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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묵상] 2. 1:6-14 너희가 나를 모욕하지 않았다고?

샤마임 2020.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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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묵상] 2. 1:6-14 너희가 나를 모욕하지 않았다고?

  

사람은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아끼지 않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아낀다면 아직 마음을 주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아니 계산할 수 없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고도 아직 더 줘야 할 것처럼 사랑의 채무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철저히 계산됩니다. 작은 돈에도 민감하고, 사소한 것들에도 아까워합니다. 삶을 지혜로 살아야 한다면 계산해야 합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움직여지는 것은 막을 수 없습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아들은 아버지를 공경하고, 종은 주인을 공경합니다. 그런데 가장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서 자신을 사랑하는 증거들을 찾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너희는 도무지 나를 존경하지 않는구나. 너희는 왜 나를 멸시하는냐?”

“아니, 우리가 언제 주의 이름을 멸시했단 말입니까?”

“너희가 나를 멸시하지 않았다고? 좋다. 증거를 보여주마. 너희가 나의 제단에 드린 ‘더러운 떡’을 보아라. 이것이 과연 나에게 드릴 합당한 떡이냐? 그런데도 너희가 나를 멸시하지 않았단 말이냐?”

  

제단에 드리는 떡(레헴)은 진설병이 아닌 제물로서의 떡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때 더러운 것을 가져갔습니다. 떡뿐이 아닙니다. 그들은 ‘눈먼 희생제물’과 ‘저는 것, 병든 것’을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 앞에 드려질 수 없는 흠 있는 제물들입니다. 하나님은 흠 있는 제물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흠 있는 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합니다. 왜 제사장들이 흠 있는 제물을 하나님께 가져갈까요?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일까요 아니면 백성들이 가져온 제물을 제사장들이 바꿔치기한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정답을 찾을 수가 없지만 충분히 그렇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12-13절에서 그들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저기 성전 앞에 희생제물을 드리러 오는 사람이 보입니다. 

“어이, 여보시오. 이거 얼마 주고 산 거요?”

“이거요? 30만 원이요. 그런데 왜요?”

“어이구. 뭣 하러 이렇게 비싼 걸 사요? 성전 왼쪽에 보면 제물을 파는 가게가 있을 겁니다. 그곳에 가시면 이 양을 되팔면 25만 원을 다시 받을 겁니다. 그리고 10만 원짜리 양으로 한 마리 가져오면 됩니다. 그럼 15만 원 이득 보는 거잖아요?”

“네? 그렇게 너무 싼 제물은 눈도 멀었고, 다리도 절어서 하나님께 드릴 수 없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을.. 제가 제사장이 아닙니까? 제가 괜찮다고 하는데 누가 뭐래요? 걱정 마시고 바꿔 오세요. 뭐 하러 그렇게 비싼 걸 하나님께 드립니까? 아깝게?”

“...... 괜찮을까요?”

“그럼요. 괜찮다 마다요. 그리고 바꿀 때, 000제사장이 그랬다고 하면 5천 원 깎아 줄 테니 꼭 제 이름을 대세요.”

  

예수님은 이러한 성전을 향하여 ‘강도의 소굴’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철저히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으며, 하나님에 드리는 제사를 역겨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아깝고 무의미한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싸고, 좀 더 무가치하고, 좀 더 쓸데없는 것들로 하나님의 제단을 더럽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죽은 신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공경도 없고, 사랑하는 마음도 찾을 수가 없고, 하나님이란 존재 자체도 그들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도 제단은 불타고 있고, 요란스러운 제의는 끊임없이 매일 계속됩니다. 그러고도 그들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왜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까?”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고? 너희가 나에게 한 짓을 보아라. 나를 모독하고도 나에게 긍휼을 바라는 너희는 도대체 누구냐?”

  

하나님의 마음이 아픕니다. 괴롭고 고통스럽습니다. 제발 누가 성전의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 하십니다. 무성의하고, 조금의 마음도 담겨 있지 않은 그들의 제물은 더 이상 받고 싶지 않다 하십니다. 문득문득, 우리의 모습도 제사장들의 모습과 같지 않을까요?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는 손이 벌벌 떨리도록 아까워하면서도, 복을 달라고만 외치는 탐욕스러운 존재는 아닐까요?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은 얼마를 쓰는지도 모르면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은 십 원 하나까지 정확하게 계산하고 기억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상한(샤브르) 심령이란 짓이겨진 마음입니다. 완전히 부서져서 더 이상 소망도 없고, 살아갈 힘도 없는 완전한 절망의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한 마음’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상한 마음은 나에게 소망이 없음을 알고 철저하게 무너지는 것입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나에게 절망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손을 내밀 수 없습니다. 내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지 못합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한 제물을 가지고 제단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소망 없는 나를 위한 제물, 나를 대신해 죽어야 하는 제물을 보며,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오! 애통하는 자여 복이 있도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로하시리라. 

오! 죄인들이여 그대들이 복이 있도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대들을 찾으러 왔도다.

오! 절망하는 자들의 복이며, 오직 하나님께 소망이 있음을 아니 그것이 복이로다.

 

누가 하나님의 식탁을 더럽히는가? 누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가? 누가 서원하고도 ‘흠 있는 것으로 속여’(14절) 여호와께 드리려는가? 그들에게 저주가 있으리라. 하나님은 작지 않다. 결코 작지 않다. 하나님은 ‘큰 임금’이고, 하나님의 이름은 모든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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