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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독서편지

[독서편지]11. 삶의 의미는 사랑받고 사랑하는 하는 것입니다.

by 하늘땅소망 2017.11.03

사랑하는 아내에게 쓰는 독서 편지

11. 주님과 동행하십니까?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 김병국 옮김 / 바울

삶의 의미는 사랑받고 사랑하는 하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알고 싶어요!

저는 오늘의 난처한 물음에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당신이 제게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는 잠자리 이야기를 들려주었죠. 삶의 흔적을 남기고 떠나고 싶다는 잠자리, 그러나 삶의 마지막에 죽음 앞에서 삶의 흔적을 지워야 한다고 말했죠. 그런데 그 이야기를 했던 나무의 가지에 봄이 되니 빨간 잎이 나왔다는 이야기. 모두 지워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때 결국 흔적이 남았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 갈매기 조나단이 생각이 났습니다. 결론은 다르지만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것은 같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갈매기 조나단이나 잠자리는 의인화된 사람이 분명합니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의 심리, 바로 그것이 인간의 내면 깊은 곳의 갈망이 아닐까 생각이 납니다. 어거스틴의 저작 중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인간의 길이라는 주제를 가진 책이 세 권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고백록>이고, 다른 한 권은 역사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석한 <신국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다룬 <삼위일체론>입니다. 두 권은 이해가 되는데 마지막 <삼위일체>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을 읽어 본 독자라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저도 한 달 전 마이트웰브에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을 기고하면서 꼼꼼히 읽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결론짓기를 삼위일체론은 인간의 지성으로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나 삼위일체라는 교리 안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연합과 신비는 인간의 삶의 의미와 존재방식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삼위를 가졌지만 서로 친밀하며, 각자의 일하시는 영역이 다르지만 연합했습니다. 결국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교리를 통해 하나님을 속성을 논하면서 인간들의 삶의 의미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삼위일체가 하나님을 만나는 인간의 길이라 표현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늘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면 과연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책이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의 <주님과 동행하십니까?>입니다. 이 책은 이전에 소개한 책들과는 약간 다릅니다. 그리 깊지 않고 설교로 된 책이기 때문에 쉽게 읽히는 책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민하고 걱정하는 많은 것들을 명료하고 재미있게 풀어 준다는 점에서 유의하여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가 기억이 납니다. 그때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95년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담임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이 책을 언급해서 읽었습니다. 이 책이 나오기 전에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의 책 중에서 <제자입니까?>라는 책이 유명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책이 나왔는데 이 책도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고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읽고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인 2002년 개정판으로 가지고 있으니 2년이 넘도록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베스트셀러인 셈입니다. 왜 그럴까를 생각해보면, 어려운 주제를 명징하게 풀어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사람들이 사랑하는 책은 쉽지만 감동적인 내용의 책이 분명합니다. 이 책도 그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루는 주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마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삶의 의미를 물었는데 저는 주님과 동행하십니까?’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러나 원제는 ‘Living with Jesus Today’이 시대 속에서 예수님과 살아감이라고 번역하면 더 좋을 듯합니다. ‘살아감이 결국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그리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이 책이 가지는 특성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첫 장, ‘만년 갓난아기 신자를 읽으며 상당히 놀랐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여전히 아기로 남아있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스스로 못한다는 것입니다. 밥도 먹여 줘야 하고, 기저귀도 갈아 줘야 합니다. 생명이 있다면 자라나기 마련입니다. 그럼 자라지 않는 저들은 생명이 없을까요? 우리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왜 자라지 않는가? 오르띠즈 목사님은 모임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어야’(25) 한다고 말합니다. 2장으로 가면 더욱 특이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목을 샌들을 신고 턱수염을 기르는 그리스도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표현 속에서는 우리는 종종 사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에 집착한 나머지 지금 여기에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역사 속으로 오셔서 공생애의 사역을 하셨던 육체적 예수만 생각하고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 자리 잡은 그리스도의 영광은 세월이 흐르면 점점 사라져가는 대신에 오히려 영광에서 영광으로 화하여 점점 더 강해져 갑니다.”(60)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신 성령께서 오늘도 여전히 새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학공식 같은 주장은 왠지 우리 마음에 와닿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짜증 내고, 분노하고, 실수하고, 거짓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성화 역시 곰곰이 살펴보면 의아합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거룩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의 세상은 이렇습니다. 그럼 우리가 성화 이론을 버려야 할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고, 제가 생각해 봐도 그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일까요? 오르티즈 목사님은 4우리가 어디에 있든지에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당신 주위의 어떤 곳에서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거기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 속에 있습니다.”(67)

주님께서도 친히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17:21) 오르티즈 목사님은 새 언약측면에서 마음의 문제로 다룹니다. 예레미야 말씀의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31:33)를 인용하여 이것을 강조합니다. 물론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거듭나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전이 되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구절에 있는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두세 사람이란 표현이 말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하나님의 나라는 이웃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서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내적이든 관계적이든 둘 다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내적으로 거듭나야 하고, 거듭난 새사람은 사랑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존재 의미를 묻고 있지만 그 답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존재 의미를 묻는다는 것은 삶에 대해 그만큼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뜻이고, 그로 인해 우리의 삶이 바로 세워지기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5장에서 성령 안에서 걷는다는 것은 당신 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것’(93)라고 말합니다. 의식한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동행이란 단어를 생각해 보니 얼마 전 읽었던 황용필의 <걷기 속 인문학>이 생각납니다. 그곳에 보면 호모 비아토르즉 걷는 인간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호모 비아토르는 길을 걷는 사람을 뜻하는 여행자라는 말입니다. 황용필의 이야기를 더 끌고 오면, ‘시속 3마일의 하나님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일본 신학자인 고스케 고야마의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 속도는 평균 사람들이 걷는 속도’(52)라고 합니다. 시속 3마일의 속도는 인간의 속도이며, 사유하며 사색할 수 있는 최적의 속도이기도 합니다.

“‘참다운 나를 발견하는 것이 종교의 원초적 책무라면, 묵상은 자기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해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나를 보는 것이며, 나로부터 빠져나와 다른 내가 나를 관조하는 영적 활동이다. 그것이 산책, 걷기와 뿌리가 같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걷기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우리에게 자유와 창의성 그리고 카리스마를 선물하는 또 하나의 은혜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걷는다는 것은 길 위의 묵상이다.”(78)

걷기는 곧 묵상이며, 또 다른 예배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과연 걷기가 묵상이며 예배일까? 오르띠즈 목사님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들은 심각한 얼굴로 대화하며 엠마오로 퇴보하고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들의 대화에 참여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무지에 놀라지만 곧 모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원망과 실망을 쏟아 놓습니다. 지금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동행하고 있는 데 말입니다. 그들은 부활하셔서 그들과 함께하고 계심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요? 부활은 그들의 인식 밖의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예언하고, 여인들이 와서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증언해도 곧이듣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들의 완악함을 책망하시고, 성경을 풀어 주십니다. 이것은 그들이 걷고 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걷기는 살아감의 은유적 표현이며, 존재의 유비(類比)가 확실합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참 의미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실수를 범하실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다 그러하니까요.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예수님께서 당신 속에서 성령을 통해 인도해 주심에 따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걷는 것을 점점 더 배워 나가게 될 것입니다.”(127)

맞아요. 우리는 넘어집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넘어지고 또 일어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8장으로 넘어가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언급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내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저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성경을 바라보십시오. 성경을 따라가십시오.’(137)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바울조차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새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나를 보지 말고, 나를 따르지 말라고 할까요? 이것 아무래도 이상하게 보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감추고 싶은 넘어짐이란 부끄러움 때문은 아닌지요. 다른 사람의 삶은 변화되기를 원하면서 정작 우리 자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음에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정을 적절히 다스릴 수 없다면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없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150)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면 다른 곳에서 받는 인정은 가식에 불과합니다. 오늘 이 문장이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빛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제일 먼저 빛을 발해야 하는 곳은 가정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첫 번째 책임입니다.”(150)

우리는 존재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르띠즈 목사님은 주님과 교제하고 동행하는 법을 배우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삶의 의미는 존재 자체에 이미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과 교제하고 사랑을 실천할 때 그 의미들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11장에서 우리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먼저는 자신의 가장에 대해’, 두 번째는 친척들에 대해세 번째는 친구들에 대해’, 그다음은 이웃들에 대해책임을 묻습니다.(170,1) 책임이라는 말은 선교사적 삶을 두고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어느 날 오르띠즈 목사님이 교인들의 사는 세상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고 직장 생활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출근하던 첫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음담패설과 추잡스러운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때야 우리 교인들이 생활하는 곳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성경적인 탁월한 지식이 아니라 자신들이 생활하고 있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 나가느냐 하는 것’(209)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오르띠즈 목사님이 그런 식으로만 설교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경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럼 우리는 그러한 추잡함을 피하기 위해 직장생활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교회 안에서만 생활해야 할까? 고민하게 됩니다. 주님은 세상 속으로 걸어오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육신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고,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그들 사이로 들어가야 합니다.”(209)

주님은 세리 마태의 집에 찾아가십니다. 또한 창녀 마리아의 집에도 가십니다. 다섯 명의 남편을 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납니다. 주님은 죄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셨습니다. 썩어 문드러진 세상의 악 속으로 자신을 던져 넣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선교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럽다 버리지 않습니다. 악하다 심판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조건을 따집니다. ‘무엇무엇 때문에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합니다. 존경해 달라고 하면 존경할만한 일을 먼저 하라고 하며 그럼 나도 당신을 존경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사랑은 늘 조건적입니다.

갑자기 제 자신을 생각하니 부끄러워집니다. 원망과 불평하며 산다는 말속에는 서운함이 들어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적지 않은 마음의 괴로움으로 보냈습니다. 나름 최선을 다해 산 것 같은데 삶은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동안 도와줬던 사람들이 정작 내가 어렵자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보았을 깊은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저의 생각이 어린아이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왜 나를 사랑하실까? 저는 불완전합니다. 허물투성입니다. 불순종합니다. 종종 실수하고 넘어지고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그런 모습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에 대한 사랑을 단 한 번도 거두신 적이 없습니다. 왜요? 저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녀에게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원망할까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는 하나님께 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달라고 하면서 왜 다른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할까요?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라는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두려워 떨던 제자들에게 주님은 걱정하지 말라 나다라고 말합니다. 헬라어를 보면 나다라는 표현은 구약의 스스로 존재하는 자여호와라는 말과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다라고 말씀하시지, ‘나였다.’ ‘나일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저는 여호수아 11절과 2절을 읽을 때마다 소름이 끼칩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모세가 죽은 후,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부분, 그러니까 모세는 죽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그는 영원한 현재이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는 놀라운 은혜의 주인이십니다. 그는 결코 죽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이십니다. 영원이신 하나님께서 시간 안으로 걸어오셨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신비라는 말만으로 성육신 사건을 설명하기에 너무나 인간의 언어가 빈약함을 절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존재인 동시에 시간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사랑해야 합니다. 영원한 사랑은 조건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이며 파격적인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 무명의 교부가 저술한 <디오그네투스에게>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곳에 보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았는지 생생하게 알려주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 조국에 살면서도 마치 나그네와 같습니다.

-시민으로서 모든 의무를 다하지만 모든 것을 참습니다.

-결혼하여 아이를 가지지만 일반인처럼, 아이를 버리지는 않습니다.

-식탁은 모두와 공유하지만 (다른 아내와) 잠자리는 공유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그들을 박해합니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 줍니다.

-그들은 능욕을 받으면서도 축복하고, 모욕을 당하면서도 존경합니다.

-그들은 착한 일을 하고 죄인처럼 벌을 받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은 이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존경하는 화란의 헤르만 바빙크는 성령 안에서 산다는 말을 이렇게 서술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자신들 가운데 이루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생명을 자신들의 육체 가운데 드러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되었다.”

, 이루고, 드러내고,라는 표현은 삶을 의미합니다. 완전하게 되었다는 표현은 칭의의 법정적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삶과 구원이 장차 하나님의 선물로 존재한다면, 이것은 반드시 우리의 행위보다 앞서고 우리 행위의 근거와 권리가 되어야 한다고 바빙크는 강조합니다. 즉 우리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행위와 협력하고 행위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바빙크 4261)

당신은 존재의 의미를 물었는데 저는 엉뚱하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답했습니다. 동문서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질문인 삶의 의미는 곧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묻는 것이기에 그렇게 답을 했습니다. 이제 이렇게 답을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의미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받은 존재이고, 또한 사랑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책을 시작하면서 오르띠즈 목사님은 아기 신자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만년 아이로만 존재하는 교인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이러한 왜곡된 신자의 삶은 결국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삶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주님과 교제하며,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늘 인식하며, 주님께서 가셨던 사랑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빙크가 말한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자신들 가운데 드러내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생명을 자신들의 육체 속에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말하고 나니 제 자신이 정말 형편없는 존재라는 것이 다시금 깨달아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사랑하고 받아준 당신을 생각합니다. 오늘도 당신을 언짢게 하고 불쾌하게 했습니다. 당신을 볼 때마다 제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오늘 이 책을 다시 읽으며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존재를 더 깊이 묵상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한 가지는 당신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우리 만난 지 이제 일 년입니다. 사십 년이 넘도록 지녀온 우리의 언어와 생각의 습관, 삶의 방식이 한순간에 바뀌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 손을 마주 잡고 걷는다면 오늘이 어제보다 나을 것이고, 내일이 오늘보다 더 사랑하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좀 더 오래 걸어요. 시속 3마일의 속도보다 더 느리게 말입니다. 에녹이 삼백년 동안 주님과 함께 걸어갔듯, 우리도 함께 손을 잡고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함께 걷기를 소망합니다.


주님과 동행하십니까 - 10점
후안 카를로스 오리티즈 지음, 김병국 옮김/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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