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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독서편지

[독서편지] 10. 신앙생활은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by 하늘땅소망 2017. 10. 30.

사랑하는 아내에게 쓰는 독서 편지

10. 탕자의 귀향

헨리 나우웬 / 최종훈 옮김 / 포이에마

 

신앙생활은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뭘까요?”

 

아마도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번쯤 고민해 봤을 내용입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는 열정적입니다. 교회 나가는 것이 행복하고, 주일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려집니다. 한 가지 봉사에 만족하지 못하고 교사, 성가대, 주차 봉사 등등 갖가지 봉사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뭘까? 지금까지 한 번도 고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신앙생활을 시작하기 전 고민하다가 망각된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이 질문을 던질 때를 보면 교회 안에서 상처를 받거나, 신앙생활을 해도 삶이 그다지 좋아지지 않아 회의가 느껴질 때입니다. 아니면 계속된 고난으로 인해 마음이 무너진다면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란 존재가 누구인지 고민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질문은 답을 요구하기 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의 표시는 아닌지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저도 이번 기회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이야기는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 1권을 참고하면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조직신학적이 아닌 실존적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아마도 당신도 신학을 공부했으니 신학적 답변보다는 마음 깊은 곳에서 공감할 수 있는 답변을 듣고 싶어 할지 모릅니다. 저도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벌써 29년 정도 되었으니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닐 것입니다. 당신은 저보다 더 앞서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지요. 하지만 신앙의 연륜이 우리의 믿음의 깊이를 더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은 고민과 체험이 더 깊은 신앙의 세계로 인도할 것입니다. 저는 종종 신앙생활이 오래 될수록 신앙이 퇴보하는 듯 한 생각이 들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새로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이들을 볼 때 자랑할 것은 못되지만 연륜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오랜 시간 고민하고 생각하면서 그른 생각을 바로잡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좀 더 가까이 가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신앙생활이 지속될수록 확신보다는 회의적인 삶으로 퇴보하기도 합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첫사랑으로 회귀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저 같이 목사들은 더욱 그렇게 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들어요.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첫 사랑이 맞을까? 아니면 많은 오류를 수정해온 지금의 신앙생활이 바른 것일까? 둘 다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면 둘 다 옳을 수도 있고요. 그럼 과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뭘까요? 그래서 제가 존경하는 한 분의 책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헨리 나우웬의 <탕자의 귀향>이란 책입니다. 헨리 나우웬에 대한 평가는 다양합니다. 가톨릭 신부라는 것 하나 때문에 거부감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고, 너무 평범하고 깊이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그는 논리적으로 규정하는 조직신학적 신앙관과 가톨릭 신부라는 선입관을 내려놓는다면 배울 점이 참으로 많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의 장점은 삶과 신앙을 이질적인 어떤 것으로 보지 않고 두 주제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하며 연결시키려 했습니다. 말씀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에 내버려 두지 않고 삶으로 체득하려고 했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참 신앙이라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통해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를 제 나름대로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저의 고민이 당신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책이 없어 책장을 찾아보니 당신의 책이 보이네요. ‘특별 기념판이란 문구가 호기심을 자아냅니다. 안표지에 노아가 당신에게 준 선물이라고 표시되어 있네요. 당신의 생일에 아들이 선물로 준 것이 더 특별한 책이네요. 저는 이 책을 세 번 정도 읽은 것 같습니다. 이 책과 비슷한 내용을 다룬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좋았던 것 같습니다. 특별판 서문을 쓴 제임스 마틴은 이 책에 대해 한 본문에 깊이 침잠(沈潛)한다는 게 무언지알려 준다고 합니다. 저도 이 책을 읽고 너무나 익숙한 본문에서 무엇을 더 꺼낼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경이로울 만큼 다양하고도 싶은 성경의 세계를 펼쳐 보였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렘브란트라는 한 사람의 그림과 삶 속에서 반추(反芻)하여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렘브란트의 명화인 <탕자의 귀향>이란 그림에 대한 묵상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기분 좋게도 특별판에는 <탕자의 귀향><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합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구할 수 없으니 읽고 싶다면 두 권을 구입해야겠죠.

 

방관자또는 온갖 종류의 관찰자’(32)라는 말에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목사는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그러나 그 또한 진리를 찾아 떠나는 구도자입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목사들은 교인들을 관찰하고 방관합니다. 아니, 저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흔히들 하는 말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왔으니 한 눈에 봐도 다 안다는 식의 섣부른 판단이 목사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교만이었습니다. 문득, 나는 언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용서의 품에 안겨본 적이 있었는지’(32)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사람은 가르치기 전에 먼저 배워야하고, 가르침과 배움은 시간의 연대적 배열이 아닌 교차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책은 다시 읽으면서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리 떨어진 저를 발견합니다. 다양한 지식은 쌓여 가지만, 영혼은 메마르고 황폐하여 감사와 평안을 잃어 버렸습니다. 이 책이 저를 다시 하나님과의 거룩한 포옹으로 인도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탕자의 귀향>을 보았던 그해, 헨리 나우웬은 세 단계의 영적인 여정을 거칩니다. 첫 번째 단계는 둘째 아들이 되는 경험입니다. 둘째, 그러니까 탕자가 바로 내 자신으로 인식하는 단계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 단계가 뜻밖에일어납니다. 큰 아들이 진짜 탕자였던 것입니다. 그는 모범생입니다. 집 안에 있고, 아버지와 늘 함께 있습니다. 일상에 성실하고, 착하며, 누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법 없이 살 사람입니다. 그런데 동생이 돌아왔을 때, 그가 진짜 탕자였음이 밝혀집니다. 그는 평생 집을 떠나지 않았을 지라도 길을 잃고 방황하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44) 몸은 집에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밖에 있었던 영혼의 탕자였던 셈입니다. 세 번째 여정은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일이라고 하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죄다 관심을 보였습니다. 사방팔방 관심과 인정, 지지를 구했습니다. 이제 자신만의 진짜 소명을 추구할 때가 됐습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으며 집으로 돌아온 자녀들을 반가이 맞아주는 아버지가 되라는 겁니다.”(48)

 

분명 두 번이나 읽은 책인데 다시 읽으니 너무나 생소합니다. 제가 망각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으며라는 구절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입니다. 그냥 사랑해 주는 것, 그것에 아버지입니다. 어제 당신과 나누었던 이야기의 핵심이 여기에 나오네요. 제가 가족들로 인해 마음이 무너지고 상해있을 때 당신이 했던 말입니다. 가족은 언제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그냥 있는 것으로 받아 주는 것이라고 했죠. 우리가 자녀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게 가장 힘들다는 것을 제가 압니다. ‘안타깝고 불쌍해서 마음이 끓는 부모’(49)가 되는 것, 즉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갖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자 삶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부 작은 아들

 

아들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먼저 달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죽어야 유산을 물려받는데, 죽기 전에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합니다. 그는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이미 죽은 사람 취급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아들의 요구에 응하는 아버지를 그려 냅니다. 그는 교만하고, 어리석으며, 탐욕으로 인해 절제하지 못합니다. 그는 집을 멀리 떠났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언제나 동구 밖을 서성입니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둘째가 사업을 하기 위해 멀리 갔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행동이 자신의 말이 거짓임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지식이 없습니다. 그는 방탕했고, 얼마 가지 않아 전 재상을 탕진하고 돼지 치는 곳에서 돼지가 먹는 사료라도 먹기를 바라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돌아옴은 떠남을 전제’(61) 한다고 하지만, 아버지에게 아들의 집 떠남은 아들을 잃는 것입니다. 그가 살아 돌아올지 모릅니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설령 살아있다 해도 다시 돌아올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잃어 버렸다는 말이 맞을 겁니다. 탕자의 배신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인류의 모습을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인간 존재 자체가 낱낱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주님이 자녀들을 영원히 끌어안고 안전하게 지켜주시며, 그분의 두 손바닥에 새겨두셨으며, 그 그늘에 감춰주신다는 영적인 현실을 부정한다는 뜻입니다.”(67)

 

위의 문장이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사람들에게 관심 받고 싶어 하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저에게 싫은 소리를 할 때 화는 내는 것,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증거입니다. 누군가의 의미 없는 칭찬에 화색’(73)이 도는 것, 역시 탕자라는 표시입니다. 세상을 향해 나 사랑해? 정말 사랑하는 거지?’(73)라고 묻는 것, 둘째 아들이 집을 떠나는 이유입니다. ‘가망이 전혀 없는 곳에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구할 때마다 나는 번번이 탕자가’(74)가 된다는 헨리 나우웬의 고백은 저의 고백입니다. 참으로 저는 탕자입니다.

 

책을 읽고 있으니 당신의 칭찬에는 화색이 돌면서, 사소한 비판에는 역정을 내는 저의 모습이 자꾸 떠오릅니다. 만약 제 안에 하나님으로 충만하다면 다른 사람의 칭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떠난 탕자적 영성은 칭찬을 듣고 싶어 먼 지방을 떠도는 신세로 전락하게 합니다. 모든 것을 탕진하고 나서, 들끓던 친구들이 단 한 명도 남지 않을 때, 아들은 현실을 직시합니다.

 

순간, 죽음의 길을 걸어온 자신의 진면목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생명이 주는 요소들(가족, 친구, 공동체, 알고 지내는 이들, 하다못해 음식까지)로부터 철저히 단절돼서 남은 일이라고는 죽음밖에 없음을 깨달았습니다.”(82)

 

지금 저는 어느 때보다 외롭고 단절된 상태입니다. 저 사람은 나를 도와주겠지.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미동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제가 친절을 베풀었던 사람들은 나를 외면하지 않겠지.라는 생각도 사치였습니다. 심지어 이 사람은 진짜 나를 외면하지 않을 거야. 조차도 잘못 짚은 오답이었습니다. 두어 달 동안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 동안 쏟은 눈물보다 두 달 정도에 쏟은 눈물이 양이 더 많을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저를 떠나가고 외면했습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왜 저렇게 나를 대하지? 묻고 또 물었지만 명쾌한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통장에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고 며칠 후부터 생존 자체가 위태한 지경인데도 당연히 도와줄 거라 믿었던 사람들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 때 생각했던 단어가 자살이란 단어였습니다. 목사이기에 상상할 수 없는 금기어인 그 단어가 저의 목을 조여 왔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는 비로소 인간 존재의 근원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습니다.’(83) 존재의 근원, 그러니까 아버지는 떠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인간의 절망이 곧 하나님의 희망이다. 제 삶을 반추하니 저절로 되새겨지는 문장입니다. 통장의 잔고가 떨어질 때, 하나님의 은혜는 채워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며칠 동안 생각지도 않았던 몇 사람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자격 없음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아버지에게 탕자는 그냥 아들일 뿐입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사면초가의 인생을 회복하는 유일한 희망이며, 죽음의 문턱에 선 수많은 사람들의 무한한 생명의 끈입니다.

 

아들은 돌아갑니다. 그는 아직 확신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받아 주실지, 쫓아낼지 모릅니다. 그러나 혹시 모를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집으로 향합니다. 아마 길을 걷다가 주저앉기를 수도 없이 했을 것입니다. 아냐 다시 일어나 가자 아버지는 착해서 날 용서하실거야. 라며 다시 길을 재촉합니다. 헤아릴 수 없는 좌절과 낙심, 그리고 다시 일어섬의 반복의 끝, 결국 아버지의 집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아무런 대가도 요구도 하지 않고 그냥 안아주는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고 안기어 펑펑 울고 맙니다. 이것이 우리가 맞이하는 첫 번째 여정입니다.

 

2부 큰 아들

 

두 번째 여정은 교묘합니다. 발견하기 힘들고 회심하기 불가능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는 바르고, 곧고, 순종적이며, 성실합니다. 그는 집 안에 아버지와 함께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아버지와 큰 아들을 비슷하게 그렸습니다. 수염, 붉은 망토 등은 서로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적지 않은 거리를 두고 무표정한 얼굴로 관찰할 뿐입니다. 넓은 여백은 아버지와 맏아들을 갈로 놓고 있’(111)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원망과 분노’(112)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자신의 동생은 부러움’(113)으로 바라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차라리 나도 동생처럼 내 마음대로 살걸.하며 자신의 무능을 탓합니다. 충성하지만 기쁨이 없고, 성실하지만 즐겁지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집에서 이방인의 신세가’(131) 되고 말았습니다.

 

문득, 최근에 당신과 나누었던 많은 이야기의 핵심에 큰 아들의 원망이 담겨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동안 교회에 충성하고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것은 빈 통장과 질병입니다. 아무렇게나 살았던 친구가 고급차를 타고 다니고, 학창시절 찌질이라고 놀렸던 친구들이 사장이 되어 고급 아파트에 사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큰 아들은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날마다 동구 밖에서 동생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잘한다 수고했다 말 한 마디 없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그동안 애써 수고한 것이 헛되고, 착하게 살았던 세월이 억울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동생이 부러운 것입니다.

 

큰 아들은 형식은 있으나 내용이 없습니다. 말은 있으나 능력이 없고, 거룩한 모습은 있으나 거룩한 교제는 없습니다. 그 안에는 분노가 가득하고, 원망하고 좌절합니다. 그는 분노로 뜨거우나 신앙의 회의로 차갑습니다. 아버지는 토라진 큰 아들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다독입니다. 참으로 주님은 권면하고 간청’(133)하십니다. 두 번째 귀향의 조건은 불평하고, 비교하며, 원망하는 데서 벗어나 거리낌 없이 사랑을 주고받는 자아로 되돌아오는’(135)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차가운 분노에서 벗어나 뜨거운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큰 아들을 읽으면서 저와 너무 닮아 있어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어떻게 절묘하게 저의 숨겨진 마음을 보여주는 알 수 없습니다. 그의 말대로 나를 만날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찾아다니는 하나님’(133)이 분명해 보입니다. 결국 두 번째 여정의 핵심은 자신에 대한 솔직한 고백과 아버지에 대한 전적인 신뢰’(137)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부터 저의 눈을 하나님께 고정시켜야겠습니다. 그리고 의지적으로 감사의 훈련을 해야겠습니다.

 

3부 아버지

 

아버지는 달려 나갔습니다. 누구도 저 멀리서 오는 사람이 둘째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실루엣으로 보이는 몸짓, 태도만으로도 아들임을 인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리학에 칵테일파티 효과(cocktail party effect)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선택과 집중을 통해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듣는다고 합니다. 수많은 정보가 동시에 들려와도 자신에게 상관있는 것만을 듣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이 효과를 긍정적으로 바꾸어 보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수많은 아이들이 우는 데도 엄마는 자신의 자녀들의 목소리를 구분해 냅니다. 이처럼 아버지는 모호한 상황 속에서 아들을 곧바로 인식합니다. 렘브란트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노인들을 많이 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결 같이 그들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합니다.

 

렘브란트의 예술은 더 이상 눈에 보이는 대상을 포착해서, 정복하고, 통제하는 데목표를 두지 않고 가시적인 존재를 화가의 독특한 심상에서 나오는 사랑의 불꽃으로 변형시키는 테 초점을 두었습니다.”(149)

 

이것이 렘브란트가 비유 그대로 그리지 않고 아버지를 거의 보지 못하는 노인으로 그린 이유입니다. 아버지는 두 손으로 등을 어루만집니다. 비록 육신의 눈은 감겼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의 깊은 상처를 보고, 인류의 아픔을 통찰하고 있습니다.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을까요? 뻔히 들여다보이는 실패를 막고 싶지 않을까요? 혹시 먼 지방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아들은 무모하고 무례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침묵으로 아들을 꼭 껴안을 뿐입니다. 침묵으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아들은 후회하지만, 아버지는 찢어지는 통증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림은 표현할 수 없지만, 짐작컨대 아들의 등을 감싸 안은 아버지의 두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 두 손은 아버지에게 반역하고 떠난 인류를 향해 펼친 하나님 아버지의 손입니다. 그 손은 단 한 번도 거두어진 적이 없습니다. 렘브란트는 축복을 베푸는 두 손을 그린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152)

 

둘째 아들, 맏아들,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 그것은 렘브란트 자신의 자화상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은 자신의 모든 가족들을 먼저 보내야 했던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고난을 겪은 얼굴입니다. 아버지의 유약한 표정 속에는 아들아 내가 너의 아픔을 안다는 음성이 담겨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탕자의 귀향>하나님의 자궁으로의 복귀이자 존재의 근원으로의 회귀’(158)라는 헨리 나우웬의 해설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 표현은 내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아는 것이라 믿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지도 못합니다. 다만 하나님께 발견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잃은 양을 찾아다니는 목자이며, ‘잃어버린 동전을 찾을 때까지 불을 밝히고 집안을 샅샅이 뒤지는 여인입니다.(166)

 

이제는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188)

 

헨리 나우웬은 아버지 같은 신자가 되라고 합니다. 아버지처럼 거룩하고, 아버지처럼 너그럽고, 아버지처럼 사랑하라고 합니다.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말, 마음에 걸립니다. 아들이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에 양심이 찔립니다. 저의 모습이 아닌가 싶네요. 아버지처럼 되라는 말,이것이 복음서가 전하는 메시지의 고갱이(199)라고 합니다. 저는 아버지처럼 되라는 말을 긍휼하라는 말로 바꾸고 싶습니다. 긍휼의 또 다른 이름은 사랑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타인의 아픔을 객관적으로 관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갖으라고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물론이고 세상에 죄까지 마음에 받아 억수같이 눈물을 흘려야(203) 한다고 말합니다. 눈물, 그동안 나를 위해서는 울었지만 타인의 완고함과 죄에 대해서는 울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용서(204) 하라고 합니다. 용서는 훈련이고, ‘이용당하거나 다시 상처를 입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벽’(205)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은 너그러운 마음을 품는 것(205)입니다.

 

이 책을 요약 정리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을 정의한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이지요. 오늘 이 책은 최근 저의 마음과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습니다. 별다른 상처가 없을 때는 단지 은혜스러울 뿐이었는데 오늘은 아프게 다가옵니다. 문득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며, 하나님처럼 살아가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보, 오늘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당신에 제게 해준 말과 많이 겹칩니다. 모름지기 여자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무시할 수 없는 진심으로 들려옵니다. 아직도 고쳐야할 것이 많고, 부족한 면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동안 잔소리 했다고 화 낸 것 미안합니다. 앞으로 좀 더 겸손하게 당신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훈련이니까요. 그래도 수술 후라 몸이 편치 않으니 무리하지 말고 조금만 게을러지세요.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해요


탕자의 귀향
국내도서
저자 : 헨리 나웬(Henri J. M. Nouwen) / 최종훈역
출판 : 포이에마 2009.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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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귀향 특별 기념판
국내도서
저자 : 헨리 나웬(Henri J. M. Nouwen) / 최종훈역
출판 : 포이에마 2016.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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