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ok/독서일기

[독서일기] 몸이 된 진리

by 하늘땅소망 2016. 11. 6.

[독서일기] 몸이 된 진리

2016년 11월 6일 일

지금도 교회가 필요할까? 목사인 내가 이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 의하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요즘 드는 생각의 본심이다. 내가 말하는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아니다. 지금 이 시대의 조직된 교회, 정형화된 교회를 말한다. 15-6년 전부터는 교회를 교회라 하지 않고 '성전'을 붙이는 대형교회들이 많다. 1성전이 어떻고, 2성전이 어떻다는 말서슴 없이 한다. 분명히 말하는 교회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명백하게 잘못된 것이며 종교개혁 사상의 퇴행이다. 그렇다고 개혁된 천주교도 아니다. 그릇되며 왜곡된 신앙관으로 구약의 성전 개념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교회는 '교회당'으로 불렀다. 집당을 써서 건물을 의미했다. 그런데 어느날 '당'을 빼고 '교회'라고 불렀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수용할만 한다. 그러나 '성전'이라 부르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가건을 무위로 만드는 허세와 교만이며, 그릇된 신앙으로의 퇴행이라고 감히 말한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 조차 요즘은 들리지 않는다. '초교대회'가 무엇인지 분명한 정의 없이 단지 부흥하는 교회로의 이미지만 끌고 온 것이 아닌가 싶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지!'는 구호는 반드시 '무엇이 초대교회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조직인가? 아니면 정신인가? 아니면 그 무엇인가? 그 답은 쉽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인제 초대교회 돌아가자는 구호는 쑥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교회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쳐야 한다. 왜냐하면 그 다음질문인 '초대교회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누군가 말하는 것처럼 조직이 없는 교회가 아니다. 사도가 있고, 감독과 장로가 있고, 집사들이 있고, 소위 평신도로 불리는 일반 성도들이 존재했다. 또한 주일날 집에서만 모이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큰 집에서 몇 명에서 몇 백명까지 모였다. 그렇다면 현대교회와 초대교회의 차이가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이 차이를 잡아 내는 것이 초대교회 돌아가야할 이유이며, 목적인 것이다. 


교회사는 교리사와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교회사는 교리사와 구분된다. 이유는 단 하나다. 교리사는 교리의 변천을 다루지만, 교회사는 사회적 상황이란 삶의 맥락에서 읽혀지기 때문이다. 교리는 반드시 역사와 교회사라는 기반 위에서 읽혀져야 마땅하다. 교회사와 교리사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함께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대교회는 어떤 곳일까?를 다시 질문해 보자. 필자의 생각으로 초대교회의 몇 가지 특징들이 있다. 하나는 교회가 아직 틀을 갖추지 않은 때였고, 심지어 정경까지 구비되지 않는 상태에서 많은 혼란과 논쟁이 오가는 시기였다. 또한 그들에겐 성경이 없었다. 당시만 해도 성경은 극히 일부의 귀족이나 부자들이 소장했고, 회당에선 구약이 있었다. 그럼 그들에게 무엇이 있을까? 소위 말하는 쪽복음이다. 즉 사도들이 쓴 편지들을 파피루스나 흙판 등에 기록된 일부의 편지등이다. 교회사가들은 이것을 '회람용편지'라고 부른다. 신약의 서신서들을 이런 회신서의 기능을 알려주는 단서들이 여러곳에서 발견된다.


사도들의 편지는 교회 안에서 설교로서 기능을 담했다. 이것이 유대 회당과는 약간의 차이를 가진 부분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듣는 사람들이지 읽는 사람들이 아니다. 절대적 사도적 권위는 그들로 하여금 서신들에 대한 권위를 존종했고, 구약에 맞먹는 권위를 부여했다. 이 당시는 구약과 신약이 완전히 구분되지 않았다. 신약은 구약의 성경의 의미는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도적 권위를 존중했으며 막강한 권위를 가졌다. 이러한 추측은 불과 한 세기가 지나기 전에 정경의 목록들이 속속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사도들의 편지는 교리가 아니다. 편지는 교회의 문제나 신학적 난제들을 풀기 위해한 것들이다. 고린도 전후서의 경우는 도덕적 문제와 교리적 문제를 해결했고, 디모데 전후서나 디도서의 경우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나 디도에게 보내는 목회방침들이다. 이 편지들 역시 교회를 세우는 방식이나 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핸 대안을 담고 있다.


교리는 유용하지만 독자적으로 존재하게 되면 위험하다. 교리는 상황 속에서 읽혀야하고, 해석되어야 한다. 실례로 한국교회 안의 주초 문제를 교리적 문제로 끌고가는 목사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성경적이 아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가지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생활교리'인 셈이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신앙생활에 있어 유용한 것들 임에는 틀림 없다. 다시 초대교회 문제로 넘어가 보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 속에는 현대교회 상당히 다른양상이 존재 한다. 그것은 바로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명료한 방법들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토론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뵈레아 사람들의 이야기는 좋은 예다. 그들은 '아멘!'으로 끝나지 않고, '상고'했다고 한다. 상고는 깊이 생각하고, 토론하고 논리적으로 그 말씀이 옳은가를 따지며, 삶을 통해 실천해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말씀을 '시험'한 것이다. 시험은 유혹이 아니라 검증이다. 그 말씀이 맞는가 맞지 않는가를 확인해보는 경험적 신앙을 말한다.


경험되지 않는 말씀은 종종 오류에 빠지고, 그릇된 해석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말씀은 경험되어야 한다. 그것은 철저한 순종과 이성적 사고를 통해 가능하다. 어느 것 하나 빠져서도 안 된다. 마음과 몸이 하나이듯, 지식과 실천이란 학습을 통해 말씀은 진짜가 되는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새물결플서의 세 권도 정확하게 초대교회가 지향했던 이성과 실철의 의미를 그대로 담고 있다. 

박양규의 <청소년을 위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놀랍게도 '독일의 인문 고전으로 이해하는' 수식어를 달았다. 단순히 교리해설서가 아닌 것이다. 인문학을 통해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과정을 진행한다. 어쩌면 이 책은 중고생을 위한 책이 아니라 목회자를 위한 책이라고 봐야 한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서정을 알아보고, '어떤 마음으로 교리문답을 작성했을까요?'라고 묻는다. 성경을 교리로 만들고, 그 교리를 제대로 알기 위해 삶으로 끌고 오는 저자의 발상은 화석화된 교리를 삶으로 이해하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스티븐 L. 쿡 의 <예언과 묵시>는 '포로기 이후 묵시 사상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라는 부제를 달았다. 묵시는 종말론적이다. 예언 역시 묵시와 같이 한다. 추천서를 쓴 류호준 교수는 '이 책은 사회적 맥락에서 예언과 묵시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해주는 이정표로서 곱씹어 공부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했다. 성경은 사람, 곧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로 주어진다. 도랑치고 가재잡는 것이지 다 익은 가재를 주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마이클 프로스트의 <성육신적 교회>는 지금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한다. 십여년 전부터 가시화된 교회 안나가는 교인, 즉 가나안교인은 가파른 성장곡선을 긋고 있다. 이것은 탈교회적 신앙인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한 편으론 교회 제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저자인 마으클 프로스트가 생소해 찾아보니 수년 전에 SFC에서 <모험으로 나서는 믿음>의 저자이다. 그 책을 읽고 도전을 받았는데 역시 생각하는 이상의 신앙관을 견지한 작가다. 그는 호주 몰링 신학대학교의 부총장겸 선교연수소 틴슬레이 섭립 소장이라고 한다. 


그는 첫장에서 '뿌리 없고 단절된 스크린 중독 세대'라는 제목을 가지고 온다. 이것을 통해 현실을 잊고 잃어 버린 세대를 진단하고. 그리고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우리가 탈육신된 세상이다.'(43쪽)이라고 정의한다. 교회는 '몸'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육신이 진심은 바로 몸의 신학이다. 그는 예수의 겸손에 대해 '행동으로 보여주는 말'이란 표현을 사용한다.(136쪽) 과연 옳은 말이다. 그는 마지막 장인 14장 '성육신적 삶을 향하여'에서 이렇게 결론 짓는다. 


"우리는 건강하지 않은 탈육신적 종교에서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준 모델이 되는 방식, 곧 건강하고 생명을 주며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께 영광돌리는 역동적인 헌신으로 전환해야 한다."(319쪽)


위 문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구절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다. 즉 구체적 삶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 관념적인 교리는 진리가 아니다. 삶으로 실천되는 교리가 진짜 진리가 된다. 초대교회의 부흥의 기반, 또는 이유는 '같이 진리를 토론하고 실천'하는 삶의 서정 속에 있지 않을까? 삶과 실천, 또는 행위가 사라진 현대교회는 더이상 존재해서는 안 된다. 진리를 살아가는 진짜 교회가 필요하다. 그것은 건물을 성전이라 하지 않고 성도 자신이 '하나님의 전'이라고 믿는 혁명적 본질로의 회귀가 있어야 한다.


성도는 교회다. 성도는 진리를 살아간다. 성도는 몸의 신학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울이 가졌던 스티그마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성육신적 교회
국내도서
저자 : 마이클 프로스트(Michael Frost) / 최형근역
출판 : 새물결플러스 2016.10.28
상세보기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