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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묵상] 3. 1:11-17 바다에 던져진 요나

샤마임 2016.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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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묵상] 3. 1:11-17 바다에 던져진 요나


요나서의 핵심 주제는 '하물며'이다. 이방인도 사랑한다면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 이다. 요나선지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앎에도 불구하고 편협적인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요나는 하나님의 낯(페님, 얼굴, 표피, 임재)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가기 위해 욥바에 이른다.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고, 막대한 선가를 지불하고 배에 오른다. 그런데 출항 후 얼마 가지 않다 폭풍이 몰아치고 결국 요나는 제비에 뽑혀 하나님을 피해 도망간다고 자백한다. 요나는 당당하게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충고한다. 그리고 바다는 잠잠 해진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바다의 흉흉함은 요나, 즉 요즘언어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노아의 홍수 당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불신자들 때문에 세상을 심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의 타락으로 인해 심판이 온다. 베드로는 심판이 교회부터 시작된다고 충고한다.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11)


고난은 저주가 아니다. 바다가 점점 흉흉해 짐으로 선원들은 난처한 입장에 처하지만, 요나에게 돌이킬 기회다. 물론 불같은 고난은 통과해야 한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져야 한다. 하나님을 피하여 달아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저주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요나는 사명자로 거듭날 것이다.


점점은 인간의 노력으로 불가능함을 알려 준다. 우린 종종 자연재해가 불가피한 상황으로만 이해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주관하신다. 까닭없이 오는 고난은 없다. 사소한 고난까지 다 해석할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임과 동시에 성화로의 부르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거룩하게 드리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점점 고난의 강도는 높아간다.


그들은 묻는다.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여기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답은 이방인들에게 없다.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떻게 행하시는지 모른다. 답은 요나에게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있고, 답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답을 알고 있다. 다만 그렇게 살지 못할 뿐이다. 결국 그들은 요나에게 물었다. 왜냐하면 요나는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수치를 당하고 고난을 당해도 세상의 답은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이든지 복음 전하기를 꺼리지 말라.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12)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는 모호하다. 왜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했을까? 자신이 이 배 위에서 사라져야 하나님께서 진노를 멈춘다는 간단한 논리 때문일까? 아니면 죽고 싶은 심정 때문이었을까? 분명치는 않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폭풍은 자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므로 자신이 선원들을 떠나면 폭풍이 잠잠해질 거라고 믿은 것이 분명하다. 메튜헨리는 이 구절에서 요나가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표현한다. 일리는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요나의 징계는 그가 하나님을 피하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요나의 자세는 그래도 선지자다움이 있다. 비겁한 사람들은 굳이 희생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자신이 희생해 그들이 안전해지기를 갈망한다. 바로 이 점이 요가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자신의 죄를 스스로 감당하려는 요나는 이 시대의 아픔을 자신에 돌리려는 책임감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다.


13절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그러나”(13)


왜 사람들이 노어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들의 요나의 말을 듣고도 마음으로 쉽게 용납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요나를 돕고 싶은 마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바다는 점점 그들을 향해 흉흉해졌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연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이다. 그러나는 다시 하나님의 손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그들은 바다의 흉흉암을 막을 수도, 육지에 도착할 수도 없다.


여호와께”(14)


무리가 각자의 신이 아닌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각자의 신을 부르던 초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그들은 결국 이 문제가 여호와의 손에 있음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앎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요나 때문에 자신들까지 멸망시키지 말아 달라고 애원한다. 위기의 순간에 참 신을 찾아간다. 그렇다고 그들이 여호와를 믿은 것이 아니다. 그들의 기도 속에는 사랑이 아닌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선지자인 요나를 바다에 던질 때 혹시 모를 쟁아이 자신들에게 올까 두려워하고 있다. 이것이 종과 아들의 차이다.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16)


결국 그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진다. 곧 바다는 잠잠 해진다. 예수님께서 폭풍우기 치는 바다를 걸어 오시다. 배에 오를 때 바다가 잠잠해지듯. 사람은 바다의 잠잠해짐을 통해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신의 존재를 깨닫는다. 그것은 그들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베드로가 수많은 고기를 잡고 예수님의 신성을 느꼈을 때 두려움으로 '나는 죄입니다'라고 고백한 것 같다.


여호와께서 이미 ... 예비하사”(17)


주어는 여호와이시다. 만유(萬有)의 주인이신 여호와는 큰 물고기를 예비 하셨다. 결국 요나는 하나님께서 예배하신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삼 일을 지낸다. 요나의 표적으로 불리는 이 기적은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의 묵상할 거리를 찾을 수 있다.

  • 1. 소명을 저버리는 자는 반드시 징계를 받는다.

  • 2.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돌이킬 수 없다.

  • 3. 하나님을 두려워함에서 사랑함으로 진전되어야 한다.

  • 4. 하나님은 소명자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대로 두지도 않는다.



그동안 요나서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존들의 글을 수정 증보하여 전자책으로 출간하었습니다. 히브리어 폰트로 인해 EPUP가 아닌 PDF 파일로 출간했습니다. [에레츠북스]에서 구입하시면 파일을 다운로드하여 프린트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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