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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숲을 거닐다 / 천양희

샤마임 2013.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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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숲을 거닐다

저자 천양희

출판사 샘터

초판 2006년 12월 20일 / 2007년 1월 20일 초판 2쇄

 

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해하기도 힘들고, 설득력도 약해 보였다. 우울한 영혼들이 술한잔 걸치며 부르는 한탄쯤으로 여겼다. 예전에 그랬다는 것이다. 산문을 좋아하고, 자신의 주장과 뜻이 분명하게 서린 논객의 예리한 붓끝이 맘에 들었다. 그러나 요즘 한가지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언어에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언어만큼 자기를 담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덱거의 실존적 문장을 빌리지 않아도 된다. 저자거리를 오가는 무명의 사람도 안다.

 

문장을 만들어 보자.

집은 사람이 거하는 곳이다. 산문은 이렇게 표현한다. 그럼 시는? 김환영의 '달팽이 집'이란 시다.

달팽이는 날 때부터 집 한 채씩 지고 왔으니, 월세 살 일 없어 좋겠습니다! 전세 살 일 없어 좋겠습니다! 몸집이 커지면 집 평수도 절로 커지니, 이사 갈 일 없어 좋겠습니다! 사고 팔 일 없어 좋겠습니다!

 

시는 언어다. 그러나 산문이 아니다. 해설하지 않는다. 다만 언어로 담아낼 뿐이다. 러시아 혁명기의 소비에트 초기를 대표하는 시인이며 극작가인 마야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가슴을 훔쳐간 그대 가슴 속에 모든 것을 빼앗아간 그대, 나의 재능을 거두어 가오. 어쩌면 난 결코 다른 어떤 창조도 못할 테니…"

시는 산문이 담을 수 없는 것을 담는다. 산문이 지구라면 시는 우주다. 심지어 언어가 담을 수 없는 것-곳까지 담아낸다. 시의 마음은 얼마나 크고 넓은 거실까?

 

그제서야 나는 시를 이해하게 되었고, 언어의 무한한 공간력을 간파했다. 이것이 나의 단촐한 시의 첫사랑의 고백이다. 시는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장영희 교수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읽고 참 좋았다. 이렇게 책을 소개하기도 하는 구나 싶어 사서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며칠 전 서면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천양희의 <시의 숲을 거닐다>를 보고 사들고 왔다.

 

난 이 책이 참 좋다. 단지 시의 좋음을 넘어, 시를 소개하고 시에 얽힌 역사와 사연이 좋다. 아련하고 몽학적인 시의 언어를 실존적으로 이해하게 만들어주고, 타자들의 끊임없는 무의미를 시의 언어로 창조하게 해준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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