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세 77 용서할 수 없는 데카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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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나는 결코 데카르트를 용서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모든 철학에서 될 수 있는 대로 신을 제외하려고 한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질서를 움직이게 하려고 신을 하여금 손가락 한 개를 움직이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는 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데카르트의 회의주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의심하는 것이다.
의심하지 않으면 죽은 철학이다는 심각한 도전을 통해 결국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그 어떤 것, 즉 그것을 본질 또는 신이라고 말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순진한 그의 생각은 회의주의를 낳았고, 더 나아가 이신론으로 성장했고, 20세기로 넘어오면서 무신론을 탄생시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주는 그냥 우연히 존재할 리는 없는 것 같고, 그렇다고 너무 순진하게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믿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절충적으로 만든 것이 바로 모든 것을 일단 의심해 보고 그래도 의심할 수 없는 한가지 그 무엇. 즉 신을 인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순진한 교만은 하나님을 인간 삶에서 격리시켰고,
부정하게 했고,
죽었다고 말하게 만든다.
(니체같이 천재처럼 보이는 바보는 자신이 신이라고 말하면서,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다)
80
육체적인 절름발이는 우리가 바로 걷고 있음을 인정하지만, 정신적인 절름발이는 마치 우리가 절뚝거리며 걷는 것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에픽테토스는 특별히 강조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두통을 앓고 있다'라는 말을 들어도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당신은 추리나 서택을 잘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그 이유는 이렇다. 우리는 두통을 앓고 있지 않다든가 절름발이가 아니라는 데 대해서는 확신을 갖고 있지만, 진리에 대한 선택에는 그런 확신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파스칼은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나눔으로 정신이 얼마나 많은 오류와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지를 보여준다. 육신적인 부분에 대해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신적인 부분에 대해 오류가 있다고 말하면 크게 화는 내고 믿지 않으려 한다. 이것은 인간이란 존재가 정신적인 부분에 얼마나 자만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타락의 가장 심각한 증거는 바로 정신적인 타락으로 인해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파스칼은 81에서 다시 이렇게 언급한다.
81
정신은 스스로 믿고, 의지는 스스로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양자 모두에게 진정한 대상이 없으면 잘못된 대상에게 집착하게 된다.
데카르트의 가장 큰 실수는 스스로 맞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데 있다. 회의주의는 옳은 것이 아니다. 잘못된 것이다. 회의주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무려 300년이나 걸렸지만 그 증거는 확실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우리의 잘못된 판단과 생각도 역시 그렇게 될 것이다. 지금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아니 지금은 가장 탁월하다고 생각하고 가장 옳다고 생각할런지는 모르지만 잘못된 판단은 반드시 그 결과에 있어서 악으로 기울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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