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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Note/잠언

잠언 17장 강해설교

by 하늘땅소망 2010. 7. 14.

사랑을 구하는 자

잠언 17:1-15

 

오늘 본문은 누가 진정한 승자인가에 대한 주제를 가진 잠언입니다.

 

1절 다투는 것

2절 유업의 나눔

3절 연단하시는 여호와

4절 악인들의 마음의 성향에 대하여

5절 조롱하는자,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

7절 거짓말 하는 것

8절 싸움을 승리하게하는 방법으로서의 뇌물

9절 싸움을 붙이는 방법으로서의 허물을 거듭말하는 자

10절 지혜로운 충고

11절 반역만 힘쓰는 악한 자

13절 선을 악으로 갚은 악한 자

14절 다투는 것은 둑에서 새는 물과 같다.

15절 악인을 의롭다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사람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는다.

 

이제 본문들을 한구절씩 간략하게 살펴봅시다.

1절

1절의 주제는 화목이 진짜 소중한 재산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1절은 마른 떡 한조각이 있는 집과 진수성찬이 있는 집이 비교됩니다. 마른 떡은 마른 떡, 즉 먹기도 힘든 떡인데 그것이 한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얼마나 삶이 궁핍한 것인가를 알려줍니다. 제육은 육식을 의미하지만 고대에서 육식은 어지간한 부자들이 아닌이상 먹기 힘든 것으로 그만큼 재물과 권력이 많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비교해준다. 재물과 권력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들이 그토록 찾고 구하는 것이 아닌가? 오직 행복해지기 위해, 평안함을 구하기 위해 입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아껴서 아껴서 얻고 싶은 것이죠. 온갖 비열하고 더러운 삶을 참는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마지막에 존귀와 부귀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함이죠. 그러나 잠언서 기자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삶을 비꼬는 듯 인간의 참 행복은 가난한 집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누군가는 가난하다고 다 행복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어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부자가 다 불행하지만은 않다고 말하고 싶어할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가난한하다고 다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역시 부자라고 다 불행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성경을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사람이 그토록 찾고 싶어하고 갖고 싶어하는 진정한 행복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항상 소유와 행복을 비례한다고 착각한다는 것이죠. 사실은 이것이 불행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구절은 이렇게 고치는 것은 어떨까요?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 화목한 것보다, 제육이 가득하며 화목한 가정이 더 좋다.

이상합니까? 자 그럼 다시 2절로 넘어가 봅시다.

 

2절

2절은 유업 분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선명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2절 속에는 역시 보이지 않는 다툼이 숨겨져있습니다. 후반부의 ‘형제들’이라는 단어 속에 형제들이 유업분배에 대한 보이지 않는 다툼이 숨겨져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다툼속에서 종이 형제들을 다스리고 형제들과 같이 일부를 상속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아마 아버지의 의도인지도 모릅니다. 서로 다투며 싸우는 형제들보다 슬기롭게 살아가는 종에게 자신의 상속권을 넘겨주고 싶은 그런 마음 말입니다.

 

3절은 어색하군요. 다음에 설명하겠습니다.

 

4절

4절은 아주 특이하면서도 1-3절까지의 원인을 밝혀주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쉬운성경의 번역을 봅니다.

17:4 악을 행하는 사람은 악한 말을 따르고, 거짓말하는 사람은 험담에 귀를 기울인다.

사람의 마음도 길이 있고 성향이 있습니다. 말하는 투, 언성, 사용하는 단어들이 그것들을 증명해 줍니다. 역시 마찬가지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악한 말을 따른다고 표현합니다. 자식이 철을 잡아 당기는 것처럼 악인은 악한 말에 쉽게 동조하고 넘어갑니다. 이것은 마치 고양이가 생선을 좋아하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은 남을 험담하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심리학에 칵테일 파티의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시끄러운 파티장에서 사람들이 이야기를 할 때 대부분의 말은 잘 들리지 않는데 자신과 관련된 말이나 자기가 좋아하는 말을 하면 그 말은 잘 들린다고 합니다. 굶주린 사자가 먹이감을 찾아 다니듯 남을 헐뜻고 험담하기 좋은 말은 자신의 귀에 쏙쏙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남을 비방하고 거짓말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칭찬하고 격력하고 사랑하고, 위로하는 말에 더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5절

5절은 어떤가요? 주님을 멸시하고 여호와의 미움을 받는 자를 말합니다. 먼저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가난한 자를 아무런 힘이 없고 보호자가 없는 연약한 대상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사람을 자기가 힘이 있다고 자기가 가진 힘으로 억압하고 조롱하고 괴롭히는 자는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이것은 율법의 정신과 맥을 같이하는데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레] 19:9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레] 19:10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물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있습니다. 속담에도 ‘가난은 임금도 못 구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약간의 긍휼을 베품을 통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가득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은 분명 위기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천국을 만드는 멋진 기회일 것입니다.

후반부의 말씀도 좀더 강력합니다.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를 벌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남의 실패와 불행과 넘어지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도 그렇게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재앙이 누군의 책임인가를 묻지 않고있다는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인지 타인의 속임수에 의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넘어진 것을 보고 기뻐하며 쾌재를 부르는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반하는 것으로 연약하고 불행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저희 집에 두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막내가 잘못을 했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한 녀석이 “아빠! 오늘 필주가 그릇을 깻어요 혼내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자 아빠된 저로서는 누구를 더 혼낼까요? 일러 바친 동생을 더 혼내줍니다. 비열한 녀석이기 때문입니다. 형이 되어서 동생을 일러바치고 혼내주라고 말하는 것은 누구의 잘못을 따지기 전에 가족으로서의 룰을 깨는 아주 나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집에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충직하고 성실하여 항상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했습니다. 그러나 둘째인 막내는 고집도 세고 버릇도 없었습니다. 어느날 막내가 아버지에게 찾아가 아버지가 죽으면 저에게 물려줄 유산을 먼저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두 말없이 막내에게 자신의 재산의 일부를 넘겨 주었습니다. 막내는 아버지의 재산을 헐값에 팔아 넘겨 현금으로 바꾸고는 며칠 후에 고향을 떠나 머나먼 곳으로 떠나갔습니다. 그곳에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다가 결국 돈이 다 떨어지자 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갈 곳 없던 막내는 염치 불구하고 아버지의 집에 다시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막내가 오기만 기다렸다는 듯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새옷과 새신과 예전에 아들이 누린 모든 영광을 다시 되찾아 주었습니다. 이것을 큰 아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분노했습니다. 못되먹은 막내를 아무런 징계나 거절도 없이 그대로 받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를 위해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쉬지 못했던 자신의 처지가 갑자가 불쌍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따졌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저에게 지금까지 한 번도 맛있는 외식한 번 시켜주지 않으면서 어떻게 못되먹은 동생에게 저렇게 잘해 주십니까?"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잘 알고있다. 그러나 저 아이는 너의 동생이지 않니? 저 아이는 죽을 뻔 했다가 겨우 살아 돌아오지 않았니? 그러니 나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6절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으로 표현합니다. 손자라는 의미 속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아들 세대를 넘어 손자의 세대까지 이어졌다는 나타내줍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축복이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아비는 자식의 영화라는 말을 통해 자식의 영광은 부모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좋은 부모를 두고, 능력있는 부모를 가진 자녀야 말로 큰 기쁨이요 즐거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7절은 이 문제를 약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해 줍니다.

7절

지나친이라는 말은 ‘탁월하다’‘위대하다’라는 뜻으로 미련한자가 ‘탁월한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상하고 어색하는 것입니다. 이런식입니다. 조직폭력배가 정의과 공의를 논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색하다는 것이죠.

이것과 마찬가지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존귀한 자, 또는 통치자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 역시 어울리지 않습니다. 구약 속에서 존귀한 자는 이스라엘의 장로나 영적 지도자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거짓말이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목적과 반대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한 방법을 쓰는 것은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어울리지 않다는 것입니다.

8절과 9절은 7절을 보충하고 있습니다.

8절은 뇌물의 문제를 다루고, 9절은 허물을 말함으로 이간질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자들에 대한 실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부분음 마치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 교회를 이간질하는 율법주의자들의 이야기와 닮아 있습니다. 간사한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거짓말을 계속하여 흘림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믿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의외로 효과가 있습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묘한 존재라서 제3장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이상한 일도 자꾸 듣다보면 그 말이 진짜라고 믿어 버립니다. 근래에 TV를 통해 광고를 보면 그 효가를 실감합니다. 몇십초 되지 않는 광고를 요즘은 이상하게 두 번씩 반복해서 보내줍니다. 전에는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었지만 지금은 아무 내용도 없는 것을 두 번씩 반복하여 보내줍니다. 그러나 그 효과는 놀라운 것이죠.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단순접촉효과라고 부릅니다. 이단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자주 들으면 그 틀 안에 얽매이게 되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쉬운성경은 9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모욕을 갚지 않는 것은 사랑을 구하는 것이지만, 지난 일을 자꾸 끄집어 내면 친구도 원수가 된다.

쉬운경 성경을 내용은 지난 날의 잘못을 계속하여 끄집어 내는 것은 결국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1절과 대응을 이루고 있습니다. 진정한 화목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바로 용서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들에게 끝까지 물어 뜯으려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자신이 그토록 이루려는 모든 것을 망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자신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9절을 좀더 깊에 살피면, 앞의 개역개정판과 쉬운성경이 다른 해석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동일합니다. 그러니까 이런식이죠. 자신에게 잘못한 사실을 다른사람들에게 계속하여 말하고 다님으로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믿게 만드는 것이죠. 결국 그 이야기를 듣게되는 당사자는 이를 악물고 서로 앙갚음을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원수가 되는 것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타인의 잘못을 용서해준다면 그 사람까지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놀라운 기회가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8절을 23절과 대응을 이루고 있습니다. 8절에서는 뇌물이 어느정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지만 23절에서 그러한 일을 행하는 자는 악인이라는 것을 못박고 있습니다. [출] 23:8에서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출] 23: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11절

11절은 4절의 부록이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악한 자는 반역만을 힘쓰다는 표현은 화목을 구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려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잔인한 사자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끝까지 분노와 욕망을 따라가는 자에게 잔인한 사자와 같은 존재를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12절

12절에서는 이러한 어리석인간들을 만나는 것을 암곰을 만나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암곰은 새끼를 잃고 새끼를 찾고자하는 포악한 곰을 말합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존재란 뜻입니다.

13절

13절은 계속하여 우리를 경고합니다. 악으로 선을 갚는다는 것을 우리는 배은망덕이라고 말합니다. 선을 선으로 갚아야 맞지만, 오히려 그것을 악으로 갚는다는 것은 가장 악날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동일하게 그들의 집에 악이 떠나지 않게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3절은 6절과 대응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손자까지 보는 노인의 즐거움과 반대로 13절의 집은 망하게 될 것이고, 계속하여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4절

14절을 읽다보면 우리의 인생의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다시한번 일깨워 줍니다. 부부싸움도 그렇고 모든 싸움들이 다 그렇듯이 싸움이란 원래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시작하는 법입이다. 뭐 대단한 것이나 되는 것처럼 과장하고 포장하지만 인간의 내면 속에는 알량한 자존심, 약간의 무시당함, 얼토당초 않는 시비들이 싸움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참고, 한자국만 물러나면 아무렇지도 않는 일을 가지고 서로 비방하며 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싸움이란 자신에게 뭔가가 이득이 돌아올 때 일어납니다. 인류의 마지막 전쟁으로 불리는 아마겟돈 전쟁은 역시 인간의 탐욕의 현장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아마겟돈은 이스라엘의 북서부에 위치하고 갈멜산 아래에 위치한 므깃도의 헬라식 명칭입니다. 이곳이 어떠 곳인가? 중요한 도로가 지나고, 군사적 요충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선점하기 위해 힘을 씁니다. 모든 욕망의 총집합 장소가 바로 므깃도인 것입니다. 싸움은 변두리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탐욕을 충동질하는 욕망에서 시작합니다. 그것이 돈일 수 있고, 권력일 수 있고, 인기일 수 도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 듯이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는 동안에 제자들은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망을 위한 도구로 주님의 사역을 바라보았던 것이죠.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주님께서 피흘려 사신 교회가 어떤 곳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기들만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주님 앞에서 제자들을 서로 싸운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요]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5절

마지막 15절에서 성경은 악을 도모하고 교회의 화목을 깨뜨리는 자들에게 무엇을 알려주시는가? 여호와께 미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15절은 지금까지의 악인들의 거짓말의 궁극적인 숨은 의도를 드러내주고, 그들의 저의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의 법칙을 깨고, 사탄이 하와와 아담을 유혹했던 수법입니다. 분명 죽으리라고 말씀했음에도 ‘죽지 않는다고’고 거짓말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했을 뿐 아니라 말씀이 통치하는 하나님의 동산을 저주받은 곳으로 만들었던 사단에게 내린 저주가 동일하게 임할 것이라는 것이죠.

선과 악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자신의 목적이나 의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를 거스려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자주가 임한다는 무서운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처음에 그냥 넘아간 3절을 이제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도가니와 풀무의 기능은 은과 금을 정결케하고 순도 높은 고급 은과 금으로 만드는 도구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다른말로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 안의 온갖 더럽고 추악한 것을 감추는 것이 아니고 드러내어서 그것을 태워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숨겨진 죄악들을 들추어 내어 그것을 제거함으로 주님 앞에 정결하고 순결한 마음이 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어려움을 당해보지 않으면 자신이 얼마나 믿음이 적은지 알지 못합니다. 유혹의 때를 만나보지 않으면 자신의 얼마나 돈이나 명예에 눈이 먼지를 알지 못합니다. 뇌물을 가져오고, 주변에서 유혹하는 말들이 들려올 때 사람들은 심하게 흔들리며 넘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러한 유혹과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으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어렵고 힘든 과정을 지나고 있지만 이것을 통해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사랑해야 될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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