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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판단하라 / 키에르케고어 / 샘솟는기쁨

샤마임 2017. 2. 18.

스스로 판단하라

키에르케고어 / 이창우 옮김 / 샘솟는기쁨


키에르케고어를 좋아한다. 내가 언제 키에르케고어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전연(全然) 기억이 없다. 추론해 보건대 우연히 <죽음에 이르는 병>을 헌책방에서 사게 되면서 시작된 것 같다. 아직도 처음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읽었을 때 충격이 남아있다. 쇠망치로 뒤통수를 맞고 기절할 듯한 충격을 받았다. 굳이 이유를 대라면, 인간 내면을 이토록 치밀하게 해부한 사람은 처음이었고, 실존주의 지조요, 철학자라는 귀동냥한 지식과 너무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글에는 뭔가 모를 고뇌와 아픔,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뭔가를 이루어 내려는 열정이 스며있었다.

그 후 인터넷 서점을 뒤져가며 열권이 넘는 그의 책을 사서 읽었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이 흔들었던 책이 <공포와 전율>인데, 이곳에는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추적해 들어간다. 단독자와 도약이란 이해할 수 없는 단어가 책 전반을 이끌어갔다. 철학적 소양이 부족한 나에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인간의 한계를 도약해 신의 어떤 경지에 도달한 것이었다. 그동안 합리적 추론이 가능한 근대적 신을 타파하고 인간의 이성이 도달할 수 없는 신과 그 신에게 아들을 의탁하는 아브라함의 탁월한 믿음을 이야기한다. 키에르케고어의 책 전반에 흐르는 절망은 실족이란 또 다른 이름으로 병치(竝置) 되곤 한다. 어쩌면 키에르케고어는 신을 이해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다는 인간의 교만을 깨부수는 전사일지도 모른다. 그는 시종일관 인간의 무능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면서, 신 앞에서 자신의 연악과 부족을 알고 처절하게 실족하고 낙망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그려낸다.


<스스로 판단하라>는 베드로전서 47절에 관한 변증이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이 책은 두 개의 강설이다. 하나는 벧전 4:7의 변증이고, 다른 하나는 마6:24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의 강설이다. 벧전 4:7에 관한 변증은 술 취함이란 주제를 다룬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그것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새 술에 취했다고 비방한다. 베드로는 그렇지 않고 성령에 의한 것임을 변증한다. 키에르케고어는 이렇게 정의한다.


결과적으로 세속주의는 기독교가 술 취했다고 생각하고 기독교는 세속주의가 술 취했다고 생각한다.”(11)


세속주의가 기독교를 향하여 술 취했다고 말하는 건 비이성적 행동들 때문이다. 상식에 어긋나는 그릇된 행위를 기독교가 한다고 생각한다. 세속주의는 합리적 사고로 분별력 있는 삶을 추구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기독교가 세속 주의자들을 보면 동일하게 그릇된 삶을 살아간다고 믿는다. 키에르케고어는 세속주의가 확률에 모험을 한다고 믿는다. 확률은 진리가 아니다. 그건 추측이고 가능성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확률을 버리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험’(29)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타락은 세속 주의인데, 그것은 믿음을 버리고 확률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것이 술 취함이다. 먼저 유한한 안전을 확보하고 다음으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설교를 하는’(45) 목사인 것이다. 당시의 기독교가 키에르케고어를 싫어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거짓된 믿음에 안주하고 있음을 통탄스러운 언어로 폭로하는 키에르케고어를 차마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적인 안전을 버리고 믿음으로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것, 바로 이것이 세속주의가 말하는 기독교의 술 취함이다. 그러나 참 기독교는 진리가 아닌 확률에 의지하는 것이 술 취함이다.


키에르케고어는 불친절하다. 글은 명료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숨겨진 죄를 폭로시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에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착각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폭로한다. 또한 지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것도 지적한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없고 단지 하나님을 향한 앎만 있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죄인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도, 그 말씀을 온전히 순종할 수도 없다. 복음은 사람들이 실족하여 넘어지는 것에서 시작한다. 잔인하고 예리한 율법은 인간의 모든 노력을 허사로 만든다. 바로 이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믿음으로 수용된다.


아직도 키에르케고어는 낯설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낯익다. 흡사 아모스의 사후이고, 사도요한의 광야의 소리와 같다. 그의 문장들이 쉽지 않아 독해하기가 어렵기는 하나 인간의 참실상과 복음의 강력함을 체험하는 특권이 주어진다.


난 키에르케고어가 좋다. 그는 통해 한없이 유한한 인간과 그러한 인간을 긍휼히 여기는 자비한 아버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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