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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삶과 죽음의 경계

샤마임 2013.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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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삶과 죽음의 경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후1:4)

 

마음의 상처로 인하여 많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상담을 받으러 오는 것을 볼 때, 그들의 한결 같은 특징은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지 않는다는 것이고 받기만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치유는 받기만 해서는 치유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다른 마음 상한 자들을 찾아 내가 받은 위로의 기쁨을 나누고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나누어 가져야 비로소 상한 마음이 완전히 치료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이스라엘에 있는 두 개의 바다, 즉 갈릴리 바다와 사해를 비교해 보아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요단강은 신선하고도 맑은 물을 갈릴리 바다로 흘러 들어가게 합니다. 요단강으로부터 생기 넘치는 물을 공급받은 갈릴리 바다에는 수많은 물고기들이 번식하여 풍부한 어족을 이루고 있으며 그 양쪽해안에서는 싱싱한 초목과 야채들이 자랍니다. 한마디로 갈릴리 바다는 생명의 바다입니다. 그러나 그 생기 넘치는 물은 그냥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 물은 다시 갈릴리 바다를 빠져 나와 계속 남쪽으로 흘러 드디어 사해로 흘러 들어갑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사해에서부터 물이 다른 곳으로 빠져 나가는 길이 없어 흘러 들어온 물은 그냥 저장되기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도 맑고 신선하여 많은 생명을 탄생시키고 양육하였던 그 물이 사해에 들어오면 그만 생명력을 잃고 스스로 썩어 갑니다. 그래서 사해의 물속이나 해변에서는 어떤 고기나 식물도 자라지 못하게 됩니다. 그 바다가 가진 '사해'라는 이름이 이것을 보여 줍니다. 즉 죽은 바다요 썩은 바다라는 뜻입니다.

 

생명이 약동하던 갈릴리 바다의 물이 사해에서 죽어버린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단한가지 입니다. 받기만 하고 흘러 보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해에서는 갈릴리 바다와 같은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해에서는 갈릴리 바다와는 달리 나누는 일이 없습니다.

 

[죽음의 바다로 불리는 사해의 한 부분의 모습, 소금으로 가득 차 있다.]

 

신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상한 심령을 완전히 고침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앞의 비유에서와 같은 이유에서 보듯 나눔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맛보기를 바라기는 하지만, 자기가 받은 위로를 더 큰 환난에 처한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데에는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나눔은 이처럼 신자들로 하여금 계속하여 살아 있게 하고 회복하며 치유하는 역사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단어가 보여주듯 죽음(Death-죽음, 끝 종말이라는 뜻)은 정지된 것이고 삶(Living-생명 있는, 살아있는, 물 등이 흐르고 있는)은 움직임입니다. 계속하여 나눔이 있어야 계속하여 살아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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