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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독서편지

[독서편지] 6.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 건가요?

by 하늘땅소망 2017.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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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내에게 쓰는 독서 편지

6.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

위르겐 몰트만 / 김균진 옮김 / 한국신학연구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 건가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 걸까요?”

갑자기 당신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그 질문은 저의 심장을 예리한 송곳으로 찌르듯 마음이 아팠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밝았기 때문입니다. 내일 당장 굶을지언정 오늘은 행복하자는 것이 당신의 철학이었고,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그런 당신의 입술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묻는 질문이 나오자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미안했습니다. 당신이 물었던 그 질문은 제가 늘 당신에게 했던 질문이고, 당신은 그래도 하나님은 계실 거야!라며 확신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당신이 하나님의 계심에 대해 물으니 저 때문에 당신이 더 힘들어졌는가 싶어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우리 둘만의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까닭 없이 고통을 당해야 하고, 통제할 수 없는 삶의 무게로 생존이 위태한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이 질문을 입에 달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재를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묻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의 부재를 말하는 듯하지만, 마음은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마지막에 시인은 이렇게 고백하죠.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11)

원수는 여전히 자신을 죽이려 합니다. 피난처는 없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시는 겁니까? 그럼에도 낙심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라는 시인의 고백은 하나님의 부재 속에서 하나님을 포기할 수 없는 신앙적 갈등이 담겨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딱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만질 수도, 보이지도, 느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욥의 아내처럼 용감하게 하나님을 버릴 수도 없는 인생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부재로 인해 하나님의 존재를 묻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그래서 오늘 당신과 함께 읽고 싶은 책이 있습니다. <희망의 신학>으로 유명한 위르겐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입니다. 제가 이 책은 당신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은 지난번에 읽었던 기타모리 가조의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에도 언급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이전에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읽었고, 김승철 교수의 <엔도 슈사쿠, 흔적과 아픔의 문학>을 같이 읽으며 고난이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방식이 무엇인가를 고민했습니다. 당신은 엔도 슈사쿠의 책들을 읽어가며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연대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는데, 오늘 당신은 갑자가 그 표현에 대해 회의를 제기했습니다. 가진 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의 연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아닐까 하고. 맞아요. 어쩌면 빈자들의 연대는 가진 자들에게는 '빈자(貧者)들의 광기'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조롱에도 이 땅에 오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셨다면 옳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엔도 슈사쿠의 경우는 과도한 범신론적 사유로 인해 우리가 가진 전통 신앙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초월적 하나님을 버려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초월적 하나님에 함몰되어 에레츠의 삶을 망각한다면 신학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에레츠, 그러니까 태초에 샤마임(하늘)을 만드시고, 에레츠()도 지으셨습니다. 에레츠는 샤마임의 나중이기보다는 동시에 만들어졌으며, 샤마임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샤마임이 아니라 땅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위르겐 몰트만의 책을 통해 우리의 고난이 가지는 의미와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의 주제는 십자가의 신학입니다. 이 주제의 가장 독보적인 인물은 종교개혁자 루터입니다. 그는 이신칭의를 통해 성경 해석의 지각변동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함으로 낯설고 이질적인 하나님이 아닌 지금 우리의 귀에 대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삶으로 증언했습니다. 종교개혁은 구텐베르크 인쇄술로 인한 읽기 혁명이었고, 성경 해석의 코페르니쿠스적 관점을 제안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루터의 이신칭의 핵심이 바로 십자가 신학에 있다는 것입니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중세의 신학을 주도했던 공로와 자기 구원에 몰두했던 중세의 타락한 영광의 신학의 급소를 과격한 것입니다. 영광의 신학은 이기적인 신학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공로를 인정하고, 겸손을 닮을 듯하지만 교만한 신학입니다. 영광의 신학은 공동체가 아닌 개인의 영성과 체험을 중요시하여 신앙을 편린화 시키고 사유화 시킵니다. 그들에게 함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신학에서 인간의 교만은 설자리가 없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십자가에 달린 그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절망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공식적인 선언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하나님의 무능함을 드러내시면서, 가장 약한 것으로 모든 인유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강함을 보여줍니다. 가장 약함으로 가장 강함을 보이시는 곳이 십자가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신비와 역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죽음으로 살리시고, 고난 당하심으로 치유하시고, 아파하심으로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가장 절망스러운 장소에서 희망이 시작됩니다. 십자가는 신학이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레츠)에 있어야 할 것을 천명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신학의 좌소이며, 시작이며 끝이어야 합니다. 당신이 했던 질문과 연관을 시켜보면, 하나님의 관심은 천사(하늘)가 아니라 죄인()에 있는 것이죠. 그러기에 몰트만은 기독교적 실존은 십자가에 달린 그분의 뒤를 따르면서 인간 자신과 사회적 상황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실천’(45)이라고 말합니다. 실천, 즉 삶이 있는 것이 기독교의 본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책을 읽다가 의미심장한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와 반대되는 것에서, 무신성에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상태 속에서 하나님으로 계시된다. 그의 은혜는 오직 죄인들에게서 나타난다. .. 십자가 신학의 인식론적 원리를 오직 이 변증법적 원리일 뿐이다.”(49)

어디서 많이 들어본 문장 같지 않아요. 김승철 교수의 엔도 슈사쿠 문학을 표현하는 문장과 거의 흡사합니다. 시편 42편에서 그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찾음은 부재를 말하고, 갈망은 채워지지 않음을 알려 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계시기에 찾는 것이고, 채워짐을 알기 때문에 갈망하는 것입니다. 몰트만은 기타모리 가조의 책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하나님의 고통이 우리를 치유한다.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 자신이 고난 당하신다는 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75)

그렇다면 몰트만이나 기타모리 가조의 주장은 결국 하나님의 부재는 하나님의 존재다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또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왜곡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임재를 부재로 인식하는 왜곡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현현에 집착한 나머지 고난 당하는 자들과 함께 고난 당하시고 우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왜곡, 바로 영광에 신학에 함몰된 우리의 모습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후 4:10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길, 곧 고난의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처럼 산다는 말은 예수께서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는 말과 동일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일은 곧 예수처럼 사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고난을 하나님의 버림이 아닌 하나님의 임재로 해석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십자가의 신학을 통해 자신의 사도직을 해석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는 것(6:4)이며,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세상에 대해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6:14)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몰트만은 참된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에 달린 그분은 인식하는데 있,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102)

그런데 저는 종종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란 제목을 보면 신약 시대에 이단이었던 성부수난설(聖父受難說, Patripassianismus)는 아닌지 생각이 듭니다.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것이라 봅니다. 성부 수난설은 사벨리우스가 주장하여 사벨리아니즘(Sabellianism)이라고도 부릅니다. 그의 성부수난설은 이런 것입니다. 한 문장으로 풀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면 그는 마땅히 성부와 똑같은 분이므로 그가 수난을 당한 것은, 곧 성부께서 수난을 당한 것이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심각한 신론적 오해가 있습니다. 삼위는 없고 오직 일신만 존재합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구분이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함으로 하나의 하나님만을 강조한 탓에 일어난 오해입니다. 그런데 몰트만의 책은 그러 뉘앙스가 강하게 느껴집니다. 저의 생각을 알았는지 몰트만은 3장에서 예수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는 아타나시우스의 신앙고백을 통해 해답은 성육신에서 찾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되었고, 이리하여 이제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허무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본질을 취하셨고, 그리하여 허무하고 죽어야 할 존재자들이 불변성과 불멸성을 얻게 되었다.”(129)

이 문제는 6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에서 집요하게 파고 들어갑니다. 과연 십자가에 달린 분은 누구인가? 그는 칼 바르트가 가톨릭 신학자였던 칼 라너보다 신학적으로 십자가에 달린 그분의 헌신, ... 이 예수의 죽음 가운데서 하나님 자신의 충만한 삼위일체를 보았다’(282)고 증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비하 즉 예수를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감추심으로 완벽하게 드러내십니다. 그것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를 드러내시고, 인간의 절대적 소외와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루터가 발견한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죄된 존재와 우리의 죽음에로 자신을 비하시키는 것을 십자가에서 발견’(299)합니다. 배척하시고 소외시키시는 십자가에서 배척하시고 소외시키는 죄인들을 끌어안으시는 모순되고 역설적인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에 대한 모순은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개념의 직관’(343)일 수밖에 없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몰트만은 십자가의 사건, 즉 아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죽음과 아버지의 아픔으로부터 다시 살게 하는 사랑의 영이 생성되는 하나님의 사건의 시작’(360)이라고 선언합니다. 저는 이 문장에서 하나님의 아픔이라는 놀라운 구절에 가슴 저미는 통증을 느낍니다. 이런 표현은 기타모리 가조의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의 주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부수난설을 주장한 사벨리우스에 대항하여 터툴리아누스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를 구분하여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의 십자가의 고통에 대해 동정했다고 표현합니다. 동정은 아파함이고, 같은 마음으로 고통을 느낀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당신이 던진 질문에 굳이 답을 하자면 십자가에 있습니다.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십자가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저는 아직 명징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엄밀하게 십자가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는 표현도 실존적 언어로 해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당연한 것이고,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그것은 단지 거룩하라는 말씀이기 보다 연약하고 무능한 죄인이라는 인식과 함께, 그럼에도 너희를 사랑한다는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답을 하니, 위로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럼 고난을 고스란히 당하란 말인가?라는 억울함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너무 슬퍼하지 맙시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인간의 연약함을 읽습니다. 또한 한 편으로 하나님의 무능함으로 하나님의 강함을 보여주신 십자가의 소망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용서이며, 또한 부활에 대한 소망입니다. 또한 고난받는 자들은 존재 자체로 세상을 정죄합니다. 그들의 사랑 없음, 그들의 이기주의 그들의 악함을 폭로합니다. 몰트만이 마지막에서 정신 해방’(7)정치적 해방’(8)을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요?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지 않는 것은 참된 기독교가 아니라고. 이웃의 아픔을 무관심으로 일관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마음은 아닐 것입니다.

결론을 내려 보면, 제가 당신에게 명확한 답을 줄 수는 없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당신이 재차 물었던 이렇게 그냥 지내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답이 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은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당신의 수술, 저의 무릎 수술까지 이어지는 아픔들이 마음을 짓누르지만 존재만으로 우리의 할 일은 다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당하는 우리에게는 고통이지만, 저희를 통해 위로받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리라 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존재와 고난의 의미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당신이 행했던 수많은 베풂의 결과가 가슴의 종양으로 남겨진 것이라는 생각은 버립시다. 그 종양은 부끄럽거나 우울한 것이 아니고 잠 못 자고, 제대로 먹지 못하며 가난에 허덕이면서도 교회 아이들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당신의 흔적입니다. 저는 당신이 그 종양 속에서 우리를 격렬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우리의 고난 가운데서도 십자가 안에 숨겨지고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을 보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는 당신이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필자가 사용한 책은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출간한 책이지만 이 책은 절판된 상태이고, 2017년에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재출간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국내도서
저자 :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 / 김균진역
출판 : 대한기독교서회 2017.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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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국내도서
저자 : J.몰트만 / 김균진역
출판 : 한국신학연구소 1979.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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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범숙씨 2017.10.19 05:31

    “ 절벽 끝에 서 있는 사람을 잠깐 뒤돌아보게 하는 것 . 다만 발걸음이라도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 그것이 詩일 것이라고 오래 생각했다” 라는
    어느시인의 말 이 떠오르게 하는 님의 글을
    새벽녁에 읽습니다.

    님께서 아내에게 쓰신 몇편의 편지를 읽었는데
    오래전에 물든 습관처럼 내앙상한 손가락이
    가슴을 쓸어내리곤 합니다.
    고요하고 명징한 이 새벽에 기도조차 할 수 없이 모래알처럼 쓸려오는 번뇌가 오늘처럼 내 목을 채울때 님의 편지를 만나게되었습니다.
    님과 아내분에게 허그를 보냅니다.

    오늘은 날씨가 따뜻하면 좋겠습니다.
    이곳은 이틀 연속 구름이 햇빛을 막고 있거든요.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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