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편 묵상] 2. 인도하시는 여호와
[시편 23편 묵상] 2. 인도하시는 여호와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저는 1절의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를 깊이 묵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문제가 2절 전체에서 말하기 때문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이유는 ‘인도하시는 목자’ 때문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인도합니다.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게 합니다. 그것을 양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입니다.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먼저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푸른 풀밭’입니다. 풀은 양들의 먹이입니다. 풀이 없다면 양들은 살 수 없습니다. 양들을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은 놀이기구가 아닙니다. 다양한 행사나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그것은 ‘푸른 풀’입니다. 목자는 푸른 풀이 어디 있는지를 알고 그곳으로 양들을 이끌어야 합니다. 생존과 직결되어 있으며, 삶의 이유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좋은 목자는 좋은 풀이 자라는 곳을 압니다. 계절에 따라 자라는 풀이 다르고, 영양분도 다릅니다. 어떤 풀은 무성해 보이지만 안 좋은 풀이 있고, 어떤 풀은 볼품없어 보이지만 양들이 꼭 먹어야 하는 풀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초록은 극히 짧은 시간 동안만 이어집니다. 케네스 E. 베일리는 베들레헴과 레바논에서 30번의 겨울을 보내며 알게 된 것은 풀밭은 고작 일 년에 ‘석 달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합니다.(<선한 목자> 55쪽) 나머지의 시간은 갈색의 풀 더미를 우걱우걱 씹어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목자였던 다윗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이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양들에게 푸른 초장은 거의 이상(理想)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즉 그것은 그렇게 되고 싶은 환상과 꿈을 말합니다.
가장 완벽한 상태로 존재하는 ‘푸른 풀’을 먹는다는 것은 최고의 행복이자 이상이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최적의 상태를 만들어 줄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7의 ‘부족함이 없다’는 단어는 1절과 동일한 ‘하세르’입니다. 피터 크레이키는 시편 23편이 출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연관시키면서 ‘여호와께서 계속해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실 것이라고 믿는 인도하심과 원기 회복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부재의 상태에서 완전한 충만을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이시며’라는 표현 속에서 완전한 만족의 상태를 발견합니다. 케네스 베일리는 양들이 결코 쉽지 눕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대체로 초식동물들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육식 동물들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습니다. 겁이 많다는 말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최대한 애를 쓴다는 말입니다. 그럼 언제 양들이 누울까요?
“양이 자리에 눕는 건 오직 배가 불었을 때나 갈증이 해결되었을 때, 그리고 야생동물에 의해 위협을 받지 않거나 곤충의 괴롭힘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만 가능하다.”(필립 켈러)
샬롬의 상태에서 양들은 눕습니다. 수동적 표현처럼 보이는 ‘누인다’는 말은 최고의 편안함을 제공받았다는 말입니다. 목자이신 여호와는 양들로 하여금 ‘부족함이 없도록’ 환경을 제공하십니다. ‘눕는다’는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입니다. 단지 푸른 초장과 물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이 말하는 샬롬의 상태는 실제의 푸른 풀밭이 아니라 채우시고 이끄실 하나님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다윗은 다른 시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 4: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그렇다면 ‘눕는다’는 표현은 환경에 의한 결과론적 의미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가 분명합니다. 의심 많고 걱정하는 존재가 양들이 누리는 샬롬에 대한 고백은 철저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감사는 상황을 넘어 하나님께 대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는 자가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필립 켈러는 이 구절에서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자신의 목초지는 그 어떤 곳보다 비옥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미시즈 갯어바웃’이란 양이 있는데, 이 양은 종종 울타리를 벗어나기도 합니다. 문제는 울타리를 벗어나지만 결코 먹을 풀이나 물이 넉넉지 않다는 것입니다. 고생만 실컷 오고 되돌아오기를 반복합니다. 문제는 이 양이 자신의 새끼들과 다른 양들까지 꼬드겨 밖으로 나간다는 것입니다. 사태가 커지자 필립은 ‘미시즈 갯어바웃 죽이기로 작정합니다. 다른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무리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 준다 해도 그곳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결국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첫 사람과 아담과 하와가 살았던 에덴동산은 가장 완벽한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욕심을 내었고, 말씀의 울타리를 벗어났습니다. 푸른 초장에 눕는다는 말은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신 존재임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신뢰가 만날 때 비로소 의심 많은 양은 눕습니다.
쉴만한 물가로
풀을 먹었다면 그다음 할 일은 물을 마시는 것입니다. 풀 안에 수분이 있지만 대사를 위한 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물은 생명 유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몸은 치명적인 해를 입고 얼마 가지 않아 죽고 맙니다. 음식을 소화하고 혈액이 순환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을 마셔야 합니다. 양은 물을 마시지 않으면 물을 찾기 위해서 헤매기 시작합니다. 만약 적당한 수원지를 찾지 못하면 구덩이에 있는 더러운 물을 먹게 됩니다. 양들이 기생충에 감염되고 병이 드는 많은 이유가 신선하지 못한 물을 마시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하란으로 도망갈 때 한 우물에 이르렀습니다. 잠시 후 자신이 아내가 되는 라헬이 양들에게 물을 마시게 하도록 찾아옵니다. 우물을 보존하기 위해 큰 돌로 우물을 막아 놓았습니다. 야곱은 라헬이 오자 우물을 덮는 돌을 치우고 라헬의 양들에게 물을 먹입니다. 라헬이 오기 전 돌 덮개를 치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야곱을 여리고 약한 존재로 알지만 성경을 잘 들여다보면 야곱은 힘이 장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후에 라반의 양을 칠 때도 그 어떤 목자보다 부지런하고 열정적으로 살았습니다.
목자는 푸른 초장만 생각하지 않고 마실 물을 생각해야 합니다. 문제는 양들은 겁이 워낙 많기 때문에 조금만 물살이 느껴지는 곳은 마시지 못합니다. ‘쉴만한’이란 단어는 ‘메노우카’라는 히브리어로 ‘조용한’ ‘잔잔한’ 이란 뜻입니다. 조용하기 때문에 ‘쉴 만한’ 곳이 되는 곳입니다. 팔레스타인에는 흐르는 물이 요단 강 외에는 거의 없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양들은 우물에서 목자가 퍼 올린 물을 마셨습니다. 야곱과 대화한 목자들이 힘들어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필립 켈러는 목자가 양들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 놓고 목자가 직접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는 장면을 서술합니다. 물이 있다고 다 마실 수 없습니다. 양들이 먹을 수 있도록 잔잔한 물을 만들어 주는 것도 목자의 몫입니다.
인도하시는도다
하나님은 인도하십니다. 이곳에 몇 가지 전제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순종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앞서가시는 분입니다. 따르는 양과 인도하시는 목자가 발을 맞추지 않으면 절대 따라갈 수 없습니다.
*목자는 앞서가십니다.
하나님은 뒤따르지 않습니다. 앞서가십니다. 왜냐하면 양들이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할 때 하나님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서가시는 하나님을 따라갑니다. 앞서가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구원과 보호를 의미합니다.
“야곱아 내가 반드시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반드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의 양 떼같이 하며 초장의 양 떼같이 하리니 사람들이 크게 떠들 것이며 길을 여는 자가 그들 앞에 올라가고 그들은 길을 열어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가며 여호와께서는 선두로 가시리라” (미 2:12-13)
앞서가신다는 말은 ‘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억압하고 강제하지 않습니다. 목자들은 가끔 양들 뒤에서 몰고 갑니다. 가끔 게으르고 엉뚱한 길로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목자가 앞서가면 개를 두어 양 떼 뒤에서 양 떼를 몰아갑니다. 이탈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목자이신 하나님은 ‘앞서’ 가십니다. 먼저 가시고 인도하십니다.
*목자는 먼저 이름을 부릅니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압니다. 양은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목자인지 타인인지 구분합니다. 케네스 베일리는 에릭 비숍의 책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인용합니다. 자신의 양을 가압류 당하여 수많은 양 무리에 갇히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양을 찾을 돈을 마련하여 양 무리에 접근합니다. 관리하던 영국은 장교는 자신의 양을 쉽게 찾을 거라는 목동의 생각을 조롱합니다. 그러나 목동은 자신이 늘 사용하던 ‘호각’을 불자 놀랍게도 그의 양들만 그 목동 앞으로 달려왔습니다. 맞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목자도 양을 압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요 10:3-5)
그러므로 우리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푸른 초장과 조용한 물 가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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