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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4. 2:5-9 영광과 존귀로 관쓰신 예수를 보라

샤마임 2018.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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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5-9 영광과 존귀로 관쓰신 예수를 보라

 

1. 말씀 읽기

 

5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6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7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8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2. 묵상

 

고난 받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히브리서 기자는 복음이 무엇인지 유념하라고 말합니다. 유념하는 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복음의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소개합니다. 1-2장은 아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그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천사와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 탁월함은 1장에서 창조주요, 만유의 상속자요, 영존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제 2장에서는 1장에서 자세히 밝히지 못한 탁월함의 실제를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두 번에 걸쳐서 영광과 존귀로 관쓰신 예수라고 말합니다. 영광과 존귀를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7)


하나님은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만물의 상속자요 통치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킬 것입니다. 시편 8편에 하나님은 나의 왕을 시온에세웠고, 모든 열방을 통치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 왕은 곧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2: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그 아들은 열방을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리며 질그릇 같이 부술 것입니다. (2:9) 우리는 이러한 표현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포악하며 잔인한 군주와 같고 피를 좋아하는 전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십자가에서 밝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육신으로 보내어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말씀을 다시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증언합니다. 6절 하반부와 시편 8:4은 완벽하게 동일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인가? 왜 주께서 그를 마음에 두고, 왜 사람을 찾아오시는가?

 

첫 번째 사람에노쉬이며 두 번째 사람은 아담입니다. 에노쉬는 열등하고 조악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두 번째 사람은 보편적 사람의 대명사인 아담을 사용합니다. 아담은 땅이라는 아다마에서 왔습니다. 아담과 흙은 불가분한 관계입니다. 김정우는 본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나아가 사람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지상의 존재이다. 그는 천상의 존재가 아니다. 그는 약하고 유한하며 무의미한 존재이다. '사람'에노쉬'은 연약하고, 무기력한 존재이다. '사람의 아들'은 땅에 속한 인간의 본성을 듯한다. 그러나 이런 인간을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돌보신다.”(김정우 <시편주석1>)

 

천사에 비해 인간은 한 없이 가엾은 존재입니다. 무력하고 나약하며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생각하시고, 돌보(찾아오심)십니다. ‘생각한다는 말은 마음 깊은 곳에 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연약한 인간을 잊어 버린 적이 없습니다. 방치하는 것 같도 버림 밭은 것 같지만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 오십니다.

 

천사는 먹지 않아도 됩니다. 두려움과 공포도 없습니다. 생존의 위기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시공속에 갇혀 있으며, 병들며, 나이가 들면 점점 연약해 집니다. 두려워하고, 의기소침합니다. 어느 것도 천사보다 우월하지 않습니다. 그런 인간의 모습을 아들이 그대로 입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말합니다.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언급한 다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라고 촉구합니다.(7.9) 연약함 그 자체인 인간으로 있는 아들이 지금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고 있습니다. 물론 잠시 동안이었습니다. 7절은 과거형을 사용하여 이전에 잠깐 그랬으니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을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하필이면 연약한 인간으로 계실 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썼는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더핑크는 장차 받을 영광으로 미래형으로 환치(換置)시킵니다.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8)를 생각한다면 분명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 기자는 현재와 미래가 하나로 묶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 없고, 죽음 없이 다시 살아남은 없습니다. 고통 없는 면류관은 가짜입니다. ‘죽음과 고난’ ‘영광과 존귀사이에는 그러므로가 들어가있습니다. ‘그러므로가 무엇입니까? ‘앞의 내용이 뒤의 내용의 이유나 원인, 근거가 될 때 쓰는 접속 부사.’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천사(사람에네쉬’ ‘아담’)보다 못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쓰고 계신 관은 가시 면류관이었습니다. 배고픔과 배신, 절망과 죽음이 지배하는 인간으로 살아가셨습니다. 성육을 통해 가시 면류관을 쓰지 않는다면 결코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를 보라!(βλέπομεν ησον)

 

히브리서에서 중요한 단어 중의 하나는 보라’(βλέπω)는 단어입니다.(3:9, 10:25, 11:1, 11:3,7 12:25)

 

3: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본다는 것은 살피는 것이고, 마음을 두는 것이고 피하거나 행해야할 것들입니다. 사람은 본다고 말하지만 실제는 보여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가는대로 눈이 가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영광과 존귀로 관쓰신 예수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친히 고난과 죽음을 맛보심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의 자리로 이끕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가고, 하신 행동을 하며, 그대로 모방하며 살아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고자 한다면 우리의 눈을 주님께 고정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우리가 믿고 따라야할 분은 하늘 영광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자기를 비우고 죽기까지 순종한 겸손과 사랑으로 말미암아영광과 존귀를 관 쓰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부유함과 헛된 영광을 보지 말고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가를 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성경묵상, 신약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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