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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독서편지

[독서편지] 14. 나를 따르라

by 하늘땅소망 2019.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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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내에게 쓰는 독서 편지

14. 나를 따르라

드트리히 본회퍼 / 대한기독교서회

 

나를 따르라우리는 이 말씀이 누가 누구에게 한 말인지 압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는 스승을 따라가는 자들이며,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따르라는 말이 닮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문득 부부는 닮아간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어떤 곳에서는 서로 닮은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주장도 합니다. 둘 다 맞는 말 같습니다. 서로 닮은 사람들이 만나 사랑하면 이전보다 더 많이 닮아가게 되니까요. 주님의 나를 따르라는 말도 그와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거듭나지 못한 타락한 심성으로는 주님을 따를 수 없으니까요. 주님을 따른다는 말은 주님을 좋아한다는 말이고, 사랑한다는 것이며, 닮고 싶어 한다는 의미이니까요.

 

오늘 다시 독서 편지를 시작합니다. 혹시 이전 독서편지가 언제 썼는지 기억하시나요. 작년(2018) 18일 월요일이었습니다. 오늘이 정확히 201918일입니다. 지금 우리는 같이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대구에 난 아직 양산에 남아 있습니다. 이사를 마치고 다시 양산으로 홀로 내려왔을 때 기분은 텅빈 하늘에 한 조각구름처럼 허무했습니다. 집에 들어서자 쓰레기들과 널부러진 짐들이 저의 마음의 상태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래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아직도 집은 정리되지 않은 채로 너부러져 있습니다. 두 달 뒷면 마지막 남겨진 짐들도 정리해 이사해야 하니 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힘도 나지 않습니다. 오늘은 그대가 무척 그리운 밤입니다. 저는 다시 책을 꺼내들고 당신을 생각하면 독서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지난 주, 부산의 교회에 가서 주일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설교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최근 들어서 저는 목회자로서는 자격이 충분치 않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나의 삶을 되돌아볼 때 결코 주님을 따르는 삶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설교가 힘들고, 목회가 두렵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를 읽고 우리의 사역을 다시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다시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한 당신에게도 적절한 책이 아닌가 생각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존 교회에 대한 적지 않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고민을 넘어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명의 문제도 생각해 봅시다. 저를 목사로 불렀다면 목사로서의 소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사역의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수년 동안 간간히 설교로 몇 몇 교회를 섬기는 외에는 목회 자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목회를 하고 못하고를 떠나 나는 소명을 받았는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받았다면 왜 이렇게 있어야 하는가도 고민입니다. 소명, 주님은 정말 저를 불렀을까요?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불렀을까요?

 

본회퍼는 1934428일 런던에서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치 정권은 독일에서 교회의 종말을 가져왔다.”

 

본회퍼는 스위스 친구인 에어빈 주츠에게 교회의 저항운동에 동참하였습니다라고 편지했습니다. 그는 나치에 의해 빼앗긴 교회를 다시 되찾고 싶었던 것입니다. 편지 속에서 본회퍼는 산상설교에 모든 것이 결판난다고 말하며, 계명은 지켜야한다고 강조합니다. ‘나를 따르라는 산상수훈의 연구와 강해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가 1935-6년이었습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장 제자로의 부름을 다룹니다. 제자직에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산상설교를 강해합니다. 2장은 새로운 인간으로서의 교회를 설명해 나갑니다. 교회의 공간, 이 공간 안의 행동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산상수훈을 강해하고, 주석한 책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주석보다, 그 어떤 강해집보다 탁월하며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부름은 따라나선 자를 어디로 인도하는가?”

 

 

서문에서 본회퍼는 묻습니다. 그러고 이렇게 답하죠.

 

오직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계신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신다.’ 마음에 와닿는 표현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처지를 직면시켜주는 고백이 아닐까요? 당신은 지금 교회 안에서 다시 사역자로 살아가지만 수많은 갈등을 지고 있어요.

 

값싼 은혜가 난무하는 교회

 

본회퍼는 값비싼 은혜로 시작합니다. 저는 첫 문장을 읽을 때마다 경악에 가까운 경기를 느낍니다.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철철지원수다.”

 

값싼 은혜, 도대체 그게 뭘까요? 그는 말합니다.

 

값싼 은혜란 교리, 원리, 체계로 이해되는 은혜요. 보편적인 진리로 이해되는 사죄요. 그리스도적인 하나님의 이념으로 이해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를 인정한 자는 자신의 죄가 이미 용서되었다는 것이다.”

 

값싼 은혜는 혼자 머물러도 좋다는 것. 즉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예수께서 이미 이룬 업적으로 인해 의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참회 없는 사죄, 치리 없는 세례, 죄의 고백 없는 성만찬, 십자가 없는 은혜라고 말합니다. 루터에 의해 공식적으로 알려진 이신칭의 교리는 인간의 공로를 배제합니다. 예수께서 이루신 공로에 의존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값싼 은혜와 같지 않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가 너무나 비싸기 때문에 루터는 수도원에서 내려와 오직 세상에 맞서 치열한 저항’(41)을 한 것입니다. 값비싼 은혜는 행위로부터 벗어난 것이 아니라 제자직으로의 부름’(41)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 바로 그것이 본회퍼가 강조한 값비싼 은혜였던 것입니다. 순종의 삶은 다시 제자직으로의 부름으로 확장시킵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지금까지의 삶에서 떠나 완전히 불안정한 생활로 들어오라’(54)는 말입니다. 제자직은 나의 필요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그리스도에게 매이는 것’(55)입니다. 삶이 결여된 믿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과나무라면 사과가 열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순종의 삶이 드러나야 합니다.

 

순종하는 삶은 다시 고난으로 인도합니다. 고난은 하나님과 멀어짐’(99)이란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은 예수께서 죽음의 쓴잔을 마셨던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버리심을 기꺼이 감내하는 것, 바로 그것이 예수가 걸었던 길이며, 제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짐을 벗고 십자가를 지고 가야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서 세상의 짐을 벗기시고 새로운 멍에와 짐을 지우셨습니다. 그 짐은 바로 십자가’(101)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는 우리는 그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예수는 이제 십자가를 지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며,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놀라움과 두려움 속에서 예수가 부르는 길을 따라간다.”(113)

 

따를 수 없는 길을 가기에 비범하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순과 역설의 존재라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부르신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하지만, 따라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회퍼는 고난 속에 그리스도의 비범함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주를 따르는 길은 고난의 길이며, 십자가의 길이며, 자기 부인의 길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행동을 말합니다. 그 행동은 고난의 과정이며, 연속된 고난이며,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며,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본회퍼는 바로 그 지점에서 사건이 된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공동체 안에서 비범성은 사건이 된다.”(175)

 

저는 사건이란 단어에서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격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건은 결코 무시할 수 없고 간과될 수 없는 성질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사건을 일으키는 존재들이 아닐까요? 그들의 눈에는 이해할 수 없는 모순과 경이를 가진 존재들로 보일 겁니다. 문득 당신 생각이 나네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휘잡아 가고, 많은 사람들을 복음으로 인도하지만 끊임없이 견제당해야 했던 당신. 나는 당신에게 적당히 하라고 하죠. 남들에게 미움 받지 않을 정도만. 어쩌면 그것이 주님의 부르심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지만, 그 안에는 복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직과 개체라는 제목으로 이어지는 마태복음 강해는 본회퍼만의 독특한 관점과 해석으로 풀어나갑니다. 대체로 제자도는 누가복음을 통해 강조되는데 마태복음을 통해 제자도를 강조하는 사람은 본회퍼가 처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5장부터 10장까지 이어지는 강해에서 그는 무엇을 말할까요? 먼저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율법의 성취인 이유를 예수만이 율법을 하나님의 율법으로 이해했기 때문’(138)이라고 밝힙니다. 즉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율법으로, 율법을 하나님으로 곡해시켰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필연적으로 예수님의 행함을 이해할 수 없었고, 십자가에 죽여야만 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점, 하나님의 율법을 그릇되게 실천하는 자들의 손에 죽음으로 율법을 성취한 것입니다. 율법은 살기 위한 목적이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살았지만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율법의 목적을 성취한 것입니다.

 

본 회퍼가 말하는 제자도는 예수 안 즉 십자가의 복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는 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나를 따르라는 십자가가 아니면 도무지 답이 없는 인간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입니다. 우리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아무 것도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마태복음의 제자도는 요한이 주장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15:4)는 말씀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5장 해석의 주제가 비범함이라면 6장의 주제는 은밀함또는 숨겨진 존재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마태복음 6장은 은밀한 기도와 금식과 기도를 언급합니다. 은밀함이란 순종안에 숨겨져있고, ‘일상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빛이 됩니다.

 

빛을 비추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시 말하면, 존재론적으로 비범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동시에 일상적인 것이요, 숨겨진 것이기도 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다.”(181)

 

일상이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며,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론적이며, 존재론적이기 때문에 은밀한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하지 않고 오직 순수함으로 하나님께만 나아가는 것, 오른손이 하는 일은 왼손이 모르는 것, 그것이 억지가 아닌 진정한 선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본회퍼는 과감하게 그리스도의 선, 그분을 따르는 가운데 행하는 선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난다’(182)고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숨겨진 선행은 다시 하나님께 드러남으로 존재합니다.

 

경이로울 만큼 탁월한 안목을 가진 본회퍼는 비범함을 은밀함으로, 은밀함으로 드러냄으로, 드러냄을 다시 옛 인간의 죽음’(184)으로 이어갑니다. 그러므로 세상 속에서 은익된 존재는 하나님 앞에 명징하게 드러나며, 그의 안에는 그가 아닌 그리스도가 살게 됩니다. 결국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으로 우리의 불가능함 속에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충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걷기

 

이제 이것으로 끝날 것 같은데 이야기는 더 나아갑니다. 지금까지 이야기 중에서 중요한 한 단어가 누락되었는데 그것은 사귐이란 단어입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몸이란 글에서 성육신과 성례전 속에서 사귐을 구체화 시킵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입을 다물 수 없었는데, 제자도가 십자가를 넘어 부활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제자도는 대부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 죽음의 문제로 귀착됩니다. 그러나 본회퍼는 십자가에서 멈추지 않고 부활로 도약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그리스도와의 사귐에 참여하게 될까요? 성례전,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 그분의 몸에 참영한다’(272)고 말합니다. 설교로 충분하지 않으며, 성례전이 추가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몸과의 사귐을 유지’(272)하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그의 몸에 참여시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았다’(3:27, 6:3)고 말합니다. 세례를 그리스도와 신자가 한 몸이 되게 합니다.(고전 12:18) 그리스도인은 세례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될까요? 조직신학을 배웠다면 즉각적으로 교회를 떠올릴 것입니다. 맞습니다. 바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든 신자는 지체로 존재하여 한 몸을 이룹니다.

 

예수가 세상을 떠나간 다음에 세상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간은 그분의 몸, 곧 교회에 의해 차지된다. 교회는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이로써 우리는 오랫동안 망각된 교회론을 되찾게 된다. 우리는 교회를 하나의 제도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 있다. 그러나 교회는 몸을 가진 인격, 곧 완전히 독특한 인격으로 생각되어야 한다.”(275)

 

교회는 인격이며, 한 몸입니다. 교회 안에서 모든 차별과 구분은 사라지고 한 몸으로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세상과 구분되며, 세상의 대안으로 존재합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둘 때 한 몸으로서 가능하며, 완전히 한 몸이 될 수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밖은 곧 한 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교회로서, 새로운 인간으로서 존재하신다’(277)는 본회퍼의 주장은 합당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형상’(4:24)는 얼마나 혁명적입니까? 그리스도인은 교회이며, 교회의 지체이며,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됩니다.

 

나가면서

 

오래전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다시 읽어도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는 탄성을 자아내게 합니다. 모든 기독교 도서 중에서 열권을 선정한다면 반드시 넣어야할 소중한 책입니다. 문득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과연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예수가 필요하고, 그렇기에 십자가의 은혜 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죄인인 것 같습니다. 오늘 당신은 새로 부임한 교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교회도 세상 속에 있기에 여전히 부족하고 죄가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우리는 교회 안에 지체로서 존재합니다. 진정 교회를 사랑한다면, 모든 성도를 사랑해야하며, 모든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직도 교회에 대해 고민할 것이 너무나 많아 보입니다. 하지만 나를 따르라를 통해 그리스도인다움이 무엇인지 희미하게나마 배우게 되어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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