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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설교-말씀이 육신이 되어

샤마임 2012.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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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설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한복음 1:9-14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프랑스인이고 유명한 곤충학자인 장앙리 파브르가 있습니다. 교수이면서 곤충학자로 유명합니다. 그가 남긴 <파브르의 곤충기>는 시대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곤충이라는 미천한 존재에 관심을 갖게 했고 사랑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곳에 보면 송충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파브르는 송충이를 관찰하다 아주 재미있는 광경을 발견했습니다. 송충이는 소나무에 살면서 솔잎을 먹고 살지만 가끔씩 길을 잘못 찾아 엉뚱한 곳으로 떼를 지어 다니기도 합니다. 송충이는 무리를 지어 다니기 때문에 가장 앞줄에 있는 대장 송충이가 하얀 실을 통해내며 가면 뒤에 있는 송충이들은 토한 실을 기준삼아 뒤를 졸돌 따라 갑니다. 그런데 가끔씩 대장 송충이가 길을 잘못 들게 되면 미아가 되어 영원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됩니다. 어느 날 송충이는 화분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화분 가장자리를 돌고 또 돌다 결국 모두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파브르는 이것을 송충이의 죽음의 행렬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곳에서 살짝만 비켜 나와도 살 수 있는데도 송충이들은 화분에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앞서간 대장 송충이가 뿌려놓은 하얀 줄만 따라가다 결국 그곳에서 모두 굶어 죽고 만 것입니다.





 

1. 죄인들의 특징(1): 전적타락으로 영적 감각이 둔해짐

 

죽음의 행렬! 송충이에게만 그것이 있을까? 사람들에게는 없을까? 인류의 역사를 가만히 살펴보면 사람들의 역사도 송충이의 죽음 행렬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처음 아담이 만들어 놓은 죽음의 행렬을 사람들은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찌하지 못하고 계속하여 ‘전진!’ 또 ‘전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송충이는 촉감이 너무 둔하기 때문에 바로 옆에 있는 솔잎도 모르고 지나친다고 합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타락이후 영적인 감각이 둔해진 사람들은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그것이 자신을 살려주는 생명의 복음인지도 모르고 거부합니다. 앞서가신 대장 송충이의 말만 믿고 계속하여 전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도 자신들이 잘 알지 못하지만, 자신이 만들어 놓은 죽음의 행렬을 계속합니다. 송충이가 바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도 송충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참 빛이 세상에 비추었지만 사람들을 그 빛을 거절했고, 심지어 주인이신 하나님이 자기 땅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주인을 배척하고 부인했습니다. 완전히 영적인 소경들이 된 것입니다.

 

2. 죄인들의 특징(1): 완고해짐

 

죄인들의 특징 중에서 두 번째 특징은 완고함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물 속에서만 사는 개구리는 넓은 세상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경험한 것이 전부 또는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배우지 못하면 완고함에 이르기 쉽습니다. 이 속담의 원출처는 중국 사상가인 [장자]의 <추수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물 안의 사는 개구리와 바다를 논할 수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진리의 바다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땅이라는 우물에 갇혀 사물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할 뿐더러 진정한 영적인 세계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경험한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해 버립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또한 옳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에 능통하고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과 율법사, 서기관, 제사장들 중에 단 한 명도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또한 관심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왜곡시킨 방식으로 믿는 하나님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절대 그런 식으로 우리를 구원하리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눈에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아기가 되어 엄마의 젖을 먹고, 똥을 싸고, 울 수 있단 말입니까? 이건 아니잖아요!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의 한계를 뛰어넘고, 우리의 사고의 패러다임을 초월하여 구원의 손길을 베풀었습니다.

 

3. 성육신(1): 세상에 대한 긍정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첫 번째 의미는 ‘세상에 대한 긍정’입니다. 우리 인류는 죽음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자끄엘륄은 그것을 ‘필연의 역사’라고 명명했습니다. 쉽게 풀면 ‘죄의 삯은 사망’의 역사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이 죽음의 행렬에서 예외는 아무도 없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했을 때 그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면서 모두 죽었던 것처럼 인류의 역사도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죄의 값을 받게 됩니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죄인들은 반드시 죽고,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의 인류 역사의 끝이요. 인간의 끝입니다. 이것을 알고 행하는 삶이 ‘종말론적 삶’이다. 언제가 하나님 앞에 선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 이 땅에서 행한 모든 행위는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그러한 지식을 가지고 죽음을 깊이 묵상하고, ‘코람데오’ 하나님의 면전 앞에서 살아가는 자가 복된 사람입니다.

좋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운명을 전복시키기 위하여 주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입니다. 즉 하나님을 이 세상이 그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sign사인, 표지, 선언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세상을 지배하는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선전포고(宣戰布告)’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16을 암송해 봅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이 이 사실에서 위로를 얻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절대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나는 못난이야’ ‘나는 버림받은 인생이야’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32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선물)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 성육신(2): 자녀 되는 권세를 주심

 

성육신의 의미 두 번째는 12절에서 찾겠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권세를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모든 통치권을 부여 받는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 땅에서 우리는 예수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이 있고, 영원한 소망을 갖게 됩니다. 어린이 복음송 중에 ‘나는 왕자다’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왕자이며, 공주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꽃거지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왕족입니다.

 

자녀의 권세를 회복하는 것이 우리의 급선무(急先務)입니다.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라는 소설을 보면, 왕자는 거지와 옷을 바꾸어 입어도 왕자처럼 행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거지 주제에 왕자 행세를 해?라고 하면서 때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옥새를 다시 찾아냄으로 다시 왕자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러자 그동안 누리지 못한 모든 왕자로서의 권세와 위엄을 되찾게 됩니다. 처음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통치권을 주었습니다. 모든 만물이 그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타락으로 인해 동물도 그를 공경하는 적이 되고, 땅은 엉겅퀴가 나고 아내조차 자신의 경쟁과 시기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찾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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