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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 제자도] 존 요더

샤마임 2015.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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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없는 거짓된 신앙을 벗어라.

[급진적 제자도] 존 요더



 

몸매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몸매의 사전적 정의는 '몸의 맵시나 모양새'. 우리가 일상적으로 몸매라 할 때는 몸의 모습을 담는 형태를 말한다. 대체로 몸매가 좋으면 건강하다. 반대로 몸매가 좋지 않으면 건강하지 못하다. 현대인들은 몸매에 미쳐있다. 아름다운 선이 살아나는 몸매를 만들기 위해 에어로빅과 다이어트 등을 행한다. 심지어 뱃살이나 허벅지 지방을 기계로 빼내는 지방흡입수술까지 받는다. 지방흡입수술은 부작용이 심해 단기간에 아름다워 보이는 몸매를 만들어주지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좋은 몸은 아름다운 몸매에 담겨 있고, 아름다운 몸매는 바른 운동과 하루하루의 섭식(攝食)습관으로 만들어진다.

 

좀더 길게 이야기하면 몸매를 잡아주는 것이 근육인데, 근육은 백근과 적근으로 되어있다. 근육 색이 하얀색이면 백근이고 붉으면 적근이다. 백근과 적근이 적당히 섞일 때 보기 좋은 몸매를 유지한다. 백근은 무산소운동과 고단백질을 섭취하여 만들고, 적근은 유산소 운동과 오랫동안 일정한 운동을 했을 때 만들어진다. 백근은 단거리 마라톤 등의 짧은 시간 안에 강력한 힘을 낼 때 사용하고, 적근은 근육에 밀착되어 있고 장거리 마라톤이나 지속적인 노동을 할 때 쓴다. 요통이나 관절 관련 질병은 대부분 적근이 빈약할 때 발생한다. 허리디스크에 걸린 환자가 꾸준한 운동을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거짓된 몸매는 운동 없이 단기간에 만들어진 몸매를 말한다. 그들은 아름다워 보이나 아프고, 건강해 보이나 만성적 통증으로 고통을 받는 경우가 많다. 영적인 삶을 정확하게 일치한다. 지속적인 실천이 없는 단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교인은 거짓된 사람들이다. 삶이 배제되고, 지성과 교리에 의해 만들어진 거듭남은 교회가 타락했다는 증거다. 근육 없는 몸매가 거짓이듯, 실천 없는 신앙생활 역시 거짓이다. 속성으로 만들어진 현대교인들은 해산의 수고와 사랑의 수고를 알지 못한다. 그들의 삶은 교회 나오기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신앙으로 인한 모험과 도전은 없다. 그들은 말 그대로 교인이지 거듭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존 하워드 요더의 새로운 책 <급진적 제자도>의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엮은이들이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존 요더는 일부 진영에서는 누구나 아는 이름이지만 다른 진영에서는 미지의 인물’(16)이다. 아마도 필자의 글을 읽고 있는 이들 중에 상당수는 존 요더가 누구인지 모를 것이다. 필자도 요더를 알게 된지 불과 3년 쯤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의 정치학>을 통해 존 요더를 접한 후 요더 오타쿠가 되어 버렸다. 현재 존 요더의 책들은 도서출판 대장간에서 계속하여 번역 출간되고 있으며, 한국 교회에 적지 않는 영향력을 서서히 끼치고 있다. 죠이 선교회에서 요더의 책을 출간하게 된 것을 환영하는 바이며 앞으로 계속하여 출간될 것으로 믿는다. 한국교회는 존 요더가 필요하다. 그의 참된 그리스도인다움을 배울 필요가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영어 원제는 ‘RADICAL CHRISTIAN DISCIPLESHIP’로 굳이 번역하자면 급진적(또는 혁명적) 그리스도인의 제자도라고 할 수 있겠다. 출판사는 줄여 급진적 제자도로 번역했는데 잘 된 번역이다. ‘제자도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에게만 사용되므로 굳이 그리스도인을 추가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럼 왜 하필이면 제자도급진적을 붙였을까? 엮은이들의 서문을 들여다보자.

 

우리가 이 책의 제목에 왜 급진적(radical)이란 용어를 붙였는지 말해야겠다. ... 급진적이란 단어의 한 가지 의미는 기원을 뜻하는 뿌리. 기독교의 뿌리에는 그리스도가 있고,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해 선포하는 메시지의 뿌리에는 십자가와 부활이 있다. 독자들은 여기에서 십자가와 부활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보게 해 주는 근원적인 안목을 발견할 것이다.”(24)

 

썩 명쾌한 설명은 아니지만 급진적이란 뜻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안내한다는 점에서 근원적임을 발견한다. 십자가와 부활이 중심하는 복음 자체가 급진적이란 말이다. 결국 본질로 돌아가라는 소리다. 본질! 존 요더가 말하는 본질은 무엇일까?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한 바로 그 다음날인 196845일 종려주일 십자가의 의미란 주제로 이렇게 설교한다.

 

“20세기 내내 빌리 그래함과 노먼 빈센트 필 같은 설교자들은 우리에게 행복하고 건전한 삶을 영위해야 한다고 일러 주었다. ... 나의 행복한 자아에 대한 이런 관심은 전형적인 미국식 우상숭배다. 예수는 이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갈등과 자기 부인으로 점철된 삶을 살 것이라고 말했다. 성숙에 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173-174)

 

그렇다. 삶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란 뜻이다. 닮음은 곧 따름이다. 예수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았던가. 삶은 근육이다. 근육 없이 성급하게 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몸매는 부작용을 남기고, 결국 다시 좋지 않는 몸매로 되돌아간다. 평범한 일상에서 근육을 만들지 않는 게으름 삶의 귀결이다. 신앙도 마찬가지지 않을까. 거룩하게 살아감 없이 보이기 위한 종교적 삶은 결국 거듭나기 이전의 삶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것이 뻔하다. 요더가 급진적이라고 말할 때, 결국 삶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본질로 돌아가지 않으면 거짓이다.

 

바울은 불의의 병기에서 의의 병기가 되라고 한다. 이것은 존 요더가 제자도를 해방이 아닌 의의 노예 상태’(34)로 표현한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거듭남은 회심(回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건 삶 전체의 돌이킴을 말한다. 예수가 오롯이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고, 십자가를 위해 살고,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길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편지의 서두에 종종 으로 표현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사랑의 종이 되는 자유이지 단순한 해방이 아니다. 요더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선언을 의존의 선언’(127)로 수정해 부른다. 구약에서도 율법으로 자유로워질 권리가 있음에도 주인을 섬기는 편을 택한 종’(15:16-17)들처럼 그리스도인은 자유로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 종이 되기 위해서는 귀에 흔적을 남긴다. 요더는 이것을 갈6:17에 나오는 흔적과 연결시키며 예수께 속한 표시로 설명한다.

 

그의 몸에 있는 흔적,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채찍과 돌에 맞아 생긴 흔적은 그 자신이 야고보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부른 것을 자발적으로 성취함으로써 주 예수께 속해 있음을 보여 준 표시였다.”(127)

 

바울이 가진 흔적은 그리스도의 종 됨의 자유 선언이다. 그것은 세상에 불순응하고 그리스도께 순응하는 길 위에 있음의 표시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순응하며 사는 착한 그리스도인은 절대 아니다. 앎은 몸에 있다. 몸이 기억하지 못하는 회심은 거짓이다. 마지막으로 요더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을 들어보자.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결코 편하지한다. 그는 세상이 등을 돌려 도망치는 그분에게서 오는 심판과 자비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우리 이웃의,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인생관이 과연 이런 인상을 심어주고 있는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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