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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독서편지

[독서편지] 13. 탕부 하나님

by 하늘땅소망 2019. 1. 10.

사랑하는 아내에게 쓰는 독서 편지

13. 탕부 하나님

팀 켈러 / 두란노



 

벌써 새해가 밝아 왔습니다. 2018년이란 단어가 낯설고 어색합니다. 나도 모르게 2017이라 쓰고 다시 고쳐 쓰기를 번복하고 있습니다. 언제쯤이면 2018년이 익숙해질까요? 익숙해지면 또 새로운 해가 우리를 찾아오겠죠. 만약 공전의 시간이 더 짧거나 더 길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더 짧다면 낯 섬은 더욱 많아질 것이고, 더 길다면 지루해지지 않을까 합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365일이 날들이 인간들에게 가장 적합한 한 해이기에 선물로 주신 것 같습니다. 에레츠 교회를 개척한지도 벌써 반년이 지나갑니다. 처음 교회를 시작할 때 막막하고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세상 속의 거룩한 교회라는 고상한 명분은 있지만 당장 먹을 것이 없는 현실은 교회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했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깊이 생각하게 했습니다. 생존의 벼랑 끝에서 끊임없이 물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오늘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을 보고 문득 이 책을 당신과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런 수입도 없이 벌써 7개월을 살았으니 우리에겐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응원하고 기도해준 몇 분들의 섬김이 없었다면 오늘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기도밖에 없음에도 삶의 일부는 기꺼이 나누어 주신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눔이라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문득 하나님이 하셨구나.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우리가 다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도 그분들이 우리에게 얼마를 섬기기로 했을 때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를 돕고 있는 분들의 사정을 보면 결코 편안한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분들의 마음에 사랑의 부담을 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결코 돕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들의 마음을 두드릴 때 아프지만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지만 에레츠 교회를 뒤돌아보니 디뎠던 발자국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책 제목이 강하게 다가옵니다. <탕부 하나님>이라니요. 우리는 늘 탕자가 알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나오는 그 탕자 말입니다. 우리는 지난번에 헨리 나우웬의 <탕자의 귀향>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탕자가 탕부라니요. 생소한 조합이지만 왠지 하나님을 잘 보여주는 단어가 아닌가 싶어요. 영원 원제를 보니 <The Prodigal God>네요. ‘Prodigal’은 낭비하는, ‘씀씀이가 헤픈이란 뜻이죠. 다른 뜻은 없는가 싶어 사전을 찾아보니 ‘play the prodigal’란 숙어를 난봉을 부리다는 뜻으로 풀어놓았네요. 신기하네요. 그럼 하나님은 난봉꾼이란 뜻일까요? 갈수록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입니다.

 

아들을 위해 사랑을 탕진하시는 하나님

 

들어가는 말에서 팀 켈러는 하나님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탕진하시는 하나님’, 아들을 위해서. 아마도 이 책의 말하고 싶은 중심 이야기일 겁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저자의 직절적인 답변인 것이죠. 탕자는 돌아가시지도 않은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가 죽으면 자신에게 줄 유산을 달라고 강청합니다. 유산을 받자 돈으로 바꿔 먼 나라로 떠나버립니다. 먼 나라는 아버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나라, 홀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닮아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며, 하나님 의존적 삶을 버리고 자립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흔히 탕자의 비유로 부르지만, 저자는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주인공이어야 하니까요.

 

하나님의 무모한 은혜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이요, 삶을 변화시키는 경험이며, 이 책의 주제도 바로 그것이다.”

 

무모한 은혜, 우리는 그것을 ()’진한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면 과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탕진하셨는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탕진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단 말입니까?

 

두 청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죄인으로 불리는 세리와 창기들. 그들은 둘째인 탕자입니다. 그리고 거룩하다는 바리새인들. 그들은 집 안에 있지만 정서적으로 탕자인 첫째입니다. 진짜 탕자는 첫째입니다. 첫째는 순종적이고, 아무 흠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개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못마땅해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목회자로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 실망했고, 왜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셨는가를 질문합니다. 거룩하지도 않고, 헌신적이지도 않았던 수많은 교인들과 교회 밖 사람에게는 그렇게 관대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던 저희에게는 왜 이렇게 모질까요? 하나님은 왜 이렇게 수고한 우리를 알아주지 않는 것일까요? 그 서운함을 생각하면 잠을 잘 수 없습니다.

 

그러는 저는 늘 이 부분에서 딜레마에 빠집니다. 처음 목회를 결심했을 때는 빛도 없도 이름도 없이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어떤 고통이 와도 감사하며 주님의 길을 따르기로 결단 했습니디. 그런데 왜 이제 와서 하나님께 서운함을 느끼는 것일까요? 우리는 왜 하나님의 구원 만으로 만족하지 못할까요? 그런 생각을 하면 저의 생각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많이 멀어졌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처음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할 때 저는 분명히 돌아온 탕자였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3 때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영접했고 거듭났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밀려와 저를 압도해 버렸습니다. 울도 또 울었습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가진 본성의 악함으로 인해 고통스러웠고,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가 감격스러워 울었습니다. 참으로 팀 켈러의 말처럼 아버지 사랑으로 용서하고 덮지 못할 악은 없고, 아버지 은혜에 맞먹을 만한 죄는 없’(51-52)습니다. 저는 그때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했고, 몸도 바를 몰라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새 탕자가 아닌 첫째가 되어 하나님께서 탕자들에게 베푼 은혜를 시기하고 있습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게 잘 고쳐지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형은 화가 나고 심지어 아버지를 무례하게 대하기까지’(55)합니다. 마음은 어느새 바리새인처럼 완악해지고, 누군가의 칭찬을 기대하는 외식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이 책을 읽으니 다시 내 자신이 탕자가 되어 허랑방탕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고 싶은데.. 어찌해야 합니까? 다시 어떠한 환경에서도 감사하고 감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워집니다. 제 안에 천국이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닌지 적지 않은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팀 켈러는 형이 아버지의 사랑을 잃어버린 이유를 착함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착하기 때문’(66)이라고 말합니다. 착함은 곧 교만입니다. 동생의 환영 잔치에 참여하지 못함은 악이 아니라 때문입니다. 자신을 그렇게 보고 있는 형의 교만과 자기 의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 그렇군요. 어쩌면 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 이유는 그동안 내가 하나님 앞에 의로웠다는 착각에 함몰되어 있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둘째의 위치에서 스스로 첫째의 위치로 맞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교만하게 말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자신이 잘한 일들의 동기까지 회개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죄만 회개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의의 뿌리까지 회개한다.”(117)

 

의의 뿌리, 무섭네요. 선행의 동기까지 죄의 지배를 받을 수 있다니요. 우리의 힘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네요. 진짜 회개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무서운 죄는 바로 하나님을 통제하려는 저의 때문입니다. 그들의 선행은 바로 하나님을 통제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들이죠. 친형의 분노가 그것입니다. 왜 분노할까요? 어떤 심리학자는 타인을 조종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첫째의 분노 속에는 아버지를 조종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즉 자신에게 관심을 주어야 하는데 둘째에게 관심을 주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안식하지 못합니다. 그는 아버지를 향유하지 못합니다. 늘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첫째는 비록 집을 나가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둘째처럼 아버지를 떠나 있습니다. 둘째가 유산을 물려받자 자신의 마음대로 써버리듯, 첫째도 그렇게 쓰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다만 그럴 자신이 없을 뿐이고, 자신을 의롭게 보이고 싶어 도덕적 행위로 억누르고 있을 뿐입니다. 첫째는 결코 둘째보다 낫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도 여전히 탕자인 것이죠.

 

당신은 어떤가요? 당신은 첫째 인가요 둘째인가요? 당신은 그동안 많이 우울했어요. 저도 특히 주일보다 토요일만 되면 우울감은 더 심각해져 마음이 가라앉았죠. 그리고 종종 사역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이 처량한 것이죠. 그런 당신을 제가 충분히 이해해 주지 못하고 이기적으로만 대한 저에게도 적지 않은 책임이 있을 겁니다. 아니 전부라고 해야 옳겠죠. 저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탕진하듯 당신을 위해 수고한 것이 없으니까요. 당신은 오로지 저만 보고 결혼했고 이곳까지 달려왔는데 저도 그런 당신을 받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당신이 저에게 에베소서 묵상을 하자고 했어요. 그곳에 하나님의 온전한 모습이 담겨 있다 하면서. 그런데 오늘 이 책을 읽으면서 바울이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한 부분이 생각이 납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5:22-25)

 

먼저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하지만, 바로 이어 남편들에게 아내를 사랑하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사랑하라 하십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온전히 사랑한 것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여자의 고향은 남자이지만, 남자의 고향은 여자입니다. 성경은 여인이 남자에게서 나왔다고 합니다. 동시에 남자는 여성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니 서로를 갈망하며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치만 동시에 남성과 여성은 너무나 달라 다른 피조물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서로 다른 정신세계를 가진 존재로 남녀를 창조하셨을까요? 그것은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하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마음이 서로 맞고 하나도 의견이 다르지 않다면 사랑할 이유가 없죠. 언어의 방식이 다르고, 생각의 패턴이 다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합니다. 인내해야 하고, 관대해야 하고, 배려해야 하는 것이죠.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랑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완전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남편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죠. 남편은 사랑할만한 자격이 있어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죠. 남편이기 때문에 목숨처럼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 말을 하면서도 많이 부끄럽네요. 당신은 언제나 저에게 자기는 날 사랑해?’라고 물으니까요? 당신의 그 물음이 저에게는 왜 그리 부담이 되는지 모릅니다. 당신의 질문은 당신은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아?’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목숨을 바쳐 사랑하라 합니다. 당신이 보기에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전적으로 제 잘못입니다.

 

당신이 저에게서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저도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지 못합니다. 몇 주 전 당신은 울면서 하나님께 버림받은 느낌이라고 했죠. 당신이 저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편인 저로서는 당신이 믿도록 최선을 다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 우리의 상황이 하나님의 마음을 의심하게 만들 뿐이죠. 팀 켈러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구원의 즐거움을 알려면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말한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원리가 아닐까요? 순종과 목숨을 건 사랑 말입니다. 결국 답은 우리에게 있네요. 당신은 저에게 순종하고, 저는 당신을 더욱 사랑하고. 진심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부 하나님이신 답이 안 나왔네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탕진하셨는지 말입니다. 팀 켈러는 아버지의 잔치에서 먹어야 할 음식은 다름 아닌 하늘에서 내려온 떡’(178)이라고 하네요. 잔치는 마지막에 우리가 경험하게 될 종말론적 의미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면 성경은 예수님께서 잔치에서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죠. 그리고 많은 예화에서 잔치 비유를 사용하십니다.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잔치가 결국 복음 속에 있는 것이었네요. 하나님께서 베푼 잔치, 하나님께서 탕진한 것은 바로 자신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제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동안 저의 이기적인 모습에 당신이 많은 실망 했었죠. 올해는 좀 더 헌신적인 삶이 되기를 다짐합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것을 탕진한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올해는 더 많아 사랑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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