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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송의 다시프로테스탄트를 읽고

샤마임 2013.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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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송의 <다시프로테스탄트>를 읽고





도발적이다. 아니 무례하다. 적어도 장로교단에 소속된 목회자가 보기엔 말이다. 왜 그런 이해가 가능한지 제목을 찬찬히 들여다 보자. '다시 프로테스탄트'는 몇 가지의 의미를 내포한다. 먼저, 처음 프로테스탄트-종교개혁은 온전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다시'라는 수식어를 붙임으로 종교개혁의 완성'을 추구하자는 의미다. 종교개혁이란 말을 쓰지 않고 '프로테스탄트'라는 의미를 쓴 저의도 분명하다. 원뜻은 '정항자'기 때문이다.  다시저항해야 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역시 양희송 대표다운 발상이며 제목이다. 


단도집입적으로 말하면 이 책은 현재의 한국교회는 위기에 봉착해 있으며,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할 때라고 말한다. 그는 위기의 이유를 신뢰에서 찾는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신뢰를 잃었으며, 이것은 곧 전도되지 않음을 뜻한다. 총 3부로 나누었다. 1부는 현실으로서 한국교회를 진단하고, 2부에서는 1부의 현실 즉 문제가 야기된  이유를 세 가지에서 찾는다. '성직주의' '성장주의' '승리주의'가 그것이다. 마지막 3부에서는 대안이자 전망을 다룬다. 저자는 답은 교회 안에 있다고 말하며 개신교 생태계를 만들 것을 주장한다. 




1부, 한국교회 현실 - 포스트 2007년 시대


현실로 들어가보자. 양대표의 주장은 무엇일까? 첫장은 저자는 한국교회 일어난 기독교인의 급속한 감속을 지적한다. 한예로 2005년 개신고 인구 통계를 보면, 10년 전에 비해 10대는 30만명, 20대는 40만명, 30대는 30만명이 줄었다. 불과 십년 동안 100만명이 줄어든 수치다. 10-30대까지의 감소추세가 중요한 이후는 이들이 주일학교와 젊은 층이라는 점이며 교회의 다음세대를 감당할 세대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대 한국 기도굑를 '도시종교' 특히 '수도권 종교'라 명한다. 또한 40대 이상과 강남집중 현상이 두드러진다. 타지역과 중소도시에 비해 기독교인은 40대 이상과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운명의 2007년. 2007년 1907 평양 대부흥 운동의 백년이 되는 해다. 이 해를 기점으로 부흥이 다시 오기를 기대하며 다채로운 부흥관련행사들이 줄을 이었고, 교회에서도 부흥에 대한 설교를 쉬지 않고 했다. 이러한 부흥 기대와 기념은 무엇일까? 저자는 그만큼 한국교회가 거기(부흥)에서 멀어졌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말한다. 부흥행사를 거국적으로 시작하던 때 행사장 외부에서는 또하나의 운동이 시작된다. 홈에버상암점의 장장 510일 파업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운동장 안에서는 회개와 부흥을 외쳤지만 진작 행사장 밖에서 신음하는 노동자의 아픔을 외면한다. 


저자는 또 하나의 시간을 상기시킨다. 2004년 대광고의 채플반대운동을 펼친 강의석 군의 '종교의 자유' 대한 소송 1심 승소 판결이 200년 10월에 나왔다. 2005년 이후 '사립학교법'으로 극심한 대립을 일삼던 여야가 2007년 여야 간의 합의로 재개정하는 갈등이 진행 된다. 하나더 있다. 2007년 7월 19일 샘물교회가 아프카니스탄으로 선교회를 떠나면서 성도 23명이 피랍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해 장로 대통령 만들기는 어떤가? 2007년은 결코 평범한 해가 아니다. 저자는 '포스트2007년 시대'이란 표현까지 쓸 정도다. 전화기다. 한국교회는 지금 전화기를 맞이하고 있으며, 어디로 가야할지를 방향을 잃고 있다.


2부, 오해 - 성직주의, 성장주의, 승리주의


책 제목의 핵심은 2부다. 종교개혁의 근저는 평신도주의다. 로마 카톨릭의 사제주의를 타파하고 모든 신자는 제사장임을 천명한 것이 종교개혁이다. 그런데 500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는 다시 사제주의로 돌아갔으며,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이름으로 구별하고 구분 지었다. 성직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제만이 성경을 읽거나 해석하지 않고 일반교인도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있으며 해석할 수 있다. 


성장주의는 교회에 대한 왜곡이며 오해에서 시작한다. 무엇이 교회 인가? 반목과 다툼, 간음과 공적자금 유용 등이 난무함에도 교회 건물안에 있으며 '교회'이다. 목적 없는 무한 성장 궤도를 따라 비판 없이 달려가는 것이 진정한 교회일까? 저자는 이러한 현대교회를 비판하며 개교회 성장주의에 함몰되어 무비판적 성장을 추구한다고 지적한다. 이것이 성장이 아니라 비만이다. 부흥은 성장이며, 성장은 개교회의 교인수, 일년예산 등으로 환원된다. 타자를 위한 자리를 상실한 한국교회는 성장주의란 귀신에 홀려 있다. 


승리주의는 무례한 기독교로 이어져 있다. 무례한 기독교의 주범은 시끄러운 길거리 전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타자에 배한 배려 없음에서 시작한다. 기독교인이 되면 축복받고 성공한다는 식의 전도방식은 기독교로 하여금 '강함'을 보여줄 필요가 있으며, 약자에 대한 배려 보다는 '성공의 예'를 보여 주어야 하고, '타자에 대한 사랑'보다는 '믿음으로 얻어낸 부와 성공'을 보여 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승리주의 안에는 약자와 패자를 배제시키며 소외 시킨다. 예수님께서 창녀들과 세리와 같은 사회적 약자와 소외 계층을 사랑하셨던 것과는 정면으로 대치된다.


3부, 전환 - 기독교 생태계


대안은 간단하다. '세속성자'들이 등장, 출현하게 하는 것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열정 곧 에토스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회복의 장소는 일상이다. "에토스는 일상에서 쌓아 올린 신용이다."(177) 현장을 잃어 버리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길을 옮겨 본다.

첫째, 지역교회와 개별 신앙공동체의 장 결코 과소평가하지 말라. 

둘째, 연합운동의 장를 소중하게 여기라.

셋째, 기독교 사회를 위한 인프라를 구성해야 한다. 

넷째, 시대정신을 붙잡아야 한다. 


네 개의 주장으로 저자의 모든 주장은 담기는 쉽지 않다. 핵심은 다시 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과 대사회적 과제를 모든 교회가 공동으로 떠안고 협동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과제를 이루기 위해서 교회는 연합하고 지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이것을 '지식 생태계'라 칭한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교회 안을 주목하고 치중했다며, 다시 밖으로 눈을 돌리고 사회적 과제를 함께 고민하고 협동하여 대안을 제시하자고 한다. 이것이 프로테스탄트가 아닐까?


오해를 풀었다. 도전해 볼 만한 과제를 던져 주었다. 한국교회가 새롭게 일어설 대안도 제시했다. 그에 대한 편견을 풀어도 될 것 같다. 끝으로 그의 이력을 잠깐 소개하면 이렇다. 서울대학교 전자공학 전공, 영국 브리스톨 트리니티 칼릴지(BA)와 런던 신학교(MA)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굳이 이력을 소개하는 이유는 그가 아무런 근거 없이 냅다 소리만 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신학적 배경을 충분히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이서이다. 저자의 첫 책치곤 과감하고 도전적이다. 많은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에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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