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고전읽기]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
‘초대교회로 돌아갑시다.’는 구호를 많이 듣습니다. 우리는 ‘초대교회’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하면 오순절 성령 강림 때 베드로의 설교로 삼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을 때를 생각합니다. 아니며 사도들의 전도로 급성장하는 교회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초대교회의 실제 모습은 어떨까요? 최근 번역 출간된 로버트 뱅크스의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를 보면 약간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뱅크스는 1세기 문헌들을 통해 검증된 사실을 토대로 초대교회 이야기를 소설 형식을 빌려 적었습니다. 그 외에도 초대교회의 삶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적지 않은 책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몇 권의 책이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다 순교한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사도 요한의 직제자인 폴리갑의 <편지와 순교록>있습니다. 또 <디다케-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디다케’는 그리스어로 우리말로 ‘교훈’쯤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작자 미상의 디다케는 100-150년경에 쓰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시기는 사도 요한이 요한 계시록을 기록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대입니다. 급속한 성장을 이룬 교회가 여러 가지 혼란을 일으키자 그것들을 바로잡고자 누군가에의 기록된 것입니다. 디다케는 다음에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초대교회 당시의 교회 생활을 다룬 <사도전승>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사도전승>은 대체로 히폴리투스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저작인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이 부분은 아직도 논쟁할 여지가 많고 분명치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사도전승>의 저작 시기가 3세기 초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사도전승>은 한 사람의 사상이나 신학을 논리적으로 기술한 책이 아니라 교회 안의 제도와 생활 등을 수집해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은 사라졌고, 라틴어 역본, 꼽트어 역본, 사히디꼬 방언 역본, 보하이리꼬 역본, 아랍어 역본, 에티오피아 역본이 존재합니다. 가장 중요한 역본은 라틴어 역본으로 그곳에서 인용된 성경은 에라스무스의 불가타역 이전 성경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즉 4세기 말 이전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도전승>이 후대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시기에 기록된 것임을 말해 줍니다. 이렇게 본다면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은 초대교회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문서임에 틀림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증인과 순교자에 대한 대우가 기록된 것은 콘스탄틴 황제가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한 것 이전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종합해 본다면 <사도전승>은 기원후 100-300까지의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저자가 히폴리투스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사도전승>의 발견과 역본들의 내용은 살펴보면 히폴리투스이거나 그에 준하는 교회의 지도자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자, 그럼 책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도전승>은 모두 43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장은 머리말이고, 마지막 43장은 맺는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본문은 모두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부는 2장에서 14장까지로, 교회의 구성과 교회 제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부는 15장에서 21장까지로 교회에 들어오고자 하는 예비신자들의 등록과 세례, 입교 등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마지막 3부는 22장에서 42장까지인데 신자들의 생활 전반을 다룹니다. 자 그럼 책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먼저 저자의 의도가 담긴 머리말과 맺은 말부터 살펴봅시다.
“사실 최근에 무지로 인해 잘못을 저질렀거나 오류에 떨어진 사람, 그리고 무지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 때문에 성령께서 올바로 믿는 이들에게 완전한 은총을 내려 주셔서 교회를 지도하는 이들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전해 주고 보존해야 할지를 알게 되기를 바란다.”
저자는 독창적인 관점에서 글을 적은 것이 아니라 당시 교회에서 바르게 시행되고 있는 교회 제도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교회가 성장하면서 정상적인 교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맺은 말에서는 기술한 가르침들을 ‘감사와 올바른 믿음으로 받는다면, 변화시키고 영원한 생명을 줄 것’이라고 충고합니다. 즉 <사도전승>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허락한 교회의 바른 규칙과 형식을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천년이 넘은 현대교회가 초대교회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 당시의 교회 규칙과 제도들을 살펴봅시다. 먼저 교회 구성은 감독자와 장로로 구분합니다. 감독은 현재 목사이며, 장로는 지금의 장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감독자는 온 백성에 의해 선출’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현재 교회 청빙에서 교인들의 직접 투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감독의 안수는 앞선 감독자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감독자의 서품 기도에는 그가 앞으로 감당할 사역에 대한 기도입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이며, ‘당신의 거룩한 양 떼를 보살’펴야 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고, 직무를 나누며, ‘온갖 속박을 풀어 주’는 일을 합니다. 쉽게 설명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했던 사역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입니다. 양 떼를 돌보고, 양육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목양 사역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장로는 감독에 의해 선출되며 감독과 다른 장로들이 안수하여 장로직을 감당합니다. 장로의 일은 감독의 명령에 행해집니다. 이것은 현대교회의 장로와 약간 다릅니다. 그다음 직은 봉사자입니다. 봉사자들은 감독자의 안수로 선택됩니다. 봉사자는 ‘감독자로부터 명령받은 것을 이행하며 감독자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임직을 받습니다. 봉사자는 현재 집사의 직분에 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현재 교회 안에 있는 목사, 장로, 집사의 직분이 초대교회 때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부로 넘어가면 예비신자들에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초기 사도 시대의 경우, 대부분의 예비신자들은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교육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미 성경을 알고 있으며, 구약의 메시아가 예수임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 등의 이방인 선교자들에 의해 급속하게 이방인들의 회심이 이루어지자 교육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성경에 대해 알지 못하며 예수 그리스가 갖는 구약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2부에는 교회 안으로 들어오고자 하는 예배 신자들에 교육을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초대교회의 문턱은 상상 외로 높았습니다. 처음 말씀을 듣기 위해 온 사람들을 교사들 앞으로 인도되어 검증을 받아야 했습니다.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은 있는지, 그가 선한 사람인지, 부부라면 서로에게 잘하고 있는지, 직업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래서 선한 증거가 없으면 되돌려 보냈고, 포주와 같은 직업은 그만두어야 받아 주었습니다. 심지어 극장에서 일하거나 검투사와 관련된 일을 해도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군인의 경우는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고 만약 죽이라는 선서를 한다며 거절해야 한다고 못 박습니다. 말씀을 듣고 천천히 변화되기를 기대하는 현대교회와 다르게 초대교회는 도덕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행동이나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교회는 그들을 받지 않았습니다.
예비 신자들은 무려 ‘3년 동안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3년이 끝났을 때 기간이 아닌 그의 삶을 보고 세례를 줄 것인지 판단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세례를 받게 될 사람들은 다섯째 날에(목요일)에 목욕하고 씻어야 합니다. 또한 세례 받기 하루 전에 금요일에 단식해야 하고, 토요일에 한 곳에 모여 기도를 받고 무릎을 꿇고 안수(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를 받으면서 그들은 신앙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까?”
“네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시고, 본디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사 성부 오른 편에 앉으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습니까?”
“네 믿습니다.”
지금의 세(침)례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당시에는 도덕적 삶이 중요하게 여겨졌고, 교회 안과 밖의 삶이 거의 다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세례식을 마치고 곧바로 성찬식을 거행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초기의 경우, 고린도교회처럼 만찬과 성찬이 구분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완전하게 구분된 것입니다.
3부에서는 교회 생활의 전반을 다룹니다. 과부와 동정녀들은 자주 단식하며 교회를 위해 기도하기를 권합니다. 병자나 봉사자들에게 선물(빵 등)을 줄 경우 당일에 갖다 주어야 하고, 만약 그날 전해주지 못하면 다음날 거기에 자기의 몫을 덧붙여 갖다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누군가를 도울 때는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공동체가 함께 하는 식사(아가페 agape)에서는 기도하며 시편을 암송하기도 합니다. 저녁 식사 시간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소출의 일부는 감독(목사)에게 바치며, 감독은 축복해 줍니다. 그런데 ‘포도, 무화과, 석류, 올리브, 배, 사과, 오디, 복숭아, 자두’ 등은 축복하지만 ‘수박, 멜론, 참외, 양파, 마늘’ 등의 채소 등은 축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기준인지 알 수 없으나 특이한 대목입니다.
기도에 대한 교훈도 많습니다. 매일 한 장소에 모여 간단한 가르침이 있고, 기도한 다음 자기의 일을 하러 나갑니다. 아침에 일어나 일하기 전에 손을 씻고 하나님 기도해야 한다는 규칙도 있습니다. 만약 교회에 교사(순회 전도자로 보인다)나 강습(설교나 부흥 사경회를 의미함)이 있으면 늦지 않게 교회에 나가야 합니다. 또한 ‘만일 강습이 없는 날이면 각자는 자기 집에서 거룩한 책(성경)을 펴들고 유익된다고 여겨질 때까지 충분히 독서’ 해야 합니다. 개인 기도에 있어서도 제3시, 제6시, 제9시에 기도할 것은 권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범을 보이신 기도의 시간들입니다. 새벽 기도회가 한국에만 존재하고 길선주 목사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말합니다. 아마도 한국 새벽 기도회는 그렇게 시작된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새벽 기도회는 이미 초대교회 때문에서 존재한 것입니다. 그들은 일을 시작하기 전, 일의 중간, 그리고 일을 마치고 기도했습니다. 심지어 잠들기 전에도 기도하고 자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적은 분량이긴 하지만 순교자와 고문 등으로 건강을 현저하게 상실한 증거자, 그리고 과부 등에 대한 교회의 대처는 구제를 넘어 삶을 책임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을 읽어보면 교회가 한 몸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개교회화 되고, 개인적 이기주의에 휘둘리는 현대교회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입니다. <사도전승>의 배경이 되었던 시기는 교회에 핍박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 당하며, 수난을 당했던 시기입니다. 그들의 신앙고백은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신자들의 삶을 거룩하도록 촉구했고, 교회 안에 들어온 지체는 한 몸처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은 부흥과 성장, 또는 교리에 대한 순수한 열정 이전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한 몸 의식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진정 초대교회로 돌아가고자 하나면 ‘나’라는 배타적 이기주의를 버리고 ‘우리’라는 한 몸 의식을 먼저 실천하는 것이 옳습니다. 멀리 보지 말고 주변을 둘러보고 작은 나눔부터 실천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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