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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름들] 여호와 이레(Jehovah Jireh)

샤마임 2018. 5. 28.

[하나님의 이름들]

여호와 이레(Jehovah Jireh)

[성경의 상징] 카테고리의 [하나님의 이름들]을 통해 다양한 하나님의 의미와 이름의 뜻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이글을 완성된 글이 아닙니다. 계속하여 수정증보됩니다

 

1. 뜻 

여호와 이레 : 

 

뜻은 ‘하나님이 보시다’이다. 대부분의 성경은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로 번역한다. 그것은 문맥상 숫양을 준비했기에 그렇게 번역한 것이 틀림 없다. 그러나 이레()는 ‘라아’라는 단어에서 왔으며 라아는 ‘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라아'는 성경에서는 매우 다양하게 번역된다. 
'보이다' '조언자' '나타나다' '표시' '구별' '얼굴' '관찰하다' '비전' 
이레는 '라아'라는 단어이며 '보다'는 뜻이다. BDB 사전은 '라아'가 니팔형으로 사용될 때, '나타나다'의 뜻을 가진다.(창 22:14, 46:29, 삿 13:10) 칼(Qal)형을 때는 '보다'는 뜻이다.(창 20:10, 22:8) 
여호와 이레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예비하심을 볼 수 있다. 결국 여호와 이레는 모든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이 능력을 나타내면, 통찰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한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장차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완전한 의를 이룰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우리는 모리아 산이 후에 아리우나 타작마당이 되며, 다윗이 그곳을 사들여 하나님의 저주를 끊는 제사를 드리게 된다. 다윗은 그곳을 하나님의 성전 터로 삼고 솔로몬을 통해 성전이 완성된다. 

 

2. 묵상

1)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은 갑자기 아브라함을 불렀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지시할 산으로 가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의 평안(샬롬)을 무너뜨린다. 그동안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기쁨의 날을 보냈을 것이다. 성경은 그 많은 시간을 침묵으로 일관한다. 아브라함은 평상시처럼 일어나 기도하고, 성경 읽고, 묵상하고? 거룩한 삶을 살았다. 현대인이라면, 주일에는 교회도 나가 성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평온을 완전히 박살내 버린다. 그 명령은 아브라함의 심장을 겨눈 화살과 같고, 목을 향해 내리치는 단두대의 칼날과 같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신다. 번제는 불로 태워 드리는 제사이다.

아브라함은 그 명령 앞에 놀랍게 반응한다. 아무런 대꾸도 없이 행동으로 말한다. 연속된 동사들은 히브리어에서 행동을 강조하는 바브(ו) 연속 기법을 사용한다. 아브라함이 지체하지 아니하고 즉각적으로 행동했음을 나타낸다. 아브라함의 침묵의 순종은 그 어떤 언어보다 강렬하고, 그 어떤 탁월한 선어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다. 수만의 언어보다 단 한 번의 순종이 위대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지 않았던 사울에 대한 사무엘의 책망을 들어보자.

[사무엘상 15:22]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 삼일간의 여행

모리아 산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무려 삼일 동안 걸어야 했다. 그들은 가는 길에 야영을 했을 것이고, 부자간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삼일 간의 여행은 아브라함에 고통의 시간이었다. 무엇을 보고 생각해도 온통 이삭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고, 순종으로 일관했다. 이곳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드러난다. 

히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믿음은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더 나은 본향을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믿음은 이 땅에서 영원을 보고, 유한으로 무한을 품는다. 그러므로 이 땅의 것들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것이다. 

 

3) 아브라함의 믿음 

하나님께서 이삭을 살려 주실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진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을 천사를 말리지 않았다면 이삭을 죽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죽인 것이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삭을 죽일 수 있을까?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1:17-19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믿음은 마음의 확정이나 이성적인 추론에 의한 확신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친밀함이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확실히 아는 믿음, 전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형성된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이다. 이러한 신뢰가 바탕이 된 믿음은 상황의 모호함과 두려움을 타파(打破)한다. 그는 어둠 속에서 빛으로 인도함을 받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감사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에 탄복한다. 하나님께서 인정한 믿음을 무엇을 막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믿음은 존재의 혁명을 일으킨다. 그는 물질과 소유에 경도된 세상을 여호와 하나님만을 높임으로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선포한다. 그리고 물질에 함몰된 시대의 정신을 정죄한다. 

 

나가면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신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도록 모든 우상과 애착을 끊어내야 한다. 어쩌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아닌 자신을 드리라고 명령했는지도 모른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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