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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조직신학과 모종삽

샤마임 2017. 5. 25.

[독서일기] 조직신학과 모종삽

2017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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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크리스천투데이에 기고할 글을 썼다. 평상시 같으면 반나절이면 완성되는 오늘은 하루 종일 써야만 했다. 처음 책을 잡을 때는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분명한 그림이 그려졌는데 쓸수록 오리무중이 되어갔다. 밤 열시가 넘어서야 겨우 완성해 송고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글인데 의외로 쉬운 듯 어렵다. 이틀 동안 상추를 뒷밭에 옮겨 심었다. 어제 옮겨 놓은 상추가 조금씩 뿌리를 내리는지 새로운 싹이 보인다. 일주일 정도면 무성한 잎을 보일 것 같아 잔뜩 기대가 된다. 밭을 괭이로 파서 고른다면 씨앗을 모래와 섞어 뿌렸다. 한쪽 구석에는 아래 마당에서 뽑아온 상추를 옮겨 심었다. 개간한 밭에 모종삽으로 상추를 두세 포기씩 옮겨 심었다. 모종삽은 큰 힘을 줄 수 없지만 작은 화초나 식물을 옮겨 심는데 적당하다. 대개를 호미를 사용하지만 난 모종삽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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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하우스를 정리하고 상추를 옮겨 심으며 많은 땀을 흘렸다. 특히 이틀 전 하우스 비닐을 벗기면서 많은 땀을 흘렸다. 땀을 흘리고 나니 몸은 피곤하면서도 개운했다. 마음이 개운해지니 글을 쓰는데도 수월해지는 것 같고, 장기적으로 피곤함도 훨씬 덜했다. 하루 종일 책상에만 앉아 있으면 시간은 많은 듯하지만 정신은 몽롱해지고 답답해진다. 정신과 몸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이 가는 것이 분명하다. 앎도 지식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얻을 것이 체화되어 망각을 지연시키고 장기기억으로 만든다. 학습이란 한자어가 말하듯 진정한 배움은 몸으로 하는 실습으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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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마치고 온 필주가 이발하고 싶다고 장흥에 가자고 한다. 하루 종일 글을 쓰고 피곤한 탓에 바람도 쐴 겸 함께 집을 나섰다. 가는 길에 오전부터 틈틈이 읽었던 다니엘 L. 밀리오리의 <기독교 조직신학 개론>(새물결플러스)을 가지고 나갔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란 표지 문구가 의아하기도 하고 어거스틴이나 안셀름의 신학관을 견지한 것인가 싶은 호기심도 일었다. 아들이 이발을 하는 동안 난 장흥 드롭탑에서 커피 한 잔을 주문한 뒤 읽어 내려갔다. 오전에 서문을 읽으면서 받았던 신선한 충격이 빨리 읽고 싶은 마음을 충동질했다. 이 책에 마음이 끌린 것 그의 서문 글 때문이다. 그는 3판 서문에서 이렇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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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3판의 목적은 25년 전에 이 책을 처음 출판했을 때와 똑같다. 즉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는 기독교 신학에 대한 분명하고도 도전적인 입문을 제공하는 것이다. 개혁적 관점과 에큐메니컬 관점을 함께 갖추는 것, 고전적 입장뿐만 아니라 현대의 신학적 목소리들도 포함시키는 것, 기독교적인 삶, 증언, 봉사에 신학적 성찰을 결부시키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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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인데 전혀 다른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2판 서문과 1판 서문까지 읽었다. 가장 상세하게 소개한 곳은 1판인데 가히 충격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딱딱하고 관념적인 신학책이 아니었다. 필자가 잘못 읽지 않았다면 저자는 '대화' '공동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삶과 신학을 긴밀하게 연결하려는 의도가 읽혔다. 자자 자신은 아버지의 목회 경험을 통해 얻은 통찰로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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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대한 나의 경험은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아버지가 목회하셨던 조그만 장로교회에서 형성되었다. 이 교회 교인들은 거의 다 이탈리아로부터 이민 와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1960년대의 민권 운동과 1970년대의 여러 해방신학을 접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그 조그만 교회에서 신앙과 실천의 불가분리적 관계에 대해 중대한 교훈을 체득할 수 있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복음을 전달하는 일은 이론적 작업을 넘어서는 것이며, 목회의 우선권은 항상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것이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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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의 우선권은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것, 저자는 목회가 무엇인지 아버지를 통해 이미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조직신학 책은 다분히 실천적이며 목회론적 관점이 강하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반드시 1판 서문을 빠뜨리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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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신학의 과제에서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것은 '질문'이다. 질문은 곧 의심인데 잘못된 의심이 아닌 확신하기 위한 과정이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의심과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은 어거스틴에게서 명징하게 드러나고, 다시 안셀름에게, 현대에는 칼 바르트에게 보인다고 말한다. 저자의 통찰력은 신학이 무엇인지 소름 끼치게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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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참된 신앙,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탐구하도록 자극하고, 움직이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습성과 싸우게 하고, 하나님과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해 미처 검토되지 않은 전제들을 놓고 끊임없이 질문하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진리 탐구에 대한 무관심과 두려움, 또한 완전한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오만함은 기독교 신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 반면 참된 신앙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찾고 질문하고 권고할 것이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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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를 1장 말미에서 질문의 주제들과 방법들을 논한 다음 '신학은 질문을 제기하는 신앙이며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54)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독특한 전개 방식은 이후로도 계속된다. 계시를 '우리를 전면적으로 놀라게 하고 동요시킨'다는 표현이나, '우리를 동요시키는 명령으로서 인간의 삶 속으로 꿰뚫고 들어온다.'라는 표현은 생경스러우면서도 생동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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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조직신학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표현은 실존적 삶을 뒤흔드는 힘을 갖고 있다.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 갑자기 지상에 내려와 놀라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는다. 그는 신학을 하늘에 묶어 두지 않는다. 우리의 손에 잡히도록 끌고 내려온다. 그의 글은 정직하고 적실(的實) 하다. 3장 성경의 권위에서 언급한 글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의 특징은 권위주의적 지배가 아니라, 성령의 권능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명과 자유를 '조성'하는 것'이라고 말한다.(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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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굉장히 독특하다. 필자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딱딱한 교리 서적이 아니다. 신론을 논하면서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으로 구분하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4), '선한 창조'(5) '하나님의 섭리와 악의 신비'(6)를 다룬다. 어쩌면 헤르만 바빙크의 책을 읽는 듯하고,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는 듯한 착각을 준다. 9'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 고백하기'라는 지금까지 조직신학 책에서 듣도 보도 못한 주제이다. 진보적 신학자들에게서나 찾아 봄직한 이야기들이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이며, 웨스트민스터에서 명예박사를 받는 교수의 입을 통해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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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악의 신비를 다루면서 과정 신학의 신정론을 끌고 온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생각을 가져다준다. 한국장로교에서 신학을 했다면 익히 들었을 '존 힉'에게서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하나님의 권능을 제한하는 것을 거부'(236) 한다는 사실을 끌고 온다. 해방 신학을 통해 순응이 아닌 '고통에 맞서는 하나님의 투쟁'(238)을 소개한다. 필자가 그동안 읽어본 웨인 그루뎀이나 그와 비슷한 학자들의 조직신학과는 달리 다니엘 L. 밀리오리의 조직신학은 신선한 충격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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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서술 방식은 치밀하고 조밀한 관념적 이론 설명이 아니다. 상당히 개방적이면서 유기적이다. 그가 소개하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신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인간들과 대화하고, 논쟁하고, 간섭하신다. 마치 농부가 밭을 경작하듯 성도의 삶을 경작하신다. 교회론을 '새로운 공동체'(11)로 명명한 것도 신선하다. 그는 교회의 본질을 '교제 안에 있는 새로운 삶, 즉 하나님 및 인간 서로와의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인간의 삶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사랑에 참여하고 그것을 반영함으로써 완성된다.'(455)고 말한다.


그의 조직신학은 모종삽이다. 삶을 기경하고, 경작한다.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런 조직신학 책도 처음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좋은 책이 묻혀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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