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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전체주의는 어떻게 악인을 만드는가?

by 하늘땅소망 2014.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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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는 어떻게 악인을 만드는가?


유대인이며 여성 역사학자였던 한나 아렌트는 그의 책 <인간의 조건>에서 전체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전체주의는 한 사람의 의견 또는 입장이 전체에게 강요되는 구조이다. 사전적 정의로는 개인보다 국가-전체가 우선한다고 말하지만 역사상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봉건주의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한 사람을 위해 모든 사람이 합법적인 종이 되는 권력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전체주의는 불가피하게 개개인의 성향과 사유의 다양성들이 무시되며 용납되지 않는다. 이미 정해진 룰을 따라 철저하게 배타적 강요로만 작동한다.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전체주의 성향을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려는 욕구이며 인간의 무용성을 증명함으로 인간을 배제하는 태도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하이데거와 칼 야스퍼스라는 걸출한 실존주의자들과 모종의 연관을 가졌고, 배웠던 그녀로서 봉건적 뿌리가 깊은 전체주의를 혐오스럽게 보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나치 전범이었던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으로 엮었다. 아렌트는 이 책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예리하게 분석했다. 수백만을 죽이고도 자신은 죄가 없다고 후회도 반성도 심지어 눈물조차도 흘리지 않았던 아이히만은 '전체주의'라는 악한 구조가 만들어낸 희생물이었다. 


전체주의의 위험성, 즉 악한 구조가 갖는 위험성에 대해서는 나치 아래의 아우슈비츠에서의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의 말에 귀 기울을 필요가 있다. 그는 아우슈비츠 안에서 유대인이면서 독일군의 손발이 되어 동족을 죽이는데 기꺼이 동참했던 이들을 보았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몇 가지를 지적 한다. 하나는 공범자를 만드는 것이다. 나치군은 감옥에 들어온 유대인의 일부를 자신의 손발로 사용한다. 그들이 거절하지 못하고 기꺼이 동조했던 이유는 죽음의 문턱에서 나누어주는 약간의 '특혜' 때문이다. 특혜는 어처구니 없이 작다. 밥을 조금 더 주고, 쉬는 시간을 좀 더 주고, 노동자가 아닌 노동자의 감시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즉 그들에게 자신들의 권력을 조금 나누어 주면 된다. 이렇게 하면 유대인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동족을 팔아먹는다. 친일파처럼.


"그들을 묶어두는 가장 좋은 방법은 범죄의 짐을 지게 하는 것이고 그들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이며 가능한 한 그들은 연류 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진짜 주범들과 공범관계로 묶일 것이고, 더 이상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두 번째 방법은 더 간단하다. 그러나 방법은 동일하다. 그것은 '억압하는 구조'다. 프리스 레비는 인간의 본성은 권력에 취약하며, 취약성은 억압이 거셀수록 더욱 두드러진다고 한다. 권력의 희소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나만 누리는 특혜'를 부여함으로 동족 간에 혐오감을 감수하면서까지 특혜를 누리려고 한다. 가스실에서 죽은 동족의 시체를 치우는 수고만 해준다면 기꺼이 죽음에서 면할 수 있다면 누가 거절하겠는가. 궁극적으로 이러한 전체주의가 가진 포악성은 인간의 다양성과 인간 자체를 부정하는 악이다. 어느 것도 용납되지 않았던 전체주의적 아우슈비츠 안에서의 특권은 악이 자라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다.


"가장 큰 잘못은 시스템에, 곧 전체주의 국가의 구조자체에 있음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프리모 레비<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돌배게, 48쪽)


아이히만은 수백만을 죽인 악한 인간이 아니다. 그는 나치라는 구조 속에서 평범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의무적으로 자신의 일을 했을 뿐이다. 나치 속에서 청소부든, 운전사든, 공장의 노동자든 아무런 죄가 없다. 다만 그들을 나치에게 협조함으로 수백만을 죽이는 데에 동조하고 있을 뿐이다. 아이히만은 사형을 당하면서도 자신을 결코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을 착한 사람, 건전한 시민으로 여겼을 뿐이다.


예수의 죽음은 바로 이곳에서 출발한다. 십자가는 지독히 나쁜 인간상을 제시한다. 악한 구조에 침묵하지 않고, 거절하고 항거한 데모였다. 권력자들을 불편하게 했고, 쉽게 동조하지 않는 질서의 파괴자였다. 예수의 죽음이 다분히 정치적이었다는 점에 대해 수긍하는 이들이 몇이나 있을까? 바울은 이점을 분명히 알았으며, 증언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15:3)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삶'은 곧 악한 구조 속에서 적당한 특혜를 얻기 위해 타자를 수단화 시키지 않았다는 말이다.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에 내게 미쳤다'는 말 역시, 예수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받아야할 대가이다. 


성경이 혁명적이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다. 삶이 결여된 영의 문제만을 깊은 영적 수준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삶이 개입되는 순간 '땅의 신학'으로 전락하고, 수준 낮은 2류 신자가 된다. 초대교회에 발흥했던 영지주의가 지금 한국 땅에 너무나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지금 여기는 없고, 나중에 거기만 있는 그릇된 신앙이 한국교회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 그곳에 나 또한 속해 있으니 슬픔과 안타까움이 뼈 속 깊이 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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