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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편 묵상] 1. 여호와는 나의 목자

샤마임 2018.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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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편 묵상] 1. 여호와는 나의 목자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

여호와는 보편적 명칭인 하나님’(엘로힘)이 아닙니다. 대체로 엘로힘은 창조의 신, 만물의 주관자, , 능력 등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구속사적이고 개인적인 이름입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부를 때는 여호와로 부름으로 친밀함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멀리 있는 타자적 존재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존재이며, 나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23편이 유배된 포로의 정서를 담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여호와는 앞으로 이루어질 구원에 대한 소망을 담은 호칭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구약의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르지만 유대인들은 부를 수 없는 이름입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다른 명칭으로 부릅니다. 그중의 하나가 아도나이’(Adinai)이며, 나이 주인이란 뜻을 가집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기 때문에 아도나이로 부른 것입니다. 일종의 경외심이자 존경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을 읽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존경하고 경외 한 적이 몇 번이나 있습니까?

하나님은 경외하는 이름보다, 경외하는 마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경외는 직역하면 두려워하다는 뜻이지만 삶의 우선순위를 말합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도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삶에서 중대한 존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과 공경이 들어가 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나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합니다.

여호와는 목자이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합니다. 목자는 양을 지키고 보호하고 먹이는 존재입니다. 책임질 뿐 아니라 주인입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사실은 몇 가지의 중대한 의미를 가집니다. 양은 적들에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늑대와 사자, 이리들이 언제나 양을 잡아먹기 위해 양 주변을 서성거립니다. 목자를 원수들로부터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삯꾼 목자들은 짐승들이 공격할 때 자신의 목적을 보존하기 위해 도망가 버립니다. 참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목자와 양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목자들은 종종 양들을 지키려다 자신의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목자는 양을 지켜야 하고, 양은 목자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 (10:11-12)


*목자는 양을 인도합니다.

목자는 양들에 풀과 물을 먹어야 합니다. 목자는 풀과 물이 있는 곳을 찾아 양들을 인도합니다. 풀과 물은 진리와 성령이 아닐까요? 또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생명이신 자신에게로 길 잃은 양과 같은 사람들을 이끌었습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0:16)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벧전 2:25)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7:17)

그러나 악한 목자는 양들을 제대로 먹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편안함과 추구하고 양들을 굶깁니다. 실제로 목자의 살았던 경험으로 시편 23편을 강해한 필립 켈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지금도 우리 지방의 한 양을 기르는 목장과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어느 양치기 청년을 회상할 수 있습니다. 그 청년은 양을 칠만한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의 양 떼들은 제대로 먹지 못하여 뼈만 앙상하게 남을 정도로 약하였고 많은 양들이 병과 기생충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가련한 양들은 하루에도 몇 번이고 울타리로 와서 우리 집 양들이 즐겁게 뛰놀고 있는 비옥한 푸른 목장을 철조망 사이로 멍하게 바라보곤 했습니다. 만일 그 양들이 사람처럼 말을 할 줄 알았더라면 저들은 , 이 몹쓸 주인에게서 어서 풀려났으면!’ 하고 탄식했을 것입니다.] <목자가 본 시편 23>(보이스사)


*목자는 양들을 불쌍히 여깁니다.

하나님은 무정한 존재가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고 불쌍해 여깁니다. 창조하신 다음 팽개치지 않고 돌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언제나 일하십니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양을 키울 때 잠을 거의 자지 못하면서 최선을 다해 키웠습니다. 그의 성공은 하나님의 축복이기는 했지만 그의 노력과 열성을 통해 하나님은 야곱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양들을 향한 목자의 마음 때문입니다. 그들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9:36)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의 근원은 긍휼즉 불쌍히 여김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하재성 목사는 긍휼예수님의 심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목자의 자격은 수많은 능력이라 스펙이 아니라 긍휼입니다. 긍휼히 없는 목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긍휼은 모든 사역자의 시작이자 마지막입니다.


여호와는 나의목자이시다.

나의는 소유격입니다. ‘나에게 속한이란 뜻과 나의 것이란 의미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놀랍고 경이로운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소유될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께 우리가 소유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친히 우리의 것이 되어 주셨습니다. 야곱에게 져 주시고, 우리의 것이 되어 주신 하나님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강함이 약함에게 지고, 영원히 순간 속에 내재하시며, 무한이 유한 속에 임재하십니다. 신앙 자체가 역설이고, 믿음 자체가 신비입니다.

나의라는 고백은 도무지 끊을 수 없는 친밀성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다윗은 지금은 성전으로부터 떨어져 있습니다. 성전을 갈망하고 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한결같이 시편 23편은 포로적 상황 속에서 읽도록 권장합니다. 아무도 다윗을 지키지 않습니다. 홀로 맨발로 도망했고, 외로움과 적막 속에서 지금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한순간의 잘 못된 선택의 그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가장 든든한 아군을 발견합니다. 바로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자신을 사랑하는 여호와입니다.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이 고백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지식으로 알 수 없습니다. 창조의 원리를 배우고, 성경 끝까지 암송한다고 하나님을 알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고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양이 됩니다. 양은 목자 없이 살지 못합니다. 철저히 목자 의존적 동물이 바로 양입니다. 인류의 역사상 양이 목자 없이 존재한 적은 없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목자는 항상을 양과 함께 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 고백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아무것도 없으면서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목자 되신 여호와께서 나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평안은 어디서 올까요? 만족(滿足)에서 옵니다. 그러나 다윗은 만족할 만한 그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절대 결핍(缺乏)의 순간에 절대 만족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참된 경건은 절대 의탁의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정직한 고백과 진실한 확신(確信)은 위대한 경건의 시작입니다.



시편 23편 - 10점
정현욱/유페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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