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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샤마임 2013. 10. 17.

독서일기 2013년 10월 17일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과연 그럴까? 공평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시간의 공평을 말한다. 그러나 나머지는 공평의 잣대로 가늠할 어떤 것도 없다. 차이와 구별, 혜택과 배제, 소유와 소외가 삶의 실존에 독하게 뿌리내려 있다. 필자의 경우만 해도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상의 범주 안에서 학업을 위한 혜택은 거의 제공 받지 못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간격을 몸으로 체득하며 살아왔다. 진실로 삶은 공평하지 못하다.

 

현실에 깊이 천착하며 뿌리내리려 하는 이들은 불공평한 삶을 받아 내야 한다. 신앙을 가진 자들은 그저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는 것으로 좋은 신앙을 소유했다는 거짓된 평판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아니 그럴 수 없다. 현실의 부조리에 갈등하고 번뇌하며 진실함이 무엇인지 찾아내려는 갈망을 소유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 안에 신앙의 본질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성육신은 하늘의 복음이 땅에 실현 되는 사건이다. 하나는 부정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이다.

 

부정은 이곳은 더 이상 소망이 없음으로 신의 개입 즉 성육신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이어진 죽음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와 징계가 십자가이다. 성육신을 십자가를 향한 불가피한 여정이다. 긍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환원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하나님의 긍정인 것이다. 성육신은 십자가로 가기 위한 여정이다. 예수는 버려질 것이다. 의인의 고난을 통해 이 세상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음 확인시킨다. 그러나 예수는 공생애를 통해 버려진 이들을 찾아가고 소외되고 배제된 이들의 친구가 된다. 회복의 방향을 잡아 준다. 예수는 신자의 구원자로만 머물지 않는다. 세상에 소망을 버리지 않았던 하나님의 사랑의 실현으로서의 모델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것을 제자도라고 부른다.

 

제자도는 공평치 않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을 실현하는 성도의 의무다. 세상을 사랑할 의무, 세상을 회복할 굳은 의지로서의 상징이다. 지금까지 박총이 번역한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를 87쪽까지 읽고 있다. 그리 어려운 문장이나 주제는 아니지만 숨이 턱턱 막힐 만큼 강한 긴장이 느껴진다. 제도 속에서 개념화되어 일상의 은총을 잃어버린 교회에 대하여, 성육신을 통하여 긍정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도록 촉구한다. 몇 개의 문장을 옮겨 보자.

 

"사람들은 더 이상 연역적이고 추상적인 이해가 아니라, 투쟁하고 희망하는 그들의 온전한 일상체험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를 만난다는 점에서 다시금 하나님을 발견하고 있다."(29쪽)

 

"라너의 유명한 말처럼, 같은 시대를 산다고 다 동시대인은 아닌 것이다."(53쪽)

 

"처음부터 끝까지 교회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증명하는 신성한 곳이며,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물이 끊임없이 모두에게 전달됨을 세상에 알리는 모임이다."(78쪽)

 

나뭇잎이 더 이상 경건의 나무에 무성하지 못하는 때는 겨울일 것이다. 하지만 앙상한 나뭇가지들 덕분에 우리는 숲의 더 깊은 곳을 볼 수 있다."(79쪽)

 

이처럼 일상에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경건한 질문은 시대의 요청이자 긴박한 존재 의미에 대한 갈망이다. 며칠 전 읽었던 강도현의 <착해도 망하지 않아>도 브랜드가 아닌 '여기'에서의 이야기를 축적하는 '공간'으로서 카페를 주목한다. 하비콕스의 <세속도시> 역시 시대 속에서 교회가 새 옷을 입어야 한다고 재촉한다.

 

일상은 질문으로 가득 차있다. 단지 유대인이란 이유로 가스실에서 죽어야하고 착취와 억압을 당해야 했다. 악은 합리주의자들이 숭배했던 이성을 단숨에 쓰러뜨렸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까지 '증발' 시켜 버렸다.(85쪽) 전통적 기독교는 이성에 의해 체계적으로 세워진 세계다. 악은 부조리요 역사의 모호함이다. 이성으로 증명의 불가능하다. 결국 전통 기독교는 시대적 물음에 원론적이고 피상적인 변명 외에는 답을 주지 못한다. 놀라움의 극치는 '당시 죽음의 수용소를 운영한 이들은 대부분 세례교인이었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격리된 개념 속의 교리는 더 이상 시대를 담을 수 없다. 예수님의 탄생은 현실에서 도피하여 해석되지 않는 경전에 함몰된 종교지도자들이 지배할 때다. 성육신은 신이 사람이 된 신비이며 경이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인간(예수)이 하나님이라고 하자 신성 모독죄를 적용하여 죽인다. 예수는 여자의 몸에서 핏덩이채로 태어났고, 여자의 젖을 빨았고, 똥을 누었으며, 배고픔과 졸음을 이겨내야 했다. 현실에 대한 광적 집착이다. 예수는 현실에서 격리되지 않았고 배제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준 사랑으로 믿는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는 현실과 너무 먼 교리만으로 구원을 운운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질문한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나와 상관없는 하나님은 필요치 않습니다. 일상에 함께하지 않는 화석화된 교리로는 불충분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진짜 하나님은 살아계십니까?

 

교회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교회는 지금 답을 찾아야 한다. 이 책의 제목이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질문(탐구)(Quest for the Living God)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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