로 모세에게 계시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셨다. ‘스스로 있는 자’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하나님은 존재이시다. 무에서 아무것도 나올 수 없다. 존재 자체가 자신을 통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도대체 자기 자신으로부터 존재하겠는가? 그러므로 존재는 영원하고, 측량할 수 없고, 제일원리다. 존재는 변할 수 없다. 존재는 만물의 보편적 능동인과 형상인과 목적인일뿐만 아니라 존재 근거와 인식 근거와 삶의 규범이기도 하다.

 

6. 그분의 이름인 선하심 안에서 가장 복되신 삼위일체를 관상함에 대하여

 

이제 지성의 눈을 성삼위일체께 돌리자. 선 자체는 발현하는 것을 관상하기 위한 제일 중요한 기초를 제공한다. 최고선은 가장 완전하게 자신을 확산한다. 우리가 지성의 눈을 가지고 선의 순수성을 볼 수 있다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가 선의 최고인 것을 안다. 최고선의 확산은 최고 전달성이며, 최고의 동일 본질이며, 최고의 동형성이며, 동일 영원과 동일 친밀성을 가진다.

 

케루빔들은 서로 마주하며, 속죄판에 얼굴을 마주한다.(출 25:20) 이로 인해 신비를 감춘다. 그 신비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주 그리스도 안에서 제일원리가 최후의 원리와 결부된다. 하나님이 여섯째 창조한 인간과 결부되며, 영원한 것이 시간의 충만 속에서 동정녀에게 태어난 인간과 결부된다. 절대적인 하나와 전체적인 것이 복합되고 타자와 구별되는 개별자, 즉 인간 예수 그리스도와 결부된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고양되며 참 인간성을 본다.

 

7. 지성은 안식을 취하나 정감은 완전히 하나님께로 건너가는 신비적 탈혼 상태에 대하여

 

지금까지 여섯 가지는 케루빔의 여섯 날개와 같다. 여섯 날개로 영혼은 초월적인 지혜의 빛으로 가득 차서 참된 관상을 위해 날아오를 수 있다. 영혼은 엿새 동안 단련해야만 비로소 안식일에 쉬게 된다. 우리의 영혼을 자기 밖에서는 그분의 흔적을 통하여, 흔적 안에서, 자신 안에서 그분의 형상을 통하여, 형상 안에서 자기 안에서 하나님을 인식 가능하다. 마침내 여섯째 단계에 이르러 제일 원리이고 최상의 원리이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딤전 2:5)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을 관하게 된다.

 

속죄판을 바라보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바라봄으로 모든 죄와 사망으로부터 넘어간다. 프란체스코는 관상적 탈혼 상태에서 하나님의 속에 건너가 완전한 관상의 모범이 되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과 같다. 이러한 건너감이 완전해지려면 모든 지성적 작용은 포기되고, 정감의 절정은 완전히 하나님을 향하여 전이되어야 하며, 하나님 안에서 변형되어야 한다. 그러나 열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성령의 불이 그 속에서 타오르는 자만이 열망한다. 우리의 염려와 정욕과 망상을 잠들게 하라. 그리스도는 그분의 쓰라린 고난의 열정으로 불을 붙이신다. 그리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자. 영원한 하나님, 주를 영원히 찬양할지어다. 아멘.

 

하나님께 이르는 영혼의 순례기를 마치다.

ITINERARIUM MENTIS IN DEUM

 

나가면서

 

보나벤투라의 <하나님께 이르는 영혼의 순례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아퀴나스의 동료이면서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보나벤투라의 글은 중세 신비주의의 극치를 이룹니다. 안셀무스과 아퀴나스가 철학적 사유하심을 통해 이성적으로 하나님을 논증했다면, 보나벤투라는 이성을 버리지 않지만 뛰어넘어야할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이성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을 하류로 보았고, 관상의 마지막 단계를 일곱 번째 ‘양심의 불꽃’의 단계로 보고 하나님이 안식하듯 영원히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관상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것이란 인간 지성의 온갖 통찰을 넘어 있는 것이며, 피조물 안에서는 그와 비슷한 것을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p.103)

 

보나벤투라의 이러한 신앙관은 플라톤적 이데아 세계를 하나님의 영적으로 실제하심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물질과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다르며, 물질은 하나님을 보여주지만, 마지막 단계에서인 ‘정감의 절정(apex affectus)을 통해 하나님과 합일하여 완전한 안식의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중세 신학이 낯선 저로서는 보나벤투라는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번역 자체도 라틴어를 직역한 듯 딱딱하고 비문처럼 보이는 곳이 적지 않습니다. 성막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여섯 단계를 설정하고, 마지막 단계에서 육일의 창조 이후 칠 일째 쉬었던 것처럼 완전한 단계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보나벤투라의 해설은 성경이 분명 존재하지만 바른 성경 해석이할 수는 없습니다. 과도한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을 통해 성경이 말하지 않는 의미까지 찾아갑니다. 그러나 현대의 피상적 신앙과 다르게 하나님을 열망했던 열정을 우리는 배워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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