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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독서편지

[독서편지] 15. 성도의 교제

by 하늘땅소망 2019.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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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내에게 쓰는 독서 편지

15. 성도의 교제

본회퍼 / 대한기독교서회


 

성도의 교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드디어 오늘 모두 읽었습니다. 그러나 오늘까지 독서편지는 완성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읽는 것도 힘들었지만 이 책을 정리하는 것은 더욱 힘들기 때문입니다. 본회퍼라는 거대한 산의 작은 봉우리를 넘은 것 같아 미미하지만 기쁨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난감합니다. 이 책은 본회퍼의 교회론을 이해하지 않고는 접근하기도 힘든 책이라는 점에서도 결코 얕잡아 볼 수 없습니다.

 

시대마다 교의학적 관심 주제는 달랐습니다. 초대교회 이후, 교회는 이단으로부터 진리를 수호하고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예수는 누구인가?’에 집중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암송하는 사도신경은 초대교회가 결의하고 완성한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의 결과물이었음을 압니다. 니케아-칼케톤 신조는 아직도 변함없이 정통 교리이며, 성경에 근거한 가장 진리에 가까운 신앙고백인 것을 압니다.

 

그 후, 교회는 참된 진리에서 멀어져 타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저는 중세 교회를 타락이란 말보다 퇴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를 좋아합니다. 중세 교회의 타락은 그 기저에 교리의 타락, 말씀에 대한 순수성의 결여가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루터가 지핀 종교개혁은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의 교리 개혁 운동의 필연적 산물이었습니다. 교회의 타락은 교리의 타락이기에 종교개혁은 교회의 개혁이자 교리의 개혁이었습니다. 종교개혁 시기에 가장 핵심을 이룬 논쟁은 바로 구원은 무엇인가?’였습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5가지 솔라의 핵심에는 구원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오직 은혜로(Sola Gratia)’ 구원받고,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구원에 이르며, ‘오직 믿음으로(Sola Fide)’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가 들이 왜 구원론에 집착했을까요? 이유는 너무나 극명(克明)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만들어 놓은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이 가톨릭교회가 만든 온갖 장애물로 인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종교 개혁가들은 성경이 밝히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신자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러한 선언은 인간의 만든 모든 그릇된 전통을 타파하고 순수하게 십자가만을 바라보도록 신자들을 이끕니다.

 

시간은 흘러 다시 교회는 새로운 위기를 맞이합니다. 그것은 참된 교리는 있지만 삶은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삶이 없는 교회, 순종하지 않는 신자는 과연 참된 그리스도인인가? 라는 질문은 성령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킵니다.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을 비롯하여 18세기에 영국과 미국을 뒤 흔든 대각성운동, 그리고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오순절 운동들은 모두 성령에 대한 괌심들입니다. 성령론은 하나님을 알지만 순종하지 않는 신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갖고 있지만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신자들에게 도전합니다.

 

그럼 현대의 신학자들은 어떤 주제에 관심을 가질까요? 아이러니 하게도 교회론입니다. 왜 교회론에 관심을 가질까요? 어쩌면 교회론에 대한 관심은 초대교회로의 회귀(回歸)가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 안에 존재하는 모순과 죄, 교회라는 거룩한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온갖 악을 행하는 무리로 전락해 버린 교회를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진정 꿈꾸고 설계하신 교회는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 교회에 대한 관심을 증폭 시켰다고 생각합니다. 본회퍼 신학의 핵심은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가 읽었던 <나를 따르라><신도의 공동생활>의 핵심은 역시 교회입니다. ‘나를 따르라가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에 집중한다면, ‘신도의 공동생활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두 책들은 마지막 부분에서 공동체라는 핵심 주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재차 확인합니다.

 

이 책은 본회퍼의 박사학위 논문이자 최조의 교회에 대한 진지한 연구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사회학에 대한 교의학적 연구>라는 부제가 책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을 공포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딱딱한 교리 서적에 흥미를 가진 저로서도 이 책은 마음에 큰 돌을 얻어 놓은 무겁게만 다가옵니다. 며칠 동안 책을 정독하며 읽었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서도 저자의 의도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부록으로 추가된 편집자 후기는 한 편의 난해한 논문처럼 더욱 혼란에 빠뜨립니다. 결국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본회퍼의 일생을 살펴야 했고, 본회퍼에 관련된 몇 개의 논문을 읽어야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여전히 이 책은 난해하고 어지럽습니다. 이제 책 속들어가 봅시다.

 

“‘인격’ ‘원상태’ ‘’ ‘계시는 오직 사회성을 고려함으로써만 온전히 파악될 수 있다.”

 

서문을 시작하면서 얼마가지 않아 이야기한 것으로 이 책이 갖는 독특성을 잘 보여주는 문장이라 여겨집니다. 사회철학과 사회학은 교의학을 위해 봉사해야하고, 교회 공동체는 사회철학과 사회학의 도움을 받음으로써만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책의 목적은 사회철학과 사회학의 도움을 받아 교의학적 관점으로 정리한 교회론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이 책만으로 본회퍼의 교회론은 통찰할 수는 없지만 적지 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제 본회퍼가 말하는 교회에 대해 들어봅시다.

 

먼저 1장에서 소개하는 사회철학과 사회학의 개념을 들어봅시다. 사회학은 사회철학의 결과 위에 세워집니다. 두 분약은 정신과학이며, 독립적 학문입니다. 사회철학이 사회성의 원초적 본성에 관한 것이라면, 사회학은 경험적 공동체의 구조에 관한 학문입니다. 에둘러 말하면 사회철학은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들에 본성에 대한 것이며, 사회학은 그러한 인간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학은 구조적 속성을 드러내는 정신활동이며, 상호작용을 탐색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사회학은 종교 공동체의 구조적 속성을 현상학적으로 연구’(43)하는 것입니다.

 

본회퍼는 2장에서 그리스도교적 인격 개념은 오직 사회성 안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나아가 사회 구성원의 본성을 다루는 사회철학적 부분에서는 인간의 보편적 정신은 오직 사회성, 즉 공동체의 구조적 관계 속에서 가능하고 실현된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사회철학이 배라면 사회성은 바다가 될 것입니다. (사회철학)는 오직 바다(사회성) 안에서 가능하고 실현되는 것입니다. 종교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적 인격 개념(사회철학)은 교회 공동체(사회학)에서 가능하고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제 먼저 고민해야할 부분은 사회를 구성하는 사회 구성원은 어떤 존재인가입니다. 본회퍼는 2장에서 개인과 보편의 문제를 다루면서 앞으로 전개될 교회의 특징들을 하나씩 잡아가고 있습니다. 종족은 개인에 비해 절대적으로 우월하며, 개념적으로도 앞선다고 말합니다.(50) 이러한 이해는 타락과 교회 공동체를 다루면서 개인과 교회의 속성을 통해 주도면밀(周到綿密)말하게 설득해 나갑니다. 아마도 다음 문장은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문구가 아닌가 싶습니다.

 

집단인격은 개별인격과 달리 발생학적으로는 의존적이지만, 형이상학적으로는 독립적이다. 집단 인격은 인격의 구조 안에서 모든 개별인격과 다르지 않은 상태에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통일체와 공동체는 서로를 배제하지 않으며, 서로 동일하지도 않다. 양자는 서로를 촉진한다.”(102)

 

저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본회퍼는 인류 안에 한 개인이 있지만, 한 개인은 인류에 종속되지 않고 개별자로 독립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인류 없이 개인은 있을 수 없으며, 인류를 통해 개별자는 그 존재가 의미를 갖게 됩니다. 둘은 서로 구분될 수 있지만 분리 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결국 신자와 교회와의 상호관계 속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자와 신자가 교제함으로 교회의 구조가 형성됩니다. 신자는 교회의 구체화이며, 실체인 동시에 독립적 존재입니다. 교제는 결국 타자와 타자간의 독립된 존재의 상호작용이며, 사회성을 발현입니다. 본회퍼의 통찰은 이러한 사회성을 하나님과의 교제로 확장시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교제를 동반한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사회적 교제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는 사회적 교제가 없듯이, 사회적 교제가 없는 하나님과의 교제도 없다.”(69)

 

본회퍼의 주장은 언뜻 보면 칼케톤 공의회의 삼위일체 선언을 닮아 있습니다. 삼위를 인정하면서도 서로 연합하며 협력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의 사회성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분명 달지만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하며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요한사도가 주장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이 무엇이며 교제가 무엇입니까? 타자가 존재하기에 가능한 것이 아닙니까? ‘타자가 있어야 비로소 구체적인 나가 존재합니다. 타자와 구별된 개인이 바로 나인 것입니다. 본회퍼는 타자를 구체적인 너’(60)로 규정함으로 교회가 사회성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며, 전제하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교회는 어떤 곳인가? 타자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를 아는 것입니다. ‘타자에 대한 나의 실제적인 관계는 하나님에 대한 나의 관계에 따라 결정 된다’(64)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난해배 보이는 본회퍼의 이야기는 교회 공동체는 각 개인의 모임인 동시에 연합이라는 말입니다. 분명 나와 너는 다르지만, 공동체 안에서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중요한 몇 가지의 의미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각 개인은 절대 타자에 의해 강요되거나 부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존재이며, 부정할 수 없는 독립된 인격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한 사람은 분명 독립된 개체로서 존재하지만 각 사람은 서로 연합해야 하며, 연합함으로 한 인격으로서 존재의미를 부여받게 된다는 점입니다. 본회퍼는 이러한 이중적 의미에 대해 아담의 타락 사건을 통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모든 인간은 분리된 많은 개인으로 나누어지면서도 총체적으로 죄를 지은 인류로서 하나라는 사실은 아담의 본성을 지닌 인류의 독특한 구조이다 인간은 아담’, ‘집단인격이다. 그는 오직 공동체(교회)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집단인격에 의해서만 대치될 수 있다.”(111)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적잖게 놀랐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내용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혁명적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회퍼는 아담과 개인의 절대분리불가의 관계를 지적하면서 아담 인류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개인은 죄인들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간다’(111)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모든 개인은 아담이 아니면서 동시에 아담이기도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새로운 인류를 통해 극복될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확고한 선언 아래 교회 공동체의 특질(特質)5장에서 논하기 시작합니다. 선한 사마리안인의 비유로 알려진 누가복음 10장의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인간에게 이웃을 실제로 사랑하기를’(149) 바라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이웃의 경계를 허물며, 정신이 아닌 구체적인 너를 하나님 안에서 용납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은 이웃의 경계를 넘을 뿐 아니라 모든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어디서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를 원’(151)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가 암스테르담 자유 대학을 세우면서 그 유명한 영역주권(sphere sovereignty) 사상을 선언합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세상 어느 곳도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곳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도 무난하리라 생각합니다. 교회 뿐 아니라 세상도 하나님의 영역에 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존재의 고유한 속성을 해치지 않으십니다. 그것을 부여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존재의 속성을 왜곡시키지 않으면서 구별 속에서 연합을, 개체 속에서 통일을 이루게 합니다. 주님께서 율법사와 제자들에게 거듭 강조하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은 다른 타자를 내 자신의 입장에 놓고 사랑하라는 계명’(152)이 아닐까요? 타자를 나처럼 사랑하는 것, 그것은 인간의 의지이지만 성령에 의해 우리의 마음속에 채워진 의지입니다. 본회퍼는 타자에 대한 헌신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며, ‘하나님의 사랑은 공동체를 위한 헌신인 동시에 교제를 향한 의지’(153)라고 과감하게 선언합니다.

 

사랑하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명령이자, 하나님에게서 온 의지입니다. 의지의 목적은 교제이며 성도간의 교제를 요구하며, 그 교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위한 교제’(154)입니다. 교제는 믿음 안에서 가능하며, 죄를 용서하는 성도의 공동체로 확장시킵니다.

 

하나님은 나를 교제로, 곧 그리스도의 사랑과 이웃과의 연대관계로 인도한다. 오직 이러한 믿음을 통해서만 나는 타자에 대한 나의 행위를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우리의 교제를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교제로 믿을 수 있게 한다.”(156)

 

교제는 타자 즉 이웃을 또 다른 나인 타자로 받고, 나를 대하듯 그를 대하게 합니다. 결국 교제는 타자에 대한용서, 즉 사랑의 교제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실현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1. 하나님이 제정한 교회와 교회 지체들의 구조적 공존(共存)

2. 서로를 위한 지체들의 활동과 대리(代理)의 원리.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하셨던 이웃을 사랑해야하고, 용서해야 하며, ‘이웃의 짐과 고통을 짊어져야’(159)합니다. 본회퍼는 루터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혁명적 선언을 합니다.

 

나는 바로 네가 되고 싶고, 나를 사랑하는 너는 바로 내가 되고 싶다.”(160)

 

사랑하면 닮아간다고 합니다. 사랑하면 한 없이 마주하기를 즐겨하고, 사랑하면 상대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공유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인간의 의지에서 온 것이 아니라 성령에게서 온 것이라고 본회퍼는 강조합니다. 교회는 아담의 의지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지가 성령을 통해 실현되는 곳입니다. 본질적으로 교회는 자기 죽임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라갑니다. 사랑은 자기를 위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신을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가 그리 하셨듯 자기 죽임을 통해 원수를 용서합니다. 그렇기에 교제는 하나님의 의지를 실현하는 구체적 행위로 나아가게 합니다. 본회퍼는 성도의 교제 안에 세 가지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1. 이웃을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활동,

2. 남을 위한 기도,

3.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로 죄를 용서해 주는 것.(164)

 

이러한 작업들은 교회의 직무와 예식을 통해 실현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임이 불가피하며, 믿음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지만, 교회 공동체가 갖는 믿음은 종말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고,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다’(250)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교제와 교회의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250)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본회퍼의 역설적이며 예리한 통찰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교제가 곧 하나님의 통치라는 주장,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주장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치밀한 논리에 의하면, 교제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사랑과 거룩의 공동체를 요구하며 전제하고 있기에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문득 이 책을 읽으며 저와 당신, 그리고 우리 가족들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결혼한 지 벌써 삼 년째가 되었습니다. 우린 처음, 너무나 낯선 서로에게 어색함과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적지 않은 시간 논쟁하고, 서로의 생각을 상대에게 강요했습니다. 그것이 옳기 때문에 강요했고, 타협할 수 없는 진리였기 때문에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본회퍼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를 하나님이 형상을 가진 한 사람으로 인정했는지요. 손이 발에게 너는 쓸모 없어라고 말할 수 없듯, 우린 다르기 때문에 아니야알고 말하고 싶어 하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며 교정되어야할 문제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나는 네가 되고 싶고, 너는 내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웃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듯 사랑하고 하지 않고,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누군가를 사랑할 때 타자를 내 자신으로 대한하면 시기나 질투, 다툼이나 반목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문득 나는 진심으로 당신을 타자가 아닌 나 자신으로 대했는지 부끄러워집니다.

 

우리나라는 부부는 무촌입니다. 무촌은 아무 상관없는 관계가 아닙니다.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저는 당신 낯설고 어색한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우리가 서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었으면 합니다. 당신에게 작은 다짐을 해봅니다.

온유해 질 것, 더 친절할 것, 더 자주 연락할 것, 그리고 진심으로 사랑할 것.

모호해 보이는 결단들이지만 지금 생각나는 것들입니다. 내일 아침 일찍 먼 길을 떠나야 하니 오늘은 이것으로 마치야 할 것 같습니다.

 

본회퍼의 <성도의 교제>는 난해하기 그지없지만 천천히 생각을 묵혀 가면 읽어 가면 이전의 읽었던 그 어떤 교회론 보다 묵직하고 깊은 성찰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정말 어려운 책입니다. 이 책은 이마누엘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 이후 가장 난해한 책 중의 한 권입니다.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죄송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남편이 가깝고도 먼 양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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