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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성서의 에로티시즘

샤마임 2014.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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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에로티시즘

차정식 / 꽃자리


 

저자인 차정식 교수와의 만남은 농밀한 농담으로 시작 된다. 거침없이 쏟아내는 입담에 입이 귀에 붙었으니 말이다. 작년, 그러니까 201363일 월요일 저녁 로고스서원 주최로 열린북토크에서 주인공을 만났다. 책 쓰기를 소원하는 이들의 모임이다보니 차교수의 글쓰기 방법이나 독서 습관 등은 당연히 질문에서 빠질 수 없었다. 일 년하고도 한 달이 더 지난 지금에 와서 그 때를 기억할리 만무하지만, 단 한가지의 대답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책을 쓰십니까? 비결을 알려 주십시오."

"저는 글을 쉽게 씁니다. 기차 안에서도 쓰고, 커피숍에서 쓰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씁니다. 쓰다보면 한 권의 책이 됩니다. 정말 쉽게 씁니다."


말문이 막혔다. 평생을 한 권의 책도 내지 못한 이들이 부지기수가 아니던가. 그러나 차교수는 그냥 쓴다는 것이다. 과연 대가다운 답변이다. 책을 써본 사람만이 수긍할 수 있을지, 아니면 그들도 수긍하지 못할지 모를 일이지만 우리에게 충격이었다. 하여튼 거침없이 쏟아내는 입담에 두 시간 반은 새눈 감추듯이 지나가 버렸다. 내침 김에 그의 신간을 구입했다. 이름하야 야하디야한 <성서의 에로티시즘>이다. 얼마나 열심히 필기를 했는지 내지에 모두 기록해 두었다.

 



하여튼, 이 책은 신앙의 터부를 다룬다. 좀처럼 입에 담기 힘든 주제인데 바로 성서의 성적 담론이다. 일단 몇 개의 제목을 보면 이렇다. '한 몸의 존재를 넘어 한 몸 되기'. '수줍은 매음과 변신의 에로티시즘', '관능적 춤과 좌절된 에로스' 등이다. 제목만 들어도 거시기하다. 내 생전 성적인 내용으로 설교하다 수지맞은 목사님들은 본 적이 없다. 누군가의 농처럼 '잘해봐야 본전'이다. 그러나 실존 안에서는 ''은 얼마나 긴요하고 중요한 문제던가. 성경 안에서도 ''은 간과할 수 없는 주제이다. 그런데도 유교적 전통에 함몰된 우리네 신앙은 좀처럼 성을 입데 담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차정식 교수의 '성서의 에로티시즘'은 과단성 있는 결정이자, 실용적 선택이라 할 것이다.

 

모두 15장으로 되어있고, 한 장 한 장은 작은 소논문 또는 에세이 형식으로 이루어진 완성체이다. 첫 장에서 마지막 장으로 건너뛰어도 되고, 필요한 부분만 골라 읽어도 되고,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가도 될 일이다. 나는 첫 장부터 마지막까지 시나브로 읽어가길 권한다. 점진적 측면도 있으니 말이다. 성경 속 성에 관련된 은밀한 담론을 이제 시작해 보자.

 

서문은 꼭 읽어야 한다. 책의 전반적인 흐름과 저자의 생각을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 한다.


'에로스'란 말의 선입감이 싱싱하고 상큼하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드물다.


맞는 말이다. 에로스하면 섹스와 퇴폐적 모텔이 먼저 떠오르는 것 이 시대의 자연스러운 풍조다. 저자도 이 점은 놓치지 않는다. 그럼,  '에로스'를 들추어내는가? 오해 때문이다. 그는 에로스의 오해부터 푼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 '에로스'는 희랍 신화에 등장하는 야한 이야기다. 첫 오해는 희랍전통은 곧 이방인의 것이며 '어쩐지 가까이 하기에 께름칙하고 흉측하다는 ' 생각을 한다. 둘째 오해는 에로스는 나쁘고 아가페는 좋다는 발상이다. 이유는 루터교 신학자인 안더스 니그렌의 <아가페와 에로스>의 영향으로 돌린다. 나도 읽은 책이다. 차교수의 주장은 전적으로 옳다. 니그렌은 에로스를 '나쁘다'고 평한다. 셋째 오해는 '에로스나 에로티시즘이 타락한 세속의 음란과 방종을 부치기면서 마치 천박한 포르노그래피의 사상적 저변이라도 되는 양 매도하는 풍토'를 조장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차교수는 '이러한 편견과 오해들에 도전하며 싸우면서 성서에 잠입한 에로스의 그림자들을 추적'(8)한다. 더 궁금해진다. 성서 속의 에로스라? 무슨 내용일까? 저자의 속내는 알려면 1장은 건너뛰어서는 안 된다.

 

1장 한 몸의 '존재'를 넘어 한 몸 '되기'를 읽어 보자.

부제는 아담과 하와의 원초적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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