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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네 이웃을 사랑하라

샤마임 2012.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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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무척 사무쳐 다가온다. 먼 이웃이 아니다. 원수는 더더욱 아니다. 네 이웃이다. 나의 가까운 이웃, 한 이불 덮고자고 아내와 이이들 일 수 있고, 나와 매일 얼굴을 맞대는 사장과 회사 동료일 수 있고, 학교와 학원에서 만나는 친구 일 수 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몇 개월 전 어떤 여집사님의 말이 갑자기 생각난다. "목사님! 저를 괴롭혔던 원수는 이제 용사가 되는데 아침마다 보는 남편은 도저히 용서가 안 됩니다." 이혼 직전에 있던 분의 이야기다. 들으면 답답해오면서도 울림이 있는 말이다.

 

용서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용서가 이토록 어렵단 말인가? 요즘 미로슬라브 볼프의 <배제와 포용>을 읽으면서 네 이웃을 사랑하는 말이 비수처럼 영혼 속에 꽂힌다. 삶의 무게가 무거워질 때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볼프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이야기에서 큰 아들의 배제를 주목한다. 동생은 형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 분노할 사람은 아버지임에도 우리는 성경에서 큰 아들이 돌아온 동생(형은 동생이라고 말하지 않고, 당신의 아들로 부른다)에게 분노한다. 방탕한 동생이나 형이 있는 사람이라면 형의 마음을 감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볼프는 형이 동생에게 분노한 이유를 형 자신이 만들어 놓은 '규칙'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만의 선이 동생을 정죄한 것이다. "일하는 사람은 허랑방탕한 사람보다 더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 순종하는 사람은 무책임하게 명령을 어긴 사람보다 더 영광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식의 자기만의 선이 동생을 배제한 것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이러한 '선'이 무섭게 관계를 파괴하고 삶을 어렵게 하는 것을 보았다. 나의 남편은 목소리가 차분하게 좋겠는데 그렇지 않은 것, 나는 자랄 때 어려운 가운데서도 1-2등을 놓치지 않았는데 자녀들이 그렇지 않을 때 등등 수많은 자기만의 선이 관계를 힘들게 한 것이다. 무의식중에 만들어 놓은 자기만의 기준이 타자(이웃)를 악마로 만들고 정죄한다.

 

지금 아니지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신발정리를 하지 않는 아이들 때문에 무척 힘들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면 실내화가 아무렇게나 너부러져 있는 것이다. 몇 번을 이야기하고 매까지 들었는데도 도무지 고쳐지지 않았다. 한 날은 큰애에게 어떻게 하면 신발이 저렇게 되느냐고 물었다. 큰애가 시범을 보여 주었다. 신을 위로 밟듯 신고 화장실에 들어가 볼일을 보고 나면 그곳에서 뜀뛰기를 하듯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신은 화장실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가거나 뒤집어 진다. 그 후에도 몇 번은 교육을 했는데 아이들의 태도는 바뀌지가 않았다. 결국 내가 포기하고 말았다. 볼 때마다 아이들은 다정하게 교육하는 것은 잊지 않았지만 아이들을 포기하고 나니 훨씬 수월해지는 것은 스스로 느꼈다. 이뿐 아니다. 나를 빼고 아내와 아이들은 치약을 짤 때 중간을 꾹 눌러서 대충 짜고 다시 집어 놓는 버릇이 있다. 양치를 하러 치약을 보면 끝에서부터 다시 잡아 위쪽으로 몰아 놓는다. 그러면서 약간 투덜거리면서 왜 이렇게 치약을 짜느냐고 야단을 치지만 아직도 고쳐지지 않는다. 사소하지만 마음이 상하는 것들이다. 결국 이것도 내려놓아야 했다. 이젠 중간이 훌쭉히 치약을 보고도 아무런 불편함이나 마음 상함이 없다. 그러기까지 수많은 상함과 인내가 있었다.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변화되기를 조건으로 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변화 시켜야 한다. C. S 루이스가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것은 상처 받기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네 가지 사랑>에서 말한 적이 있는데 참 옳은 말이다. 에로스적 사랑이 상대를 나에게 맞추는 배제로서의 사랑이라면 아가페의 사랑은 나를 변화시키는 포용으로서의 사랑인 것이다. 십자가의 사랑이 사랑의 절정이고 캐논인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은 먼저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포용하고,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다. 바울은 직분을 맡을 자는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를 대할 줄을 알'아야(살전4:4) 한다고 분명히 선을 긋고 있다. 또한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딤전3:2,12) 아내가 되고, 남편이 된다는 것은 서로를 포용하고 용납해야 하는 의미를 감당하는 것이다. 베드로도 역시 아내들을 향하여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권면한다.(벧전3:1) 순종은 불의에 굴복이 아니라 사랑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이웃 사랑을 성취 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을 멈추고 타자를 적극 수용하는 것으로 관점의 패러다임이 변화되어야 한다. 

두번째는 내 안에 타자를 수용할만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세번째는 타자와 소통을 시도하고 보완하고 수정해 나가야 한다.

사랑은 일방적이지 않다. 성경은 '서로 사랑하라'고 충고한다. 사랑의 완성은 '서로' 하는 것이다.

마지막 네번째는 앞의 세가지를 반복하는 것이다.

볼프는 이러한 과정을 반복함으로 '공통의 언어'를 획득한다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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