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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과 기고글]/국민일보

[기독교고전읽기] 어거스틴 삼위일체론(De Trinitate)

by 하늘땅소망 2017. 10. 18.

[기독교 고전 읽기] 

어거스틴 삼위일체론(De Trinitate)


*이글은 마이트웰브에 기고한 글입니다. 


1. 서론


어거스틴의 책이 벌써 7번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교부 문헌 중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책입니다. 많이 번역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거스틴의 저작 중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인간의 길로 간주되는 삼부작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고백록>입니다. 또 한 권은 특이하게도 <신국론>을 꼽았고, 나머지 한 권이 오늘 함께 다룰 <삼위일체론>입니다. <고백록>의 경우는 어거스틴의 개인적 삶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신국론>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묻는 여정입니다. 마지막 오늘 함께할 <삼위일체론>은 신학적이면서 내면의 깊은 사색을 통해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는 여정입니다. 또한 세 권은 어거스틴의 책 중에서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입니다. <고백록>은 감독이 되기 직전에 쓴 초기의 작품에 속하지만, <신국론><삼위일체론>은 그의 말년에 지은 작품들입니다. 그중에서도 <삼위일체론>의 경우는 가장 나중에 저술한 어거스틴 최고의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번역된 삼위일체론은 필자가 원텍스트로 삼은 성염 교수가 번역한 분도출판사판이 있고, 전 서울대 종교학 교수였던 김종흡의 번역으로 CH북스에 출간된 <삼위일체론>이 있습니다. 김종흡의 번역은 영어를 중역한 것 입니다.


저는 김종흡의 <삼위일체론>(CH 북스)을 참고하되 본 텍스트는 성염 교수가 번역한 분도출판사의 <삼위일체론>를 따를 것입니다. 숫자만으로 된 것은 성염 교수의 번역이고, 김종흡의 번역은 (김종흡, 45) 식으로 인용을 밝힐 것입니다. 김종흡의 책은 윌리언 G. T. 쉐드의 해설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쉐드의 해설은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를 해부하기보다는 초대교회 교리사적으로 어떤 흐름을 따라 진행되었고, 어거스틴의 삼위일체가 가지는 특징들을 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에 비해 성염의 책은 60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집필 배경 및 신학적 고찰, 본서의 각 장을 요약하고 정리해줍니다. 가톨릭 교수이기에 사용된 용어와 신학적 이해가 조금씩 상충(相沖)되어 고민을 해야 하는 부분도 있지만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에 대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해설이기 때문에 반드시 읽어야 합니다. 필자도 성염의 해제 부분에 근거하여 책을 요약하고 정리해 나갈 것입니다. 다만 신학적 해석과 관점에 있어서는 개신교적 관점으로 재해석할 것입니다.


2. 삼위일체의 역사


초대교회의 논쟁은 삼위일체 논쟁입니다. 초기의 이단에 속하는 말시온 등의 영지주의자들은 가현설을 주장하여 예수의 하나님 되심, 즉 신성을 부인했습니다. 이런 영지주의적 이단들은 요한서신서에서도 보이듯 사도들이 활동할 당시에도 교회 안에 뿌리내리고 있던 이단들이었습니다. 2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들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큰 세력을 형성하기에 이릅니다. 가장 대표적인 이단은 말시온이며, 그는 하나님이 인간으로 태어나심에 대한 성육신을 부정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구별하여 다른 하나님으로 상정합니다. 말시온의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진노와 십자가의 사랑이라는 논리적 모순을 참지 못한 어설픈 인간적 사유의 결론에서 나온 것입니다. 영지주의 자들은 헬라 철학의 영향을 깊이 받아 철학으로 기독교를 재해석하여 새로운 종교를 만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성부 하나님의 신성만을 강조하거나, 성자를 성부에 종속된 존재로서 주장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소위 단일신론으로 부르는 또 다른 이단들이 교회 내에 등장하는데 역동적 단일신론자였던 사마사타의 바울이 있습니다. 그는 아들을 단순한 한 인간으로 보았고, ‘성령은 사도들에게 준 하나님의 은혜에 한정했습니다. 양태적 단일신론자인 사벨리우스의 경우는 세 가지 양식 안에 한 본질이 있다고 주장하여 삼위가 아닌 한 하나님의 세 형태로 왜곡시킨 것입니다. 이에 대항하여 교부인 터툴리안은 <프락세아스에 대적하여>에서 삼위를 주장하여 삼위일체를 최초로 주장합니다. 아마도 성자 예수에 대한 논쟁으로는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논쟁이 가장 유명합니다. 성자가 피조물이라는 주장에 반대하여 아타나시우스는 성자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며, 성부와 동등하며, 성부와 함께 영원하다고 주장합니다. 니케아 회의(325)와 콘스탄티노플 회의(381)에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공존하는 것으로 거의 마무리합니다. 여기에 갑바도기아 세 교부들이 큰 신학적 공을 세우게 됩니다. 이것을 어거스틴이 받아 삼위일체론에서 현대 교회가 수용한 거의 완벽한 삼위일체론을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어거스틴 이전의 논쟁이 예수의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면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은 예수의 인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입니다.


삼위일체론이 중기까지 성자 예수에 대한 논쟁이었다면 후기로 넘어가면 성령 하나님에 대한 논쟁으로 넘어갑니다. 물론 두 논쟁이 서로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지만 점차 성령에 대한 논쟁이 주를 이룹니다. 초기에는 성령에 대한 논쟁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단지 예수가 하나님인가에 대한 논쟁이었고, 어떻게 신이 고난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그러나 후기가 되면서 성령은 누구로부터 발출되는가로 시작하여 성령도 하나님인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됩니다. 성령에 대한 논쟁은 어느 정도 결론이 났음에도 중세를 넘어 종교개혁 시기까지 이어집니다. 좀 더 포괄적으로 본다면 성령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가지는 미묘한 정의와 묘사 때문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서방교회 신학자로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를 거의 접하지 못한 어거스틴의 신학이 초대교회 삼위일체를 대부분 명징하게 정의했다는 점에서 점수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을 읽어 나가야 합니다. 아래의 인용문은 이동영의 <송영의 삼위일체론>이란 책에서 인용한 레뇽의 동방과 서방 교회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입니다. 참고하시면 두 교회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고, 왜 분리가 되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방 신학은 먼저 (한 분 하나님의) 본질을 그 자체로 다룬다. 그리고 난 후 구체성들(세 위격들)을 추구한다. 반면 동방 신학은 먼저 구체성들(세 위격들)을 다루고 나서 (한 분 하나님의) 본질을 찾기 위해 이 구체성들을 파고든다. 서방세계는 위격을 본질의 한 양태로 간주하지만 동방세계는 본질을 위격의 한 내용으로 간주한다.”(레뇽, 81)


3. 책의 구조와 내용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은 어거스틴의 책 중에서 가장 난해하지만, 가장 중요한 걸작이며 대표적인 책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책은 길지만 전체적으로 요약하는 것을 중심으로 소개할까 합니다. 이 책은 전체 15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반부는 1-7권까지이며, 후반부는 8권부터 마지막 15권까지입니다. 전반부는 성경에 나타난 삼위일체를 탐색하고 정리합니다. 후반부는 어거스틴의 신학적 관점과 시대적 요청에 맞도록 삼위일체를 정의하고 규명해 나갑니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15권으로 14권까지 규명한 삼위일체를 다시 요약하고 정리해 줍니다.


전반부 1-7권 성경 속의 삼위일체

후반부 8-15권 삼위일체의 정의

(결론 15권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전반부 1-7권 성경 속의 삼위일체


서문, 서문은 후기입니다. 서문이 시작되는 첫 문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삼위일체이시며 지존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에 관하여 제가 젊었을 때 책을 쓰기 시작했는데 늙어서야 출판하게 되었습니다.”(99) 실제로 이 책은 고백록을 쓴 시기에 399년에 시작하여 탈고를 생의 말기엔 420년 경으로 잡습니다. <신국론>412년에 시작하여 427년에 마무리된 것과 비교하면, 두 책을 서로 겹쳐서 저술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책을 묵혀두자 일부의 사람들이 어거스틴의 책을 베껴 나누어 읽는 사태까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완간을 요청한 많은 형제’(101)의 요청으로 이 책을 이전 것을 약간 수정하여 완성합니다.


이 책의 목적은 이성을 남용하여 성경을 오용하는 사태에 대해 바른 성경적 삼위일체를 확립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저작의 목적은 삼위일체가 하나이고,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이시라고, 또 지당하게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도 유일하고 실체 혹은 존재의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고 믿고 이해하게 만들고자’(112-3) 하기 위함입니다. 이곳은 김종흡의 번역이 더 좋아 보입니다.


삼위일체는 유일 진정한 한 하나님이시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본질이시라고 말하며 믿으며 깨닫는 것이 바르다는 것을 설명하겠다.”(김종흡, 32)


어거스틴은 이전 교부들이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를 저술하면서 모두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단일한 실체의 불가분한 동등성으로 신적 단일성을 보여 준다고 말합니다.(121)


그러므로 세 신들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시다. 성부께서 성자를 낳으셨고, 따라서 성부이신 분은 성자가 아니시며, 또한 성자는 성부께 낳음을 받으셨고, 따라서 성자이신 분은 성부가 아니시며, 성령은 성부도 아니고 성자도 아니고 오직 성부와 성자의 영이시므로 그분도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영원히 영원하고 삼위의 일체로 속하신다.”(121)


제가 볼 때 삼위일체의 서술은 균형성경적 바른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어거스틴은 성경을 명징하게 요약함으로써 삼위일체를 탁월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이시면서 한 분’(123)이십니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는 1권에서 거의 대부분을 다루고 있고 2-4권까지 계속하여 성경에 나타난 삼위일체를 증명하는 작업을 합니다.


전반부 2부에 해당하는 5-6장은 성자의 성령의 파견을 다룹니다. 하나님은 존재(우시아)이며 실체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아리우스를 반박하는 중요한 전제가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우시아)있는 나이며, 하나님은 있는 나’(여호와의 뜻)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는 출애굽기 3:14말씀을 인용합니다. 보냄은 곧 성부 자신과 성자 예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성자는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낳음을 입은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리우스가 주장하는 성부와 성자의 실체(또는 존재)가 다르다’(505)는 말은 그릇된 것이 됩니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은 성부의 영이시고, 또한 성자의 영.’(533)이 됩니다. 이것은 곧 성령 역시 실체의 똑같은 단일성과 동등성 안에 존재’(573) 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동등한(aequalitas personarum) 존재이며, 실체로 증명되어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후반부 8-15권 삼위일체의 정의


후반부는 다분히 철학적 사유에 가깝습니다. 어거스틴은 지성을 통해 삼위일체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어거스틴의 이러한 시도는 인간의 지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터툴리안처럼 철학적 사유를 비관적으로 보지 않고 긍정적으로 봅니다. 그럼에도 우선순위에 있어서 지성이 아닌 믿음이 우선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7권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런 내용을 오성으로 파악하기가 불가능하거든, 예언자를 통하여 너희가 믿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분이 마음속을 밝혀 주시기까지 신앙으로 견지하도록 한 것이다.”(657)


어거스틴은 지성으로 삼위일체를 사유해 나갑니다. 먼저 하나님은 최고선입니다. 모든 피조물의 선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하나님은 선 자체로서 사랑받으셔야 한다.’(671)고 말합니다. 선한 사물은 불변하는 선인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관조할 때 하나님을 관조하게’(673) 됩니다.

어거스틴은 갑자기 하나님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대해 사랑을 끌고 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율법의 완성도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대상을 찾으려 하고, 함께 머물기를 원합니다. 또한 사랑의 대상이 요구하는 것에 자신을 맡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결국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결국 사랑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됩니다.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709) 사랑은 대상끼리 결합 시키고, 결국 이것은 완전한 사랑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9권으로 나아가면서 삼위일체를 탐구해서는 지성, 인지 그리고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알지 못하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까닭’(733)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지성을 통해 뭔가를 아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며, 아는 것은 인식의 과정을 통한 것이 됩니다. 어거스틴은 지성. 사랑. 인식을 하나로 묶어 풀어냅니다. 이것을 삼일성’(743)으로 부릅니다. 언어는 사랑에서 나오고, 피조물을 향할 때 진정한 사랑이 되지만 피조물이 그 자체 때문에 사랑받을 때 욕망이 된다고 말합니다.(757) 10권에서 사랑과 앎의 연관성을 찾아가면서 사랑하면 알게 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인식하고 난 사물은 사랑하게 마련이고, ‘그렇게 감지된 사물은 배우는 사람들의 향학열을 불살라 그 사물을 향해 서 움직여 나가게 만들며, 그런 능력을 획득하는데 모든 수고를 다하여 그것을 희구하고, ‘실천하므로 획득하기에 이르게 됩니다.(783) 사랑은 다시 이해와 기억으로 확장됩니다. 인지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이해)은 기억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아는 무엇이든지 나는 기억한다’(831)에 이릅니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논리는 삼위일체의 속성인 사랑이 친밀함과 본질적 동등성과 동일성의 의미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고백록> 후반부에서 기억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기억하는 것은 아는 것과 이해, 감정과 학습, 자신의 존재까지 이어지며 결국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까지 나아갑니다.


내가 처음으로 당신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당신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내가 당신을 생각하게 될 때 내 기억 안에서 당신을 찾아뵙기 때문입니다.”(선한용, 346)


종결부에 해당하는 13-15권에서는 기독론에 집중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이며,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며, 진리이자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동등되기 때문에 함께 창조하셨고, 본질은 사랑이시며, 창세 전에 이미 사람을 사랑하셨기에 사람으로 오셔도 역시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아버지도 아들도 또 두 분의 영도 동시에 동등하게 합심하여 모든 것을 역사’(1019)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구속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 사역이 됩니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육화된 예수를 통해서 보니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의 선물’(1051)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공로가 아닌 믿음으로 살아야 함이 마땅합니다. 결국 이 믿음은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1063)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육신을 입어 우리 가운데 보이시고, 말씀하시고, 본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지식은 오직 성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칼빈이 교회의 기초는 성경이며, 가장 권위 있는 권위는 성경에 있다는 주장의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책을 마무리하면서 저 지존한 삼위일체에 관하여 차라리 성경에서 발견되는 것을 토대로 믿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라고 반문합니다.(1325)


4. 나가면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은 그동안 많은 논쟁을 잠재우는 탁월한 안목을 제시합니다. 위격 중심의 동방교회의 교부들의 책을 거의 읽지 않았음에도 서방교회 존재론적 관점에 함몰되지 않고 균형 있게 서술합니다. 안타깝게도 교회 공의회는 어거스틴의 저술을 그리 참고하지 않았고, 특히 성령의 경우는 중세까지 논쟁이 계속됩니다. 우리는 나가면서 교리는 성경보다 앞서지 못하며, 바른 교리는 성경을 부분이 아닌 전체로 바르게 읽어낼 때 가능함을 발견합니다. 마지막으로 어거스틴은 자신의 말 많음을 반성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하며 책을 마무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식을 대하는 학자의 바른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많은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 지존한 삼위일체의 불가 형언함에 합당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못했다고 감히 자백하는 바이다.”


삼위일체론의 마지막 문장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내 앎도 무지함도 당신 앞에 놓여 있습니다. 나에게 열어주신 곳에는 또한 내가 들어가게 받아 주십시오. 닫으신 곳은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 주십시오. 당신을 기억하게 해 주십시오. 당신을 이해하게 해 주십시오. 당신을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당신께서 나를 온전히 고치시기까지 내 안에 이럴[능력]들을 키워 주십시오.”(1333)


아멘! 주 예수의 어서 오시옵소서!



삼위일체론 - 10점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성염 역주/분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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