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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25-30 내게 와서 배우라

샤마임 2011.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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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와서 배우라

 

본문 마태복음 11:25-30

 

남편이 죽고 힘들게 살아가는 어떤 아줌마가 있었습니다. 딸이 셋이나 있지만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무당을 불러 굿도 해보고, 절에가서 천번제도 드려 보았습니다. 그것도 차지 않아 다른 종교들을 이곳저곳 찾아 다녔지만 마음에 평안을 결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살림에 세 딸을 위해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을 했지만 벌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훨씬 많았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방황을 하며 살아갔습니다. 그 날도 여느 때처럼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날 따라 바람이 불어서 낙엽들이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뭔가 이상한 종이 쪽지가 있어 들어보니 어느 교회의 전도지였습니다.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짐은 가벼움이니라 하시니라.”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11:28-30 말씀이었습니다. 그 아줌마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고 곧바로 교회를 나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집사로 교회를 섬기며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 집사님은 그 때를 회상하면서, ‘그 말씀을 읽는 순간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뭔가 뭉클한 것이 요동치면서 자신을 흔들어 놓았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찾고 헤매던 것이 바로 자신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 좋았고, 지금까지 바보같이 방황하며 살았던 자신이 한심스러웠고, 지금이나마 자신을 만나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합니다. 오늘 이 자리가 어떤 분에게는 그 집사님과 같은 특별한 ‘그 날’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신앙으로 살아가야할 도리와 특권과 기쁨을 생각해 봅시다.

 

1. 첫째, 세상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이 살아간다.

 

마태복음 11:25-27까지의 내용은 아버지를 아는 지혜를 어린아이들에게는 주시지만 세상의 지혜자들과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신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숨기신 것을 ‘이것’이라고 표현하는 데, 더 정확하게는 ‘그것들’입니다. 그것들은 무엇일까요? 본문의 내용을 살펴 본다면 그것은 분명 앞서 있어서 설교에 대한 것들입니다. 너무 멀리 가지 말고 11장의 내용만을 본다면 세례요한이 질문했던 ‘오리라 예언된 인자는 예수님이다.’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많은 이적을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이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큰 심판을 받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세상의 지혜자들과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역사의 주관자는 예수님이시며, 세상의 끝날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중요한 사실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철학자들과 현자들과 선생들이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리석고 연약하고 부족한 어린아이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주관자 되심에 세상의 끝 날에 일어날 심판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왜 지혜자들에게 감추어져 있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나 있을까요?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들이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25절에서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주님의 평가가 아니라 세상이 그들을 평가한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고린도전서 1장에서 십자가의 도를 말하면서 십자가의 도는 세상의 지혜있는 자들은 알지 못한다고 선언합니다. 왜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없을까요? 그들은 지혜로운 자들이요, 현자들이라고 칭함을 받고 있지 않는가요?

 

인류사에 있어서 철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대 그리스 철학과 중세 철학, 르네 데카르트를 시작으로 한 근현대의 철학으로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철학에는 자연철학자들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연을 바라보면서 자연 속에 존재의 본질이 있다고 생각하고 깊이 생각하고 고민했습니다. 누구는 물이라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불이라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흙이라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숫자라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운동이라고 말했습니다.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결론처럼 보이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존재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은 결코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들은 결코 존재의 의미도 존재의 시작도, 존재의 이유도 목적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을 뒤로하고 새로운 인간철학의 시대를 열었던 소크라테스는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나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는 ‘네 자신을 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자신도, 그 말을 들을 사람들 어느 누구도 ‘내 자신’ 누구인지 아는 데 실패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누구인지, 세상의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그리고 어디로 흘러가는 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성경에서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대철학을 마무리하고 중세철학의 문을 열었던 어거스틴은 ‘나를 알기 위해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그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통찰은 하나님을 아는 데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진실로 알 지 못합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철학자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진리에서 배제 시키려 했습니다. 특히 영국을 중심으로 시작된 경험주의 철학은 하나님은 객관적으로 경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철학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특히 토마스 홉스는 [철학원론]에서 철학은 신학, 즉 하나님, 영원한 것, 창조되지 않는 것, 파악할 수 없는 등에서는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유물론적 사고를 가진 홉스는 인간은 물체에 불과하여 동물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존재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이후에 일어난 수많은 철학자들 또한 하나님을 떠나 자신들 만의 진리를 추구해 나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자유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정치는 어떻습니까? 도덕율은 200년 전부터 더욱 진보했습니까? 사람들은 더욱 겸손해지고 사랑하고 인류애로 하나가 되었습니까? 하나님 없는 진리를 추구했던 교육은 어떻습니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인간들은 더욱 악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국가는 더 큰 반목과 대립으로 시끄럽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왜 세상의 지혜로운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지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사도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나도 비참합니다. 그들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도 없을뿐더러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없으며, 자신들의 낙원을 만들기는 커녕 이 땅에 저주를 불러왔고, 결국 멸망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필연의 역사로 이끌려 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처럼 인류를 끊임없이 아버지 없는 자유를 갈망했습니다.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 없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가 아닌 슬픔과 서로에 대한 불신과 욕망의 충돌로 인한 갈등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참된 진리도 기쁨도 소망도 없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불쌍한 사람들을 향하여 ‘나에게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둘째,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천로역정에 보면 어떤 사람이 등에 짐을 지고 고통스럽게 살아갑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크리스찬입니다. 그는 장차 망할 성인 장망성에 살면서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벗어날까를 고민하다 전도자의 도움을 받아 십자가를 찾아가면 그의 순례의 길을 시작합니다. 그는 장망성을 떠날 때 친구들과 가족들이 그를 말리며 제발 가지 말라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그는 귀를 막고 오직 십자가 십자가를 외쳐 달려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주님께로 가야 합니다. 주님께로 가기 전에는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도 소망도 없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성적 때문에 잔소리를 엄마를 죽여 8개월 동안이나 방치한 어느 고등학생이 뉴스가 되었습니다. 남편과 별거 중이었던 아내는 아들에게 1등하라며 잠을 못하게 하며 심하게 체벌했다고 합니다. 아들은 그러한 엄마에게 격분하여 살인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는 남편에게 버림받고 아들에게 모든 것을 걸고 아들에게 공부만을 강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믿었던 아들에게 도리어 죽임을 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그 어머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자녀들에게 거는 기대는 동일할 것입니다. 작년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으로 유명한 하버드 법대의 마이클 샌델은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라는 책에서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폭로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안타까움을 표시했습니다.

 

“초등학교에서 국가시험이 점점 많아지는 바람에 전국적으로 모든 유치원에서 교육과정을 더 빽빽하게 하고 있다. 미술이나 쉬는 시간, 낮잠 시간 대신 읽기와 산수, 과학을 채운다. 1.2학년이 되면 숙제와 무거운 책가방 때문에 씨름해야 한다. 1981-1997년 만 6-8세 아들에게 부과된 숙제가 세배나 증가했다.”

 

그러나 미국의 사정은 우리나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의 아이들도 초등학교 2.4학년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실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루에 최소한 2개에서 많게는 5개까지 학원을 다니고 있으며, 저녁 늦게까지 학원에 다니며 10시가 넘어 집에 들어오는 아이들이 허다합니다. 놀기에 바빴던 저희들의 세대에게는 상상하기 힘든 모습입니다. 그들에게 쉼은 꿈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단어입니다. 참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사는 초등학생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들의 짐은 오직 이 험학한 세상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는 고민이 많은 부모들의 강요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러한 생존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내게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딸 셋을 혼자서 키워야 하는 그 집사님의 힘겨운 삶은 영락없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바로 다음 장인 마태복음 12장 초반부에서는 안식일 논쟁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안식일에 배가고파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을 향하여 바리새인들이 보고 안식일을 어겼다고 비방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성전에서 나오는 떡을 먹은 다윗의 사건을 이야기와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은 안식일에 율법을 어기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12:7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예수님은 다윗과 제사장들이 분명 율법을 어겼음에도 그들은 무죄하다고 선언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밖으로 드러난 율법을 어겼는지는 몰라도 율법이 의도한 그 목적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사람을 옭아매고 괴롭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바로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물고기에게 물과 같습니다. 물이 답답하고 그 안에 갇혀 지내는 것이 힘들다고 밖으로 나오면 죽는 것처럼 물 안에 있을 때 생명이 유지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셋째, 주님께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게 와서 내게 배우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내게 오면 쉬게하리라고 말씀하신 다음 29절에서는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촉구하십니다. 멍에는 소가 쟁기나 수레를 끌기 위해 소 목덜미 위에 가로로 얻는 나무입니다. 멍에를 진다는 말은 일을 하라는 뜻입니다. 일을 하라는 뜻이 분명한 것은 배우라는 바로 그 다음 말씀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32절 왜냐하면 나의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다.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 일을 하라는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쉼을 정지의 개념으로 받아들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쉼은 그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쉼은 일하는 것입니다. 안식은 언제 오는가? 주의 일을 할 때 기쁨과 즐거움이 옵니다. 안식일의 개념은 일을 쉬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그 날은 노는 날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날이고, 주님을 위해 일하는 날 즉 예배하는 날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일하다’라는 뜻의 ‘아바드’는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이 의미는 영어에서도 동일합니다. 영어로 예배를 ‘워십 서비스’라고 말합니다. 주일은 주님께 ‘서비스’하는 날입니다. 즉 주님을 예배하는 날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을 받아 들이고 주님을 위해 일하는 날입니다. 여성 신학자인 마르바 던은 [안식]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안식일에 그분의 사랑에 잠길 때, 그분의 은혜가 우리에게 넘치고, 자신의 역할에 대한 우리의 자각이 분명해지며, 그분이 분명하게 제시하는 우리의 임무를 해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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