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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

젤리샤프 알파겔 그리고 아내의 감기

by 하늘땅소망 2018.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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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리샤프 알파겔 그리고 아내의 감기


나만의 추억일까? '샤프연필'하면 언제나 전영록이 먼저 떠오른다.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라는 노래 때문이다. 가사를 살펴보면 사랑을 할 때는 연필 같은 사랑을 하라고 한다. 그래야 혹시 틀리면 지울 수 있으니까. 그저 노래가 흥겨워 따라 불렀던 유행가였지만 지금 생각하니 당시의 새롭게 시작되는 연애의 가벼움을 노래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꿈으로 가득찬

설레이는 이가슴에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사랑을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


아내가 알파 문구에 가야한다는 말에 

'그럼 나도 샤프 샤야겠다'

며 같이 가자고 했다. 아들에게 받은 젤리 흔들샤프를 다시 빼앗기고 나서 기존의 제도 샤프 밖에 없었다. 아내가 쓰던 오래된 고급 샤프도 줬지만 사용하기가 그리 편하지 않아 잘 사용하지 않아 언젠가 젤리 샤프를 사리라 생각했다.


가격을 보니 9천원이나 한다. 좀더 얇은 슬림샤프는12,000원이다. 그런데 지마켓에 알아보니 가격이 무려 절반 수준이다. 배송비까지 합해서 고작 6300원과 8,400원이다. 


샤프를 만지작 거린다. 사야하나 말아야 하나. 문구점에 들어가기 전부터 5천원이 넘으면 사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9천원 이상 한다고 한다. 자신이 사주겠다며 집어 들었다. 미안하고 고마워 어찌할바를 모르고 그냥 계산하도록 두었다. 

나는 샤프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적 샤프는 부자집 아이들이 가진 사치품 중의 하나였다. 국민학교 다닐 때 반에서 서너 명 말고는 모두 일반 연필을 사용했다. 칼을 연필을 깎아 사용했다. 연필을 왼손에 잡고 오른손으로 칼을 잡고 천천히 연필을 깎아 다듬었다. 사각사각 귀를 울리는 연필 깎이는 소리는 형언할 수 없는 묘한 평안을 주었다. 손재주가 있었던 탓에 연필 깎는 재주가 좋았다. 내가 깎은 연필을 보고 친구들이 깎아 달라고 아우성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나의 허세를 이용한 것이 분명하다. 어린 것들이 벌써 아부를 통해 타인을 사용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순진한 나는 '뭐 이런 걸 가지고' 허세를 부리며 어리석게 깍아 주었던 것이다. 그들은 고수였고, 난 하수였다. 어쨌든 난 연필이 좋았다.


그러나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연필보다는 샤프를 찾게 되었다. 책을 읽으며 줄을 긋는 습관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 비히 책 읽는 속도가 두 배에서 네 배까지 빠르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을 때는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장이나 단어등은 표시해 두어야 한다. 연필이 좋아 연필로 시작했지만 깎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샤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책을 점점 많이 읽고 빠르게 읽어 가면서 버튼을 눌러 샤프심을 꺼내는 것보다 흔들 샤프를 사용하는 것이 훨씬 편리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게 해서 애용하게 된 것이 젤리 흔들 샤프다. 


가격이 의외로 비싸 사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내는 이번에는 꼭 사주겠다며 우겼다. 그렇게 알파겔 젤리 흔들 샤프를 내 손에 들어왔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능력되는 대로 사주고 싶어하는 아내다. 아내도 유난히 책을 좋아하고 즐겨 읽는다. 작년 여름부터 지금까지 읽어낸 책은 아내가 나보다 두 배는 많을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밑줄을 펜으로 긋는다. 나는 샤프를 사용한다. 그것은 단지 지우개로 지울 수 있어서가 아니다. 샤프심이 갖는 독특한 특색 때문이다. 필기용은 HB를 사용하지만 독서용은 언제나 B를 사용한다. 연필심의 연하기는 H, HB, F, B 네 가지로 구분된다. H는 딱딱하다는 뜻의 Hard이고, B는 진하다는 의미의 Black의 이니셜이다. 최근에 F(Fine Point)는 고급 연필이 아닌 이상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오십이 다 되어가는 나이지만 아직 F 연필이나 샤프는 본 적이 없다.


며칠 째 아니가 콧물과 눈물이 흘러 내린다. 면역력이 현저히 떨어진 것 같다.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밤에 에어컨을 켜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선풍기 바람 때문일까? 아픈 아내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프다. 아내는 B샤프심과 같다. 흑연이 많이 들어가 연하지만 진한심이다. 아무리 몸이 아파도 이를 악물고 일을 한다. 아무리 쉬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내일 죽는다해도 오늘 자신이 해야할 일은 하는 사람이다. 절대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무한 책임감을 내려 놓지 않는다.


아내가 걸어온 길은 발자국들이 선명하다. 진한 B 샤프심처럼, 여리고 여린 그녀의 삶의 자국은 선명하기 이를 데 없다. 다소곳하게 놓여 있는 흔들 샤프를 보며, 아내의 다부짐을 생각한다. 아내는 여리면서 강하고, 연약하면서도 선명하다. 어쩌면 아내가 유난히 샤프를 사주고 싶었던 이유는 삶에 최선을 다하려는 자신의 천성이 발로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피곤해 침대에 쓰러져 콜록거리는 아내의 숨소리가 거칠다. 발자국 하나하나를 쿡쿡 밟고 살아온 열매다. 아내는 그렇게 지금까지 살았고, 오늘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허세로 무장된 나에게 아내는 좋은 선생이다. 언어와 행위가 허투르지 않고 부드러우면서도 진지하게 삶을 이어간다. 아이들을 대할 때도 변명의 여지없이 그들을 진지한 성찰의 세계로 이끌고 간다. 아내가 아프지 않고 오래오래 나의 곁에 있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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