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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포스터, 음욕에 관한여...

샤마임 2012.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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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섹스.권력>으로 유명한 리차드 포스터는 음욕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음욕은 그릇된 성을 창출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관계성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음욕은 상대방을 대상으로, 물건으로, 비인격적인 존재로 바꾸어 버린다. 예수님께서는 음욕이 성을 값싸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이를 정죄하셨다. 음욕은 성을 창조시의 가치보다 못하게 만든다. 예수님께 있어서 성은 너무나 선하고 고상하고 거룩한 것이어서 값싼 생각으로 취급하실 수가 없었다.

-리차드 포스터 <돈.섹스.권력> 중에서


처음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성경은 그들이 서로 벌거 벗었으나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2:25)고 기술한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부끄럽다. 옷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지 않으면 부끄럽다고 느낀다. 수치와 모욕을 옷이 가려준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옷이 무엇이길래 수치를 가려준다는 것일까? 이유는 옷 너머에 있는 인간의 음욕 때문이다.


성은 두 가지의 측면을 가진다. 하나는 쾌락이고, 다른 하나는 후손 증식이다. 두 가지는 구분은 할 수 있지만 분리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역사는 두 극단에서 항상 시소게임을 했다. 한 때는 성을 극도의 부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조차 금기시한 때가 있었다. 현대는 성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고자라도 되는 것처럼 취급받고 있다. 리차드 포스터는 성에 대하여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몇 가지만 들어 보자.


"우리 인간의 성, 즉 남성과 여성은 단지 인간이라는 종에 우연히 첨가된 것이거나 인간성을 유지하는 어떤 편리한 방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참된 인간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로 현존한다."


리차드 포스터는 남녀의 성을 '관계'로 이야기한다. 칼 바르트의 이야기를 언급하며 하나님의 형상(이마고 데이)으로서의 인간은 불가피한 남녀의 관계를 요구하고 그 관계를 규정하는 중심에 성이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 둘이 부모를 떠나(의존적인 존재에서 독립적인 존재로) 나아갈 것을 말한다. 그리고 서로(남녀)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창2:24)고 말한다. 그렇다면 성은 남녀의 연합을 위한 상징이자 수단이 된다.


그러나 타락 후 남녀의 관계는 연합이 아닌 억악과 착취의 관계로 돌변한다. 남자는 여자를 지배하고, 여자는 남자의 지위를 찬탈하는 경쟁적인 존재로 바뀌고 마는 것이다. 연합이 아닌 경쟁 상대이다. 무엇을 위해 서로 경쟁하는가? 권력, 즉 지배권이다. 타락 이후 가장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권력의 헤게모니가 인간의 정신 구조안에 내재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하는데, 사랑에는 네 가지의 측면을 포함한다. 리차드 포스터는 이것을 '사랑의 강렬함' '사랑의 절제' '사랑의 상호성' '사랑의 영원성' 으로 구분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이마고 데이)를 따르는 존재방식이다.


사랑의 연합이 절대 피상적이거나 생물학적인 현상만이 아닌 것은 성적인 결합이 곧 영적인 결합이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남녀의 결합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으로 끌고 갔다.(엡5:32) 심지어 창기와 합하는 자는 창기가 된다고까지 선언한다.(고전6:16-17)[각주:1] 그리스도는 신랑이며, 교회는 신부라는 메타포는 요한계시록에서 정점을 이룬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은 신랑인 재림하는 그리스도와 이 땅에 있는 신부인 교회의 결혼식으로 막을 내린다. 교회론에 있어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각 지체는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구분된 한 몸'이다. 성적인 결합은 곧 영적인 결합과 별개가 아니다.


리차드 포스터는 성의 영적인 부분이 결코 작지 않음에도 죄로 인하여 그것이 왜곡되었음을 지적한다. 외설(Pornography), 음욕(Lust), 동성애 등이 바로 그러한 양상들이다. 이러한 형태들은 건전한 남녀 관계 안에서의 성이 아닌 비인격적이고 피상적인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정신질환의 일종이다. 올바른 성을 추구하는 방법은 사랑이라는 토대 위에 친밀함과 신뢰가 함께 아우러진 교제이어야 한다. 


"어떤 관계 속에서 육체적인 친밀감이 점증하게 되면, 언제나 그 관계를 향한 점증하는 위탁의 신뢰도가 비례적으로 뒤따라야 한다."


성은 사랑과 분리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사랑 없는 성은 자신의 쾌락을 위한 타자의 수단화이다. 서로에 대한 신뢰에서 친밀함이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성은 서로에 대한 책임을 요구한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고,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성은 상호계약이다. 책임을 진다는 말은 주체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 된다. 나의 감정과 형편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우선순위에 있어서는 내가 아니라 상대방인 것이다. 이것이 책임을 지는 것이다. 남자는 아내를 버릴 수 없고, 아내 또한 남편을 배신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성적방탕이 극심했던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 부부는 서로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충고한다.(고전7:3) 


성은 서로 알아가야할 필요가 있다.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면 순식간에 성자가 되지 않는다. 개혁주의 성화론에 의하면 신자가된 사람은 점진적인 죄로부터의 오염을 벗어나 점차 하나님을 닮아간다고 한다. 성화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배와 기도, 말씀 공부와 순종의 실천적 삶이 바탕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성은 어떨까? 리차드 포스터는 '결혼생활을 증진하기 위하여 신중한 노력들을 경주하는 것은 성경공부나 기도하는 것 만큼이나 신성한 과업'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결혼의 관계성을 성경공부나 기도보다 소훌히 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말한다.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서로를 알아가는 경이로운 도전으로부터 단절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주님은 음욕을 품는 것과 간음을 구분하지 않았다.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한 것으로 말씀하신다. 타락 이후 죄성을 가진 우리에게 불가능한 도전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 말씀은 진정한 사랑과 성을 위해 더 많이 노력하고 수고하고 공부해야 할 것을 알려준다. 로마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듯 진정한 사랑 역시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수고와 애씀의 결과이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단을 거둘 수 있는 것이다.


  1. [고전] 6:16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고전] 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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