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묵상] 4. 2:1-9 기도하는 요나
[요나서묵상] 4. 2:1-9 기도하는 요나
요나는 기도한다. 왜 기도했을까? 우리는 요나의 기도 속에서 시편을 읽는다. 요나의 기도는 철저히 시편의 기도에 근거한다. 그의 기도는 죽어야 하는데 살아있는 현존에 대한 깊은 자각이다. 우리는 요나의 기도는 기도 이전과 이후의 삶으로 나눈다. 요나의 기도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편의 기도를 찾아 대입해보는 확인 작업이 아니다. 소리 내어 기도해보는 것이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1절)
기도의 장소는 ‘물고기 뱃속’이다. 그곳은 스올이고, 죽음의 자리다.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았다. 그의 기도는 기적에 대한 본능적 반응이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다. 그는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관계의 발견이다. 요나는 이제야 하나님을 찾아 간다. 절망의 순간에 말이다. 하나님을 찾는 순간은 늦은 때가 없다. 하나님을 찾은 때는 언제나 가장 빠르다. 요나의 기도는 가장 적합한 때의 기도이다. 비록 그곳이 물고기 뱃속이라 할지라도.
“고난으로 말미암아”(2절)
요나의 기도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기도다. 논리적으로 물고기 뱃속에서 부르짖을 수 없다. 여호와를 부른다는 표현은 창자가 끊어지듯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을 말한다. 그런데 요나는 곧바로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다고 말한다.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는 기도에 하나님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 고백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하나님을 부른다. 기도는 중력의 법칙을 충분히 이긴다. 기도는 은혜의 부력으로 저 하늘 높은 곳에 계신 곳에 올라간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스올에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 이것은 역설이고, 아이러니고, 신비다. 기도는 바로 그런 것이다. 소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요나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소명은 항상 현재형으로 기도에 응답하게 하신다.
“주께서 나를”(3절)
요나는 자각한다. ‘주께서 나를 깊은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다고 말한다.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삶은 언제나 모호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믿는다면 분명해진다. 우리 인생의 주어(主語)는 하나님이시다. 그분께서 내 삶이란 문장을 풀어 나가셔야 한다. 삶이 모호하다면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해보자. 의외로 평안이 찾아온다. 믿음의 사람은 모호한 삶 속에서 기도한다. 깊음 속, 큰 물, 주의 파도, 큰 물결 들은 죽음을 상징한다. 요나는 이미 죽었다. 그러나 살아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4절)
신앙은 ‘비록’이다. 4절에 ‘비록’이 삽입 되어야 한다. ‘비록’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바로 이 신앙이 바른 신앙이다. 요나는 하나님을 알았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다. 다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음에 실망하고 분노한 것이다. 하나님은 조종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모든 것을 하신다. 요나는 그제야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안다. 나중에 다시 망각하는 잘못을 저지르지만.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주의 성전을 바라 보겠다’고 말한다. 솔로몬은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하면 응답해 달라고 간청했다. 다니엘도 성전을 향해 문을 열고 기도하다 사자 굴에 던져졌다. 기도는 하나님께 포기하지 않고 ‘비록’ ~했을 지라도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이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 깊음이 나를 ... 바다 풀이 내 머리를 ...”(5.6절)
요나는 죽었다. 5-6절의 표현들은 죽음의 경험이다.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해 달라든다. 그는 끊임없이 ‘나를’ ‘나를’ ‘나를’ 외친다. 모든 것이 자신의 적이 되어 자신을 공격한다. 하나님께 돌아서면 모든 만물이 거역한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도 그랬다. 이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또한 ‘하나님 여호와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던지셨나이다’로 회귀된다. 그러니 모든 환경이 자신을 힘들게 하고, 떠날 때 나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죽음이 찾아온다. 그것은 마음의 죽음이고, 관계의 죽음이다. 무엇보다 먼저 여호와께 돌아가라. 그것이 급선무다.
“내 영혼이 피곤할 때”(7절)
내 영혼이 피곤할 때, 그것은 소망의 불가능한 지경이다. 즉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깊은 절망만이 나와 함께 있을 때, 바로 그때 ‘여호와를 생각’해야 한다.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이미 자신의 기도가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라고 고백한다. 기도자는 하나님을 느낀다. 그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면 마음의 평강이 찾아온다. 그는 기도한다. 그리고 확신한다. 죽음에서 구원 받은 후 요나는 세상의 우상이 얼마나 헛된가를 안다. 그가 살았던 북이스라엘은 율법도 버렸고, 벧엘과 단에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섬겼다. 거짓된 것들이다. 그것들을 절대 구원하지 못한다. 그들은 오히려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9절)
구원은 여호와께 속해있다. 이것은 여호와만이 구원을 주신다는 뜻이다.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 있다. 온다. 그리고 이루어진다. 놀랍게 그는 마지막 기도를 ‘감사’로 마무리하며, 서원을 갚겠다는 결단으로 이어진다. 그의 서원이 무엇일까? 말씀에 순종하는 것일까? 아니면 무엇일가? 알 수 없지만 그의 소명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구원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 이것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울림있는 고백과 삶으로 알아야 한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10절)
아직 그의 소명은 끝나지 않았다. 물고기는 그를 토한다. 물고기 뱃속에서의 사흘은 종종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비유된다. 요나는 다시 시작한다. 아멘. 저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나이다.
*묵상할 주제
1. 기도에 늦을 때는 없다. 기도는 언제나 빠르다. 기도는 ‘지금’하는 것이다.
2. 기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환경이 열악해도, 아무리 절망의 순간이라도, 내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해야 한다.
3. 기도는 절망이다. 아니 절망을 고백해도 된다. 기도함을 그 절망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일단 기도하라.
4. 기도의 끝은 하나님의 재인식, 재고백이다. 만약 아직 이것이 없다면 더 기도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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