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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8-25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기

샤마임 2021.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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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8-25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기

1:18-25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시작부터 위기입니다. 약혼하고 동거 하기 전에 마리아가 임신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요셉은 감당하기 심든 위기 앞에 높여 있습니다. 그는 아직 성령으로 잉태된 것을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인이 임신을 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일반 남자라면 자신을 배신한 그녀를 죽이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보여준 사랑의 밀어, 미래에 대한 약속은 거짓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녀는 폭로하거나 복수하지 않고, 그녀의 사건을 알고 조용히 헤어지려 했습니다. 여기서 조용히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상식과 이성을 침공해 들어옵니다. 마태는 예수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마리아와 요셉의 이야기를 먼저 들려줍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우리의 귀를 벙벙하게 합니다.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함은 인지의 한계와 사유의 경계를 뛰어넘어 쳐들어옵니다. 하나님의 사건이 일어날 때, 일상은 위기를 맞이합니다.하나님의 일은 상식이 아닌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상이 무너지고 맙니다. 마리아의 성령 잉태는 요셉에게 일생을 뒤바꿀 위기로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때 믿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일상을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19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의로움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 그에게 현몽하여 모든 일을 설명할 때에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삶이 무너지고, 계획했던 것들이 무산될 때 사람들은 자포자기하거나, 다른 일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한 삶은 어느 곳에도 집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요셉은 조용히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으려 했습니다. 그것은 요셉에게 최선의 선택이었고, 의로운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의 사자는 그의 판단 속에 미숙함이 있음을 알려 줍니다. 인간의 지혜는 결코 완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때로 우리의 최선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이해되지 못합니다. 그때 우리는 조용히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최선보다 더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은 마리아의 임신 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 앞선 족보의 의도를 마리아를 통해 완성할는 하나님의 작정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일' 즉 인류를 구원하시고자하는 하나님의 계획 전체가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인용된 이사야 7:14의 말씀은 하나님의 오래된 구원 계획임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뜻밖의 방법을 통해 일하시며 성취하시는 분임을 다시 한 번 알게 됩니다. 세상이 많은 어둡습니다. 우리의 삶이 모호하기만 합니다. 코로나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위대한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사야의 예언이 자신들의 왕국을 위한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은 실패했고, 가능성은 소멸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좌초되고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결국 바벨론 포로 이후에도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소망은 사치가 되었고, 절망은 반석처럼 단단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잊힌 소망이 성취되었고, 단단한 절망은 벅찬 희망으로 부활했습니다. 단 한순간도 헛된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시간은 분명 존재합니다. 그 특별함은 짓눌리고, 소외되고, 좌절했던 수많은 일상이란 하루가 쌓은 벽돌 위에 있습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먹고 자라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될 그 순간까지 일상을 부여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단 한순간도 우리를 버린 적이 없으시니까요. 하나님께서 그때에 예언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버려졌다 생각하며 절망하며 슬퍼하던 그 많은 날들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했습니다. 애굽에서 바벨론에서, 그리고 지금 칠흑같이 어둔 로마와 헤롯의 통치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 증거가 바로 마리아의 임신이다.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둡다고 너무 슬퍼하지 맙시다. 아프라고 울고만 있지 맙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요셉의 의로움은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빛을 발합니다. 모든 것이 명징하게 드러날 때, 주저하지 않고 마리아를 데려왔고,기꺼이 그 고난에 발을 디뎠습니다. 비겁하게 물러서지 않았고,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계시에 순종하는 사람은 책임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의 아내’(24절)를 데려왔습니다. 마리아를 ‘그의 아내’로 맞이하여 운명의 공동체로 살아갈 것을 결심했습니다. 우리는 명백한 하나님의 계시 앞에서도 얼마나 비겁하교 간교하고 이기적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확장되는가? 믿음으로 위험한 헌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들을 통해 확장됩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금욕을 명하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날 예수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견뎠습니다. 악인은 틈을 타서 악을 행하지만,의인은 기회를 틈타 선을 행합니다. 성경이 금하지 않았음에도 거룩하기를 갈망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자유를 죄가되지 않는다고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영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요셉의 귀한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는 더욱 빛이 납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요셉은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자신이 아들의 이름을 짓지 않았습니다. 천사의 가르침을 받고 잊지 않고 기다렸다가 아들을 낳자 예수라 불렀습니다. 이제 그의 이름을 잊힐 것입니다. 성경은 더 이상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유일한 언급이 있다면 요 1:45와 요 6:42입니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요 6:42)] 믿음은 자신을 잃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기억돼야 합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처럼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려는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는 세상을 구원할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보다 먼저 아들을 잃을 것이고, 그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길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기꺼이 믿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의 의로움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요셉처럼 하나님의 계시에 동참하고, 하나님의 이루어가실 구원의 역사에 사용되기를 기뻐해야 합니다.

 

2. 묵상 글 적기

*이곳은 본문을 읽고 묵상한 다음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적는 공간입니다.
1) 신앙 때문에 손해 본 일은 없었습니까? 그때 어떤 마음이 들었습니까?
2) 자신의 최선보다 하나님의 행하심이 지혜로울 때는 언제였습니까?
3)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당신은 무엇을 희생했습니까?

 

 

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을 정경학적 관점에서 주해하고 강해한 것입니다. 기존의 글을 수정 보완하고 있어서 미완성의 글입니다. 시간되는대로 계속하여 수정해 나갑니다. 마태복음 연구를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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