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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독서편지

[독서편지]8. 우리가 꿈꾸는 교회

by 하늘땅소망 2017. 10. 22.

사랑하는 아내에게 쓰는 독서 편지

8.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길

폴 브랜드, 필립 얀시 / 정동섭 옮김 / 생명의 말씀사


 

우리가 꿈꾸는 교회

 

에레츠, 히브리어로 땅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어제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결단을 하나 내렸습니다. 공식적으로 교회 개척을 선언했습니다. 교회 이름을 에레츠 교회로 지었습니다. 에레츠는 창세기 1:1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이죠. 그러나 히브리어는 좀 더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직역하면, [태초에, 창조했다. 하나님, 그 하늘들과, 그 땅을] 창조했다로 번역하는 바라는 오직 하나님만을 주어로 갖는 동사입니다. 이것은 온 우주와 모든 피조물을 뜻하는 천지를 하나님께서 지으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에레츠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사실에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또 하나의 뜻은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땅을 말하는 아마다라는 단어가 있는데, 아마다는 사람이 생존할 수 있는 삶의 기반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은 아마다로 되어있습니다. 이에 비해 에레츠는 동일한 삶의 기반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적 측면이 부각됩니다. 즉 하늘의 반영으로서 땅(에레츠)이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기업(에레츠)입니다. 이것은 에레츠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의 영역을 의미할 때 사용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공유해야 할 에레츠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에레츠이고, 하늘의 반영(反影)으로서의 에레츠이며,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의 영역으로서 에레츠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피조물로서 겸손해야 하고, 하늘의 반영으로서 거룩해야 하고,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으로서 순종의 삶이 요구됩니다. 그러니 계시의 현장으로서 에레츠는 하나님의 현현이 드러나는 영광스러운 일상을 만들어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어떤 교회를 만들고 싶어요?


당신이 그렇게 질문했을 때, 조금은 당황스럽고 난감했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것이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세우면 되는 것이니까요. 저는 오래전부터 제가 만약 교회를 설립한다면 두 가지 사역에 중점을 두고 싶었습니다. 한 기둥은 교육하는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선교 동력적 교회였습니다. 교육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배우고, 교리와 역사를 배우는 신앙생활이기를 소망한 것입니다. 선교 동력적 교회는 교회의 본질로서의 선교를 성장을 위한 수단이 아닌 전도와 선교를 위한 교회이고 싶었습니다. 선교사를 후원하고 재교육하며, 국내 전도를 활성화하여 여기와 거기의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기대했던 탓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교회는 교회의 운영 방식이지 본질적인 교회의 모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한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우리가 배운 대로 보편적 교회, 거룩한 교회, 지역 교회 등의 서술만으로 왠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최근들어 고린도 전서를 묵상하면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너희가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를 보면서 교회가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원인이 뭘까를 고민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뭔가를 더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이 깊이 파고 들어왔습니다. 도대체 교회가 뭘까요? 당신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전에 읽었던 폴 브랜드*필립 얀시의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란 책이 떠오릅니다. 이 책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책은 우리가 꿈꾸고 있는 에레츠 교회의 상과 기가 막히게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 책을 오늘 당신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아내의 벽장에 아무렇게나 뒹굴던 한 편의 에세이, 그것은 필립 얀시의 전 인생을 뒤흔들었다.”


표지에 적힌 이 문장은 이 책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담고 있습니다. 당시 이십대로 저널리스트로 무명의 작가로 활동하던 필립 얀시는 아내의 벽장에서 뒹굴던 에세이 하나를 발견하고 읽게 됩니다. 그는 읽고 전율했고, 글쓴이를 찾아갔습니다. 그의 이름은 한센병 연구의 탁월한 의사였던 폴 브랜드입니다. 그는 의사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앨버트 래스커 의학상을 받을 만큼 탁월한 의사입니다. 에세이의 제목은 고통의 선물입니다. 명확하게 풀어내면 고통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최고의 선물이라는 요지였습니다. 인도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폴 브랜드는 런던에서 의학을 마치고 다시 인도로 되돌아갑니다. 그곳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며 거의 평생을 보내게 됩니다. 한센병을 연구하면서 그는 놀라운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고통과 깊은 연관이 있었습니다. 한센병 환자들에게 일어난 끔찍한 질병들 즉 발가락과 손가락 절단, 실명, 궤양, 얼굴 기형 등의 원인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센병은 신경 세포의 기능을 마비시켜 고통을 느낄 수 없게 되어 결국 자신을 파괴하게 만듭니다. 고통을 되찾아 주는 것, 아프다고 말하고, 힘들다고 말하게 하는 것이 치료의 시작이었습니다. 한센병에 걸리자 사람들은 먼저 가족에게 배척을 당했고,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소외되고 천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근거도 없는 이야기로 한센병 환자(문둥이)를 혐오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서정주 시인의 문둥이라는 시를 보면 일반인들이 한센병 환자에 대한 오해와 혐오가 얼마나 극심했는지 보여줍니다.


문둥이

- 未堂 서 정 주 -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조선시대부터 한센병엔 어린아이의 간을 먹으면 치료가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서정주의 문둥이라는 시는 이러한 한센병 환자에 대한 혐오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폴 브랜드는 이렇게 혐오의 대상이며, 멸시와 천시의 대상이었던 한센병 환자들을 지극해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천시를 받는 사람들이었지만, 그에게는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무명인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었다. 그는 그 형상을 존중하는 일에 일생을 헌신했다.”(9)


문득 폴 브랜드의 사역이 곧 교회가 이루어야 할 교회의 사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의 약자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회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가장 미천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한 영혼으로 대하고 존중했던 폴 브랜드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네요.


이 책은 폴 브랜드의 글입니다. 그러나 필립 얀시가 그의 글을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이야기로 다시 풀어냈습니다. 마치 폴 브랜드가 뼈라며, 필립 얀시는 살을 붙이고 눈과 손, 머리카락을 만들어 붙였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수십 년을 폴 브랜드와 함께 했던 필립 얀시는 폴 브랜드의 손이 되어 한 권의 책으로 탄생 시켰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폴 브랜드의 정신과 필립 얀시의 문체가 오버랩 되어 완성된 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목차를 들여다보면 모두 네 가지 주제를 다룹니다. 1부에서는 세포를, 2부에서는 뼈를, 3부는 피부를, 그리고 마지막 4부에서는 동작을 다룹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원리를 배울 수 있는 멋진 글이라 여겨집니다. 그럼 폴 브랜드가 그린 설계도와 기초 위에 필립 얀시가 쌓아 올린 멋진 드림 하우스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세포


세포는 몸의 가장 작은 구성 요소입니다. 우리 몸의 전체 세포는 적게는 60조에서 많게는 100조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많은 세포들 중 단 하나의 세포도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철저히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벽하게 이루어내면서도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때가 되면 스스로 자멸하여 사라집니다. 그러면 청소 세포들이 그 세포를 치우고, 그곳은 또 다른 세포로 채워줘 몸은 그대로 유지가 됩니다.


백혈구와 같은 세포는 몸의 군인과 같아 적들이 쳐들어 오면 방어 태세를 갖추고 아군이 아닌 적군으로 파악되면 즉시 공격을 계시합니다.(29) 마음 아프게 백혈구들은 외부로부터 오는 바이러스는 죽인 다음 자신도 죽음으로 끝을 맺’(31)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며 몸 전체를 위해 봉사합니다. 그러나 몸 안의 500억 개의 백혈구가 죽더라도 골수에 100배나 더 많은 부대가 골수 안에 대기 중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분화의 과정을 살펴보면 신묘막측하다는 표현으로만 가능할 것 같습니다. 단 하나의 줄기세포가 분화의 과정을 거쳐 100조개가 되어 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줄기세포는 분화의 과정 속에서 자신의 위치에 합당한 세포로 변화됩니다. 동일한 줄기세포인데 어떤 세포는 손톱으로, 어떤 세포는 심장으로, 어떤 세포는 발가락으로, 어떤 세포는 머리카락으로 변화됩니다. 그런데도 어느 것 하나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거나 다른 세포를 시기하지 않습니다. 완벽한 하나의 유기체로 존재합니다.


몸 안으로 들어가면, 각 수백만 개의 충성스러운 세포들로 똘똘 뭉쳐져 있는 위장과 비장, 간장, 췌장 그리고 신장이 얼마나 유능하게 각자의 기능을 수행하는지 나는 그들의 존재도 의식하지 못한다.”(42)


철저하게 홀로 존재하면서도, 어느 것 하나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벽하게 해내는 세포들을 보면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적혈구는 혈관을 통해 몸 구석구석 산소를 공급해 줍니다. 세포들은 온 지구상에 흩어져 있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45) 교회와 같습니다. 다양하고 각기 다른 모양과 일을 하고 있음에도 그들을 철저히 희생적이며 한 목적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들이 한 몸을 이룰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충성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항명 사건’(86)이 발생합니다. 그들을 자신의 소명을 다하지 않으면서 죽지도 않고 다른 세포들에게 가는 영양분까지 빼앗아 먹습니다. 우리는 그들은 종양이라고 부릅니다. 보통 지방종이라 부르는 낮은 등급을 양성 종양이라 부르고, 강력하게 세력을 확장하며 다른 세포를 파괴시키는 종양을 악성 종양, 즉 암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몸에는 몸을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세포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충성스럽게 순종하는 세포들만을 필요로 하신다.’(90)를 잊으면 안 됩니다.


세포에서 얻는 중요한 교훈은, 먼저 주어진 자기 사명에 충성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다른 세포를 시기하거나 자신의 신세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셋째, 자기희생적입니다. 이 세 가지 만으로도 충분해 보입니다. 그럼 뼈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뼈는 힘을 상징합니다. 뼈가 없으면 힘을 쓸 수가 없고, 심지어 걸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활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뼈에 의존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우리는 뼈를 몸을 지탱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지만 정말 중요한 기능이 더 있습니다. 그것은 뼈 중앙부의 빈 공간이 적혈구 생산 공장’(100)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공장에서 매일 수억 조의 혈구를 만들어 혈관 속으로 보냅니다. 그런 혈구들은 바이러스를 공격하는 백혈구와 같은 면역 세포 기능을 하고, 적혈구처럼 산소를 공급하며, 영양분들이 혈관을 통해 각 세포에 전달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렇게 딱딱한 뼈가 어떻게 그렇게 묵묵히 자신의 일을 감당하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몸의 모든 짐을 매일 지면서도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뼈는 우리에게 부담스레 짐을 지우지 않는다. 뼈는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102) 마치 하나님의 율법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추종자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몸에도 이와 같이 단단한 뼈대가 필요한데, 나는 교회의 교리가 이러한 골격 역할을 한다고 본다. 몸속에는 결코 변하지 않는 진리의 핵이 살아 있는데, 하나님과의 우리의 관계와 우리와 다른 사람의 관계를 관장하는 법칙들이 바로 그것이다.”(104)


저는 폴 브랜드가 누구인지 궁금해집니다. 혹시 이 문장은 필립 얀시가 적은 것일까요? 어쨌든 저는 뼈에서 교리와 법칙을 유추해내는 것에 감탄할 뿐입니다. 근육, 피부, 머리카락, 몸의 지체들은 유동적입니다. 일정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듯하지만 흔들립니다. 그러나 뼈는 제자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자유는 뼈가 자리를 지킨 덕택입니다. 교회는 변할 수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 교회는 변해 왔고, 또 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정의하고, 세우는 진리는 변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영원합니다. 사람들은 뼈를 없애면 자유가 온다고 말합니다. 초대교회 거짓 교사들이 특히 그랬습니다. 갈라디아서와 고린도 전후서를 읽으면 이러한 자유에 대한 이야기 심심찮게 교회 안에서 회자되었고, 적지 않은 교인들이 속아 넘어갔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탐욕이며, 방종이며, 불신이었습니다. 뼈가 부러질 때, 몸은 지탱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유케 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뼈가 골절되었을 때, 우리는 노예로 전락하고’(122) 말 것입니다. 또한 뼈가 성장할 때 실제의 몸도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뼈의 성장은 진리가 변한다는 것이 아닌 확장된다는 의미입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 350개로 이루어진 뼈가 성장하면서 206개로 축소된다고 합니다.(128) 자라면서 불필요한 뼈들은 도태되고 필요한 뼈들은 더욱 강해져 몸을 지탱하게 됩니다.


뼈가 가르쳐준 중요한 교훈을 찾아 봅시다. 먼저 몸(교회)이 힘을 쓰기 위해서는 뼈(진리,교리)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뼈는 혈구 공장이기에 건강에 필수불가결한 존재입니다. 셋째, 뼈는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아 성장합니다. 몸도 뼈와 같이 성장하지 않으면 기형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럼으로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란 고백처럼, 진리를 떠나서는 안됩니다. 교회의 본질이자 존재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깊이 박힌 교회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피부


저자는 피부를 인간 생명과 소통하는 통로로 소개합니다. 피부는 창의 역할’(159)을 합니다. 우리는 피부를 통해 몸이 어떤 상태인지 알게 됩니다. 빈혈에 걸리면 손톱과 피부 위에 창백한 흉상’(160)을 그립니다. ‘황달은 피부를 노랗게 하고 당뇨병과 같은 질병은 피부를 구리색으로 변하게’(160)합니다. 마트 트웨인은 인간은 얼굴을 또는 얼굴을 붉힐 필요가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라고 했다죠. 얼굴을 붉히는 이유가 갑작스럽게 끓어오르는 혈관이 순식간에 반항적으로 팽창되어 평상시의 50배가 넘는 피를 피부로 밀어내는 것’(161)이라고 하니 신기하네요. 결국 붉은 것은 적혈구 때문인 거네요.


피부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가 지각이랍니다. 폴 브랜도 박사가 어느 날 양말을 벗다가 감각을 느끼지 못해 한센병 환자가 된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제발 고통이 느껴지기를 애타게 기다렸다’(166)는 이야기가 솔깃합니다. 고통, 그러니까 피부는 외부의 자극으로 인해 고통을 몸으로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을 합니다. 손으로 뜨거운 것을 만지면 놀라 손을 빼고, 누군가 맨발로 날카로운 돌 위를 걸으면 아픔을 느껴 조심하게 만드는 것이죠. 나중에 알고 보니 다리 신경 하나가 마비되어 있어 신호를 보내지 못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통증을 느꼈을 때 그는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하니 통증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건강하다는 신호였던 것이죠. 우리 피부에는 50만 개 이상의 신호 전달기가 있어 그것을 몸 안으로 전달해 준다고 합니다. 우리 몸을 뒤덮고 있는 잔털들은 촉감을 강하게 느끼게 하는 지렛대 역할을 하, 1온스 즉 28.3g1/1000 무게도 감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170)


의학이 발달하면서 만짐에 대한 자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어릴 적 우린 할머니 손은 약손이라며 할머니가 손자들의 배를 만져주곤 했죠. 당시에는 얼토당토않는 것이라며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연구 결과에 의하면 손으로 만져주면 심신이 편해지고, 마음이 안정되어 치료 효과 높아진다고 합니다. 할로우 원숭이 실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이나 짐승은 만져줄 때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인지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발휘한다고 합니다.(184-188)


저자는 피부, 그리고 만짐을 곧장 만져지는 진리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과 연결하고, 공생애 기간 병자들과 대화하시고 만져주시는 사건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갑니다. 이 만짐의 사건은 의사 전달 기관으로서 사랑을 표현하는 우리의 도구’(189)인 것입니다. 참으로 피부 세포들은 우리가 은유적으로 인간의 마음이라 부르는 깊은 감정의 저수지로 직행하는 길을 내’(188)주는 기관입니다. 어쩌면 주님의 만짐의 사건은 질병의 치유가 아닌 사랑의 표현으로서 행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짐은 마음이며, 만짐은 사랑하는 것이며, 만짐은 서로 소통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피부가 가르쳐준 교회에 대한 가르침을 정리해 봅시다. 먼저 피부(교회)는 소통의 수단입니다. 세상과 하나님의 소통의 통로인 셈이죠. 교회가 소통하기를 거부하면 이미 죽은 교회나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교회는 마음(하나님)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마음은 피부로 말합니다. 추우면 닭살이 돋고, 부끄러우면 얼굴이 붉어집니다. 교회는 거짓 없이 하나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셋째, 정말 중요한 것은 만짐의 사건은 곧 사랑의 표현입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그러하셨듯 사랑의 만짐을 행하는 기관입니다. 소외되고 버려진 자들을 찾아가 만나(만짐)야 합니다.


행동


행동은 뼈, 두뇌, 근육, 기관들이 하나 되어 만들어내는 예술입니다. 어느 것 하나 맞지 않다면 어려움에 처하고 말 것입니다. 오래전에 같이 공부하던 친구 중의 한 명이 뇌전증(간질) 환자가 있었습니다. 공부하다가 갑자기 몸을 뒤틀고 뒤로 넘어지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놀라 어찌할 줄 몰랐는데 여러 번 반복되니 곁에서 잡아주고 다치지 않도록 붙들어 주었습니다. 나중에 뇌전증에 대해 공부해 보니 뇌에서 신호체계가 교란이 일어나 잘못된 곳으로 신호를 보내 일어난 현상이라고 합니다. 좀 더 학문적으로 이야기하면, 뇌의 비정상적인 전기적 활동인 셈이죠. 의학이 발달하면서 일부의 사람들은 사람은 단순한 전기장치나 일정한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왓슨이나 파블로프, 스키너 같은 학자들은 인간을 정의할 때 보상이나 반복 등의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은 정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과도한 스트레스나 만성 피로 등은 건강에 치명적인 해를 가져다줍니다. 사람은 스키너가 주장하는 보상만을 위해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의 유기체로서 서로 완벽하게 소통하며, 자기희생을 통해 몸이 생존하게 합니다. 우리 몸은 생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몸을 움직여 사랑을 표시하고, 진리를 선포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몸을 사용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몸을 죄의 병기가 아니라 의의 병기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지체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결국 세상은 우리의 모습을 통해, 즉 우리가 그분을 육신으로 나타내 보여 줌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알게(278) 됩니다.


행동이 주는 교회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교회는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또한 뇌(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잘 따라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생존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유기적 연합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행동하는 교회가 되어야 함을 말해 줍니다.



오늘 당신과 함께 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나는 한적하고 평안해 보이는 집을 보면 그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당신은 늘 교회를 위해서 교회 아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를 고민했죠.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교의학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실제적인 의미를 찾고 싶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교회는 분주함과 성장, 그리고 부흥이 아닌 그리고자유’ ‘치유였습니다. 그래서 한적한 곳을 찾으며 저런 곳에 쉬어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같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방황하는 아이들을 보며 안타까워하며 그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살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본질적인 뼈(진리)와 가깝다면 당신은 소통하고 희생하는 세포와 피부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필립 얀시의 문학적 재능으로 덧입혀진 폴 브랜드의 에세이는 이 땅의 교회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최고의 책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이 책으로 교회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할 수는 없지만 교의적으로 교회를 생각하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사유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이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여보! 우리가 세워갈 에레츠 교회도 자기희생적이며, 서로 소통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며, 이 지역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로 세워져 나가기를 기도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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