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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감동있는 목회를 하라!

샤마임 2012.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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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감동이 있는 목회를 하라!

 

감동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가? 예전에 어떤 목사님은 감동있는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 적이 있다. 그분이 어떤 사역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감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는 생각해 볼만한다. 감동을 이야기 전에 한 가지 재미나 이야기를 들어보자. 심리학에서 종종 이용되는 이야기다. 자 게임을 시작해보자!

 

어떤 사람이 10만원을 당신에게 준다. 그런데 당신 옆에 한 친구가 있는데, 당신은 10만원을 받고 그것은 친구와 나누어 가져야 한다. 얼마를 친구에게 주던지 그것은 당신의 자유다. 문제는 그 친구가 당신이 준 돈에 불만을 품고 받지 않으면 당신도 그 돈을 받을 수 가 없게 된다. 그러나 단 10원이라도 친구가 받는다면 당신은 나머지 돈을 받을 수 있다. 그 사실을 당신의 친구가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을 가상으로 실험을 해 보았다. 1-3만원을 줄 때 상대는 받지 않았다. 이번에는 4-5만원을 주었다. 이번에는 받는 사람의 비율이 높아졌다. 문제는 불만을 표시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6-10만원을 주고 나는 4만원을 갖는다고 했다. 그러자 상대편은 고마워하면서 당장 받았다.

 

이 게임에서 작용하는 심리는 시기심이다. 위에 나오는 게임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이렇다.

‣ 1-3만원: 대부분 받지 않는다. 적은 돈을 준 상대편에게 불만을 표출한다.

‣ 4-5만원: 받는다. 그러나 고마워하지는 않는다. 내 때문에 당신도 돈을 받게 된다고 생각하고 나에게 고마워하라는 식으로 이야기 한다.

‣ 6-10만원: 고마워하고 감동을 받는다. 이렇게까지 줄 필요가 없는데 많이 주었다고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사람은 상대적으로 박탈되고 소외되었다고 생각하면 타인을 향해 불만을 표출한다. 평등하도고 생각하면 불만은 없지만 아무에게도 고마워하지 않는다. 마지막 단계는 상대편이 자신을 위해 희생하고 수고했다고 생각하면 감동을 받는다.

 

감동은 어디서 발생하는가? 그것은 일반적으로 예를 갖추는 수준을 뛰어넘을 때 일어난다. 감동이 있는 목회는 어디서 일어날까? 상식을 뛰어 넘어 감격적인 설교와 삶을 보여줄 때 일어난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성도는 세상에 감동을 안겨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 뺨도 돌려주고(마5:39), 속옷까지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주고(40),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가주라(41)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오른편 뺨, 속옷, 오리는 일반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상식의 선을 말한다. 기독교인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수준을 뛰어 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심지어 사랑할 수 없는 원수까지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축복)기도를 해 주어야 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뛰어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까지 하셨다.(마5:20) 복음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어 감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목사가 성도들에게 감동이 있는 ‘서비스’를 하라는 말이 아니다. 고객(교인)이 만족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목회가 아니다. 상품을 팔 듯 복음을 거래해서는 안 된다. 복음은 돈으로 살 수 있는 한계를 뛰어 넘는다. 복음이 공짜인 이유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는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것이며,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감동은 그러한 죄를 용서받았다는 깨달음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자랑할 수 없다.

 

내가 구원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독을 집어넣는 순간, 감동은 즉시 사라지고 은혜가 사라진 율법주의에 빠지게 된다. 적당한 선행으로 값을 치르고, 거액의 헌금과 헌신적인 봉사로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복음을 타락한다. 복음은 수치스러운 것이다. 부끄러운 스캔들이다. 복음에는 처녀의 간통사건이라는 스캔들이 들어가 있고, 쓰레기 같은 인간들과의 교제가 일상적이며, 정치적 반역자와 한 패가 되어야 하고,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황당한 소문을 자랑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굴욕과 수치, 모욕과 소외, 적대감과 핍박이 복음이다. 누가 그것을 값 주고 살 수 있겠는가? 복음은 쇼핑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결국 감동있는 목회는 이신칭의라는 성경적 원리를 회복하는 것이며, 솔라 피테를 실천하는 삶이다. 아브라함이 믿으니 이를 의롭게 여기신 것이지,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다. 감동이란 나의 죄인 됨을 알고, 구원받을 수 있는 자격이 없음에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다. 즉 십자가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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