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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독서편지

[독서편지] 7. 그리스도인은 어떤 존재인가요?

by 하늘땅소망 2017. 10. 21.

사랑하는 아내에게 쓰는 독서 편지

7. 세상의 속의 그리스도인

자끄 엘륄(Jacques Ellul) / 박동열 옮김 / 대장간


그리스도인은 어떤 존재인가요?

 

그럼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해?”

며칠 전 당신이 하나님은 어디 계시나요?’라고 물었을 때, 십자가에서 함께 아파하신다고 답을 했지요. 어쩌면 이런 답은 고통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암울한 마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 했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라 했으니 고난이 삶의 양태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존재는 늘 우리에게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월터 브루그만의 <시편의 기도>를 함께 읽으며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하나요? 그곳에서 아직도 생생한 잔상이 남아있는 초월을 향한 굶주림이란 구절이 있어요. 저는 이 표현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적절하게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초월적 존재에 대한 갈망은 유한한 인간의 고향이 초월적 영역에서 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역해보면 하나님은 사람의 고향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의 시작이자 마지막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ad te)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우리 안에서(in te) 안식할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quia fecisti nos ad te et inquietum est cor nostrum, donec requiescat in te.)

우리는 고백록을 통해 인간은 본성적으로 종교적이며, 초월자를 갈망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존재인 것이죠. 그러데 여기서 우리의 고민은 시작됩니다. 그럼, 하나님을 향해 또는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무엇일까요? 날마다 기도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요? 세상에서 나와 기도원에 들어가거나, 수도사들처럼 그들만의 공동체를 꾸려 사는 것일까요? 도대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도록 불렀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속해 있다는 것이며, 세상에서 나가면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은 일상을 하나님의 소명의 공간으로 인식했습니다. 수도사 루터는 수도원을 버리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고, 칼빈은 직업을 소명(Calling)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세상의 정신이 우리 안으로 들어올까 싶어 경계합니다. 그래서 타락한 세속을 벗어나 사막의 은둔자가 되고, 수도원에 들어가 고독한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이런 갈망은 어떤 의미에서 깊은 초월에 대한 갈망이 아닐까요?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싶은 마음, 거룩하고 싶은 열망, 순수함을 지키고 싶은 열정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떠날 수 없습니다. 아니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소명자이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기 위해 세상을 모두 떠나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독립적으로 산다면 세상의 종말이 오고 말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에 복음을 전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것입니다. 병이 깨져 향수가 향기를 날릴 때 진짜 향수인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되는 때는 세상 속에 있을 때입니다. 그러니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세상이 우리의 소명을 이루는 곳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지만, 세상을 떠나고 싶은 양가적 마음으로 갈등하는 존재인 듯합니다. 이러한 불편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할지를 알려주는 한 권이 책이 있습니다. 자끄 엘륄 (Jacques Ellul)<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 바로 그 책입니다. 원제는 ‘Présence Au Monde Moderne.’인데 영어로 ‘The Presence of the Kingdom’로 번역했습니다. 프랑어를 직역하면 현대 세상 속에 임재쯤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 어법에 맞게 의역하면 현대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로 번역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제목이 말해주듯 이 책은 그리스도인들이 현대라는 세상 속에서의 존재방식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자끄 엘륄! 그의 이름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존재입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입니다. 한 부류는 이상한 사람이거나 편협적인 사람입니다. 아니면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이든지. 또 한 부류는 번역되는 책마다 족족 읽어대는 마니아들입니다. 중독성이 강해 한 번 그에게 빠져들면 어지간해서는 헤어 나오기 힘든 사람입니다. 자끄 엘륄의 첫 만남이 언제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1995년이었을 겁니다. 교회 청년부의 어떤 자매가 이 책을 읽고 너무나 좋다며 저희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했습니다. 당시 저는 그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그런 책에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늦은 나이에 고신대에 들어가 자끄 엘륄을 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책은 읽기 쉽지 않았고, 스스로 보수적이라 생각했던 나에게 엘륄의 주장들은 대단히 낯선 것이었습니다. 이상하리만치 사회주의적 냄새가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지독한 보수주의자였던 저에게 엘륄의 사상은 낯설고 파괴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다 신학대학원에 들어가면서 다시 엘륄을 읽게 되면서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경이로움을 경험했습니다. 한 번 엘륄의 세계에 빠져들자 모든 돈을 끌어모아 엘륄의 책을 구입했습니다. 아마도 당시 번역된 80% 이상의 책들은 거의 읽은 것 같습니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을 비롯하여, <뒤틀려진 기독교> <기독교와 무정부> <하나님이냐 돈이냐> <인간 예수> <도시의 역사> <자유의 투쟁>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서구의 배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존재의 이유> 등 거침없이 읽어 나갔습니다. 지금은 대장간 출판사에서 엘륄의 책을 정식 계약하여 일괄적으로 출간하지만 당시만 해도 여러 출판사에서 다양한 형태로 출간되고 있었습니다. 한울, 솔로몬, 규장, 대장간 등에서 출판되었죠. 그리고 박건택 교수님이 자끄 엘륄 수업을 열자 룸메이트였던 신주언 전도사와 함께 수강했습니다. 그 후로 자끄 엘륄은 다시 잊힌 것 같습니다. 졸업 후 전임 사역을 시작하면서 현실의 필요에 의해 자끄 엘륄은 밀려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다시 에륄의 책을 접하면서 당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자끄 엘륄은 글은 강하고 비판적이지만 사람으로 친절하고 온유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엘륄을 비판적인 인물로 생각하는 이유는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한 프랑스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1912년 프랑스 보르도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탁월한 실력을 가지고 있어서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연구부장으로 지명되었으나 비시 정부에 의해 해임되었죠. 보르도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936년에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역사학과 사회학 분야에서도 박사학위를 취득하기에 이릅니다. 1936-1939년까지 정계에서 활동했고, 1940-44년까지 2차대전이 한창일 때 레지스탕스 운동에 열렬히 가담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칭 기독교 아나키스트로 소개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고, 자신도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갔습니다. 법학자요, 사회운동가이며,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신세계는 기존의 신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이 보지 못한 새로운 방식으로 종교와 세상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칼 마르크스와 쇠렌 키에르케고어는 그에게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입니다. 현재 대장간 출판사를 통해 30권이 넘는 그의 책들이 번역 출간되고 있으니 그에게 관심이 있다면 깊이 파고 들어가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세계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

이 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 말은 자끄 엘륄의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다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의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알다시피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과 구별되어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자끄 엘륄은 우리에게 어떤 조언을 할까요?

우리는 세상 속에 있으나 속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종말의 때, 그러니까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는 마지막 때가 아닌 이상 우리는 세상을 떠나 존재할 수 없고, 떠나서도 안됩니다. 세상 속에 거하는 것, 그것이 가장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소명의 방식입니다.

성서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데, 먼저 그는 세상 안에 있고 또 세상에 머물러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분리되거나 동떨어져 있으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39)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의 전제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있어야 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막이나 수도원에 들어가 사는 것은 바른 삶의 방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쉼을 위해, 기도를 위해 잠깐 머물 수는 있으나 삶의 터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미국의 어떤 교단처럼 수백 년 전의 옷과 생활방식을 고집하며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것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섞여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38)

그리스도인은 존재함으로 나타냅니다.

엘륄은 그리스도인의 존재방식에 대해 레위기 2:13소금 언약에 주목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이란 세상 사람들 앞에서 또 세상의 영적인 실재 속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맺은 새로운 언약의 가시적인 징표’(40)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존재 자체가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가시적 징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징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에서 드러나는 것인데, 그것은 종말론적 삶’(52)이며, 세상을 보존하고 구원하는(58) 삶이어야 합니다. 소금이 보존이라면 빛은 구원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아직 정확한 이해는 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그리스도인은 존재 자체로 세상을 보존하고 구원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혁명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혁명적인 그리스도인

그리스인은 필연이란 역사 속에서 혁명적 변혁을 가져다주는 사람입니다.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에 생명으로 침공해오는 반란자들입니다. 재림을 기다린다는 말은 곧 소망의 삶인데, 그 소망은 종말을 향한 열망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없고 오직 종말론적 시각으로만’(65) 살아가야 합니다. 종말과 혁명의 아이러니는 그리스도인들의 존재방식입니다. 세상에 속한 모두는 세상을 보존하는데 동의’(66)합니다. 심지어 피의 혁명을 기대하는 공산주의자들마저 세상에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려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종말을 기대하는 그리스도인들과는 다릅니다. 이 땅에 안주하려는 종교는 어떻습니까? 그들 역시 대중의 지지를 얻어 세상 속에 자신을 묶으려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산다고 할 때, 그것은 세상에 대한 도전이며 항거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의 상황은 필연적으로 혁명적이고 달리 어떻게 될 수 없’(78)는 것입니다.

두 도성의 사람들

그리스도인은 두 도성에 속해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주장했고, 루터가 재해석하여 주창했던 이론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세상에 속해 있어도 그의 기반, 즉 그의 이데올로기적 기반, 진리와 충성의 기반은 다른 곳’(80) 하나님의 나라’(81)에 있습니다. 혁명적이라 함은 예언자가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나라)를 보았고, 종말을 향해 치닫는 세상에 대해 예언하듯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 나라와 진리의 이름으로 (세상을) 심판’(85)해야 합니다. 심판의 예언은 세상 사람들에게 종말을 직면시키는 것입니다. 그 예언의 핵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89)이 있습니다.

그럼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비록 자끄 엘륄의 주장이 명료하지 못한 점이 있지만 1.2장은 그리스도인이 누군인지 정의하는 것에 집중한 것 같습니다. 첫 장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에서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존재로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말합니다. 두 번째 장인 혁명적인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인 존재 자체가 혁명적일 수밖에 없음을 주장합니다. 소금과 빛의 정체성이 가지는 보존과 진리의 명징함을 통해 썩어지고 모호한 세상이 명료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는 상대적이기 때문에 진리가 거짓 앞에 설 때 거짓임이 탄로 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대적이 되며, 고난은 불가피한 삶의 운명이 됩니다. 복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 사이의 긴장을 경험하는 평신도’(50)로 살아가게 됩니다. 자끄 엘륄의 말을 직접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이 땅의 소금, 세상의 빛, 이리들 가운데 양이 의미하는 것을 살아내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지 형식들의 총체로 남아있는 하지 말아야 하며, 실천적인 형태를 띠고 구체적으로 삶의 한 요소가 되어야만 한다.”(51)

저는 자끄 엘륄이 사용한 혁명’ ‘투쟁이란 험악한 표현은 이러한 의도라 여겨집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 대해 근본적인 필요성과 문명에 대해 철저한 변혁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63) 그리스도인은 혁명과 변혁을 시도하는 주체이어야 합니다. 그럼 무엇을 변혁해야 하는가?

수단화된 가치를 변혁해야 합니다.

세 번째 장에서 엘륄은 세상이 수단화되었다고 말합니다.(101) 예를 들어 공산주의가 피의 혁명을 통해 파라다이스를 만들고자 합니다. 문제는 다가오는 인류의 행복을 만들고자 공산주의는 현재의 인민을 희생’(104) 시킨다는 것입니다. 제가 듣기에 이것은 영국 속담처럼 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치지 말라는 말과 통합니다. 목적이 아무리 고상해도 과정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첫 번째 사명은 목적이 아닌 수단에서도 여전히 거룩해야 하고 정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수단화된 세상은 수단 자체가 목적이 되어 합리화하여 모든 것을 왜곡시킵니다. 수단화의 간교함은 더 이상 고상한 목적을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섬뜩한 것입니다. 수단에 함몰되어 고상한 가치를 찾지 않는 수단적 존재로만 머물려 합니다. 즉 더 맛있는 비프스테이크를 위해 죽으며,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 싸움 속에 휘말리고 맙니다.(105) 문득 전에 읽었던 C. S. Lewis의 한 구절이 생각이 납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라면, 우리 안에는 이미 천국에 대한 갈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천국이 아니라 다른 대상으로, 때로는 정반대의 대상으로 그 갈망을 채우려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처한 상황입니다."(영광의 무게, p15)

 

루이스의 글을 읽고 갑자기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교회 사역을 하면서 진정한 가르침이 아닌 교인들을 수단화시켜 나의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은연중에 연말이 되면 제가 맡은 부서의 성장률을 자랑하고, 내가 사역한 교회마다 얼마나 성장했다는 식의 자랑을 하곤 했었죠. 이것이야 말로 우리 사역자들이 조심하고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겸손을 가장한 게으름이나 진실이란 포장으로 둘러싸인 가식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우린 철저히 하나님 앞에 독단적 소명자로 살아감이 마땅합니다.

저는 초반에 초월에 대한 굶주림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이것은 월터 브루그만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어거스틴 신학의 중요한 모티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안인지. 초월, 즉 목적을 상실한 인간들은 필연적 존재로 추락하여 속물적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우상숭배이라고 말합니다. 수단이 전부가 될 때 세상은 무의미로 환원되고 말 것입니다. 저는 자끄 엘륄이 수단에 의하여 세상에서 추방된 예수’(130)라는 표현은 의미심장한 통찰이라 확신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수단은 수단으로, 목적은 목적으로 원상복귀하기 위해 살아가셨다고 믿습니다. 죄 없으신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결국 이 세상이 본질적으로 악하며 부패되었다는 것은 보여주는 징표라 믿습니다. 주님은 다시 부활하심으로 이 세상을 정죄하시고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만이 진정한 가치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의 현현입니다. 종말론적 삶이란 늘 하나님의 나라를 삶 속에서 나타내며, 세상의 전복된 가치에 도전하며, 수단을 수단으로만 여기며 성령의 삶을 살아야’(133)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전이며,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효율과 기술 문명이란 수단 속에서 궁극의 목적을 상실한 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종말론적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존재 자체로 충분히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언어를 회복해야 합니다.

수단화된 사회는 소통의 부재로만 존재합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에 합당한 수많은 합의적 논의와 토론은 폐쇄적이며,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말을 하나 들리지 않고, 들으나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언어를 발견’(172)해야 합니다. 언어는 소통이고, 소통은 관계를 형성합니다. 언어의 발견은 곧장 소명의 발견으로 이어지며, 다시 증언의 언어를 회복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건의 증언자들입니다. 그 사건은 역사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개입한 사건이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176)의 성육신입니다. 그리스도의 사건은 세상을 새롭게 보도록 변혁을 요구합니다. 오직 이 관점만이 삶을 인격적으로 경험하게 하고, 삶의 의미와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관계의 의미를 재발견하도록’(176) 도울 수 있습니다. 존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시작하면서, 사람이 자신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피조물,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 바로 그것이 사람의 자리이며 수단에 종속되지 않고 진정한 가치를 찾아가는 시발점입니다.

다 읽고 나니 자끄 엘륄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조금 이해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행위보다 존재가 우선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에릭 프롬이 인간을 소유적 존재가 아닌 존재론적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고 했을 때, 인간 자체(존재)가 목적이어야 함을 말했습니다. 그럼 인간 자체, 즉 그리스도인 자체로 살아간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엘륄은 이것을 계시에 대한 이 신실함을 일상생활 속에서 구제화하는 것’(194)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계시적 존재입니다. 계시는 하나님의 질서이며, 세상의 필연적 질서에 혁명적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썩어짐에 종노릇하는 세상에, 생명의 질서를 부여하는 삶, 그것은 오직 전도와 복음의 선포를 지향’(200)하는 삶입니다.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자리를 인식하며, 세상과 대화하되 타협하지 않으며, 수단화된 질서 속에서 영원한 목적을 향하도록 증언하는 삶,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시대의 사람들의 구체적인 상황을 진실로 진지하게 고려할 때, 그들의 고뇌에 부르짖음을 들을 때, 왜 그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되지 않은 복음을 원하지 않은지를 이해할 때, 우리가 그들의 육적이고 영적인 고통, 그들의 절망과 그들의 버려짐에 참여할 때, 예수께서 방황하는 무리들, 즉 목자 없는 양 떼들에 대해 한 것처럼 우리 동족과 보편 교회와 연합할 때,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 목소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릴 수 있을 것이다.”(189)

사랑하는 여보! 우리 이런 교회를 함께 만들어 나가기를 원합니다. 어제 저녁 공원에 있던 아이들을 보며 심장이 두근거린다는 이야기가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결혼 후 사역을 함께 쉬면서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사역을 할 때는 쉬고 싶었지만, 사역을 내려놓자 당신은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다시 사역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외롭고 힘들었던 아이들이 당신 품에서 회복되고, 꿈을 가지고 살아갈 때 당신은 행복을 느꼈습니다. 당신을 보고 있으면,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이란 추상적인 언어보다 어쩔 수 없이 살아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다면 '계시적 삶이 살아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시 광야에 있습니다. 서류를 넣은 교회마다 거절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정도 있을 것이고, 우리의 상황이 그 교회에 맞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역하고 싶지만 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의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오늘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우리가 꿈꾸고 기도했던 교회를 다시 시작하고자 합니다. 당신의 건강이 회복되어 다시금 그리스도의 사건을 교회 안에서 실현해 나가기를 원합니다. 당신과 함께 아름다운 꿈을 가꾸어 나가기를 소망합니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국내도서
저자 : 자끄 엘륄(Jacques Ellul) / 박동열역
출판 : 대장간 201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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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엘륄의 생애와 사상
국내도서
저자 : 박건택
출판 : 솔로몬 2012.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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